[바낭] 회사에 사표 냈습니다. 3
기왕 이렇게 된거, 청와대로 간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자리를 폈습니다. 하루를 마감할때가 되니 입이 근질거려 참기가 어렵네요. 그래서 오늘도 뻘글을 투척합니다.
게스트하우스가 제공하는 아침밥의 수준이 뻔하긴 하지만 여기는 진짜 좀 그렇더군요. 백반만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군 시절 먹던 것보다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방 예약시 옵션으로 선택한 도시락을 들고 (5천원. 김밥 두 줄에 제철과일 + 삼다수의 구성이라 했는데 김밥은 먹을만 했고 제철 과일은 거봉 6알이었습니다. 물이 평창수였다는게 함정) 아침 7시경 셔틀에 몸을 투척 합니다. 자매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 3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연인 한 쌍. 그리고 혼자 온 여성 한 분. 이렇게 여섯이 성판악으로 향합니다. 성판악에 도착할즈음 교통사고를 목격했습니다. 굽어진 정도가 심하지 않은 커브였는데 스티어링휠 조작 미숙 혹은 액셀레이터 조작 미숙으로 보이는 벽면? 추돌 사고였습니다. 운전자는 무사해보였고 전면부가 크게 손상된 차량 옆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표정이 안타까웠습니다. 차종이나 운전자의 차림으로 보아 차량을 렌트한 관광객으로 보였습니다.
성판악에 도착한 6명은 각자 흩어져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부러 텀을 두느라 화장실도 들르고 로드무비 앱으로 영상물들을 찍고나서 출발. 전반적으로 흐린 날씨라 등반 자체에 의의를 뒀습니다. 꾸역꾸역 오르다보니 30대 커플을 제외하고는 다 추월. 산을 타다보면 비슷한 페이스의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엔 외국인이었습니다. 도저히 산에 오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복장(스트릿 브랜드 후드티, 아디다스 트레이닝 팬츠)이었으나 등에 맨 낡은 독일 아웃도어 브랜드 가방이 그가 종종 산을 오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세시간 정도를 걸어 8부 능선이자 식사 포인트인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 게스트하우스 직원 분이 여기서 밥을 먹는게 좋다고 알려줬었습니다. 백록담엔 바람도 많이 불고 건물이 없기 때문에 미리먹고 가면 좋다고 하더군요. 라면도 팔테니 같이 먹으라고 했었고. 보나마나 말도 안되는 폭리를 취하고 있을거라 생각했기에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겨울 기온의 산을 오르고 나니 라면이 땡기더군요. 심지어 가격도 1,500원. 비싸다는 생각을 가지기 직전에 위치한 가격이었습니다. 평소 보기 힘든 뚜기社의 육개장이라는게 함정이었지만.
홀로 앉아 김밥과 라면을 먹고 있자니 옆에 아까 그 외국인 청년이 보입니다. 등산 중 1,2차례 말을 걸까 했었지만 일단 물꼬가 트이면 대화를 이어가야 할거 같아서 그만뒀었죠, 그 청년 옆에 있는 나이 지긋한 영감님이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영감님 : 웰아유푸롬 / 청년 : 브라질
전 여기서 대화가 종료될거라 예상했는데 왠 걸, 발음은 투박하지만 내용만큼은 스칸다나비아 반도의 침엽수림처럼 풍성하다는 반기문 총창님 스타일로 대화가 이어집니다. 엿들은 내용을 정리해보면 청년은 아시아 투어중이며 가는 곳에 있는 명산은 대부분 다니는 듯 했습니다. 혼자 온 사람들간의 유대감이었을까요. 훈훈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정상 정복. 백록담을 향해 열심히 걸음을 옮깁니다. 대략 95%가량 도착했다고 느낄때 쯤 엄청난 강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저같은 성인 남성이 휘청거려 걸음을 옮기기 힘든 정도. 눈보라의 형태라 안경엔 서리가 끼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가시거리가 대략 10m 이내인 상황이라 불안감이 엄습하더군요. 앞 뒤에 등산객은 보이지 않고 정상이 어딘지 애매해지기 시작합니다. 별 생각이 다들기 시작합니다. "과연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내가 정신을 잃으면 목에 위스키 통을 맨 침 질질 흘리는 이름 모를 견공이 날 구하러 올까. 내가 지금 이렇게 위급한데 대통령은 뭘하고 있는거지, 어제 전 여친 카톡에 인사 정돈 해줄걸 그랬나."
갑자기 너무 추워져서 어디론가 피하고 싶은데 피할 공간도 없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보니 통신 중계 시설이 하나 있습니다. 그 뒤편에 앉아 바람을 피하고 있는 영감님 한 분을 발견. 엄청 반가운 기분으로 뛰어가 옆에서 같이 바람을 피합니다.
본인 : 이 정도 악천후면 다시 내려가야 하나요? / 영감님 : %$@#*&!
사투리가 심하셔서 도저히 알아들을수가 없습니다. 저의 꿀벅지 사이에 손을 넣고 녹이는 동안 영감님의 친구분이 등장합니다. 이 분은 구면입니다. 아까 등반로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젊은 친구가 혼자 왔네. 근데... 오늘 등산하고 있는거보면 직장인은 아닌개벼?'라고 하셨던 분. 자세한 설명이 귀찮아 휴가내고 왔다고 상황을 정리했었습니다. 이 분의 등장과 함께 원래 영감님은 갑자기 사라지심.
이 분이 구세주가 됩니다. 일단 말이 통합니다. 정확한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으나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젊은이, 이런데 앉아있음 얼어죽어"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시는데, 영감님 가방에 달린 산악회 리본이 무공훈장 마냥 든든하게 느껴지더군요. 영감님을 따라 50미터 정도를 올라가니 백록담 팻말이 보입니다. 정상 바로 아래였는데 가시 거리가 짧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이 와중에도 기록은 남겨 보겠다고 로드무비 앱을 켜서 2장면을 추가합니다. 저를 뒤따라온 붉은 옷의 청년이 해맑은 표정으로 "사진 찍어 드려요?"라고 하는데 결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자기를 찍어 달라는게 주 목적이었겠지만) 청년에게 거절 의사를 표하고 황급히 하산하기 시작합니다. 바람이 약해지는 지점에 도달해 페이스를 찾으며 내려가고 있는데 마주보고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전부 저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까도 마주친 사람은 많았는데 이렇게 인사를 많이 나누진 않았거든요.
앞에 여성 산악회로 추정되는 10여명의 아주머니 분대가 등장하는데 선두부터 후미까지 웃음소리가 코러스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앗 아하하하핳하흥흥흐응" 그리고 전부 저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멋있다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알고보니 모자를 쓰지 않은채 올라간 덕분에 머리와 눈썹이 하얗게 얼었더군요. 허영호 대장님이나 아문센을 연상시킬 정도로. 이날 성판악 코스에서 거의 선두로 백록담을 찍고 내려갔고, 다른 분들은 마침 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저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죠. 여기부터 진달래 대피소까지 거의 모든 등산객이 환호, 웃음, 인사, 걱정등을 건내옵니다. 하루 사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환영을 받은적이 제 삶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 표정으로 가방에서 우비를 꺼내주시는 분도 있고 사진 찍어주겠다는 분도 많았습니다. 아이스맨이 되어 하산하던 도중 이렇게 된 이상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기장실에 들어가 라텍스 베게 처럼 쫄깃한 저의 입술을 기장님 귀에 갖다대고 "넌 너무 위험해 헤헤"라는 말을 해야만 할 거 같단 생각이 듭니다.
출발지로 돌아온 시각이 대략 13시 30분. 5시간 30분 정도에 걸쳐 한라산 등반을 마쳤습니다. 미리 블로그에서 접한 정보를 이용, 안내소에 들어가 천원을 내고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아 나옵니다. 이걸 받을려면 정상 정복 인증이 필요한데 아까 영감님과 조우시 위치를 파악하려 캡쳐해둔 GPS 샷이 힘을 발휘합니다. 유치한 행동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제가 좀 유치한지라 괜찮더군요. 발급 담당자분도 "벌써 다녀오신거에요?"라며 놀라시는데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 날 첫 발급자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인증서 발급이 대중화 되지 않은 탓이 더 크겠죠)
오후 늦게나 내려올거라 예상했는데 너무 일찍 내려와서 할 일이 없어 곤란했습니다. 이러저리 머리를 굴리다 떠오른게 도서관. 최근 도서관을 가본적이 드물었는데 짬짬이 메모해둔 위시리스트의 책들이 보고 싶어지더군요.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한라 도서관이 아주 쾌적하고 한산하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도착. 한가한 외곽에 자리한 도서관은 큼직한 매점도 가지고 있고 제법 말끔한 아웃테리어를 보여줍니다. 인테리어는 더 압권이더군요. 상당히 높은 천장을 가지고 있는데 채광을 심도있게 연구한 창의 배열이 아주 멋있었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봄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한라산을 오르고 내려와 예쁜 도서관에 앉아 있자니 삶이란게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주도에 살게 된다면 자주 가고 싶을, 그런 곳이었습니다.
시간이 심하게 많이 남았기에 이후엔 영화관을 찾아 노아를 관람했습니다. 한적한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자니 블론디의 미녀가 제 뒤에 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계속 토니스콧 드립이 이어지네요. 토니 형님도 광고인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혼자 이렇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이후 저녁엔 해오름 식당에 들러 돼지 앞다리 국이라는 제주에서만 맛 볼 수 있을거 같은 헤비한 음식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
-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선 유쾌함이 지속되는데 해가 진 이후 도심이나 동네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신산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 내일의 바이크 투어가 마무리 되면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에 뻘글도 마무리가 될 듯 합니다.
아침 첫비행기로 내리자마자 올라가는 바람에 공복에 물도 안 챙기고 올랐다가 탈진할 뻔한 작년 겨울이 떠오르네요. 고생하셨어요.
상황묘사가 참 좋네요.
한라산에 예쁜 도서관, 돼지 앞다리 국까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글 읽는데 부러워요.
사표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한라산 등반은 한번 해보고 싶어요.
올 한해 체력 단련해서..내년쯤?
글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합니다. 좋은 재주 가지셨어요 ^^
정성어린 칭찬 감사합니다. 한라산 정말 좋았어요. 풍경도 다양하고, 운동에도 참 좋고 말이죠. 제가 가본 산 중엔 최고였네요. 꼭 가보시길.
당장 제주도로 달려가고 싶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셨다니 보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