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듀게 역사

저도 다른 분처럼 듀게 이용 역사를 한번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기억력이 나빠져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것 같은 공포가 드니, 뭐든 적어두자는 마음이기도 하지요.


저는 한참 씨네 21을 보면서 듀나라는 사람을 처음 알았습니다. 전 나우누리 사용자라서 굳이 하이텔을 가입해서까지 누군지 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굉장히 짧게 인터넷을 어슬렁거리는 어쩌고 하는 표현으로 소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점점 영화를 볼 수 없는 날이 많아지고, 영화를 보는 날보다 영화에 대해 찾아보는 양이 늘어가게 되는 삶으로 바뀌면서 듀나게시판도 검색으로 알게 되었죠. 파란 화면 시절입니다. 그때 듀게는 너무 지루하게 뭔지 알아먹을 수도 없는 용어로 논쟁을 하던 시절이라 정말 가끔 구경만 하다가 나오곤 했습니다. 대학에서 듣는 교양 수준으로는 알 수 없는 인문학 단어들이 난무하고, 그런 걸 당연히 알아먹어야 하는 듯한 때였습니다.


이후, 영화를 일년에 몇편 정도 보는 수준으로 떨어졌을 때, 듀게에 붙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화면으로 전환할 즈음입니다. 처음에는 읽기만 하면 되니까 가입할 생각이 없었는데, 혹시나 해서 중간에 가입을 해두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거의 매일 듀게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부분은 넘어가면서 읽어도 독해가 되는 논쟁이 벌어지던 때였습니다.


붙박이가 되어 영화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뉴스도 듀게에서 듣게 될 즈음에는 사람들이 등업고시란 단어를 쓰더군요. 미리 가입해둔 게 다행이었죠. 그 때 즈음 제 삶은 이제 영화는 일년에 한두편 골라보는 수준으로 떨어졌을 때입니다. 듀게는 보려고 계획하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피하면서도 영화의 정보를 얻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일년에 한두편을 보면서도, 언젠가는 저 영화를 꼭 보리라고 찍어둔 영화는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도 스포일러를 피하며 읽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 영화에 대한 제 관심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어쨌든 영화를 보는 횟수의 감소에 비례해서 듀게 중독 수준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듀게 사용자의 감상은 제가 영화 선택을 하는데 거의 항상 도움이 되었습니다.


듀게에 영화 이야기보다 다른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중독 수준이었죠. 그러다가 이제는 내게 더 이상 영화를 보러다닐 여유가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스포일러도 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듀게에서 이런저런 모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이제 정말 영화를 보는 것은 물론이요, 새로 나온 영화 정보에 대해서도 둔감해지기 시작할 때 쯤, 듀게도 역시 뜸하게 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변했지만, 듀게에 나오는 영화 평과 내가 보고 나서 느낀 인상이 거의 맞지 않게 되버렸습니다. 사용자들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고 느꼈었습니다. 듀게에 듀나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이미 자주 접속을 하지 않아서 듀나님이 오지 않으신 지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하지만 한때는 거의 살다시피하던 곳이 문이 닫히니 어찌나 고아같던지. 이런 쓸데없는 글이라도 써서라도 듀게 죽었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닥 제가 흥미를 느낄 만한 글이 없고 겸해서 제 자신도 영화와 한참 멀어져버렸지만, 듀게가 유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어제 문득 사람들이 떠났네 마네 하는 걸 보다가, 저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듀게에서 시간을 두고 뭔가를 읽고 쓰는 것이 힘들어진 분들도 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것이 많아진 나이에는 하루 하루 일과를 거쳐나가는 것도 벅찹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이,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넘어 의무로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져버렸죠.


한 때 한참 붙어 살 때에는, 논쟁의 어느 한편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각을 가다듬고 세밀화하는 과정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제 자신도 요즘 벅차긴 하지만, 그런 논쟁을 구경할 수 없는 건 확실히 달라진 점 같습니다. 저도, 게시판 사용자들 자신도, 사용자 구성도, 모두 바뀌는 중이겠죠. 또 다른 방식으로라도 즐거운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 와 정말 오래전부터 하셨네요

      지금의 듀게도 나름 잘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고대 벽화처럼 옛사람들은 그리 생각해주지 않을지도요
    • 아련하네요. 파란 화면.


      거실 전화기를 감춰놨는데 엄마 님의 '전화기가 어디 갔지' 혼잣말씀에 숨을 죽이던...




      아, 그리고 저는 이 부분이 좋네요. "논쟁의 어느 한편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각을 가다듬고 세밀화하는 과정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제 자신도 요즘 벅차긴 하지만, 그런 논쟁을 구경할 수 없는 건 확실히 달라진 점 같습니다."

    • 듀나 시간의 선배님이시네요.


      저 때 부터 전부 다 따져서 얼마 안되는데


      까마득한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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