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책임진다는 것

아래 제일 먼저 모진 댓글 달았던 사람으로서 약간 책임감 같은 게 느껴져서

제가 고양이 키우던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좀 유화된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2004년 봄, 아직 대학생이었던 저는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합니다.

그 당시 디씨 냥갤을 주축으로 인터넷에서 고양이 키우는 것이 붐이었고

그때 좋아하던 여자애가 고양이를 매우 좋아했던 것도 고양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원인 중에 하나였던 것 같고(...) 

아무튼 그런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마침 원룸에서 투룸으로 옮기면서 이래저래 여건이 되어서

다른 커뮤니티에 분양글이 올라온 새끼고양이를 한마리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성격이 만만치가 않은 놈이었어요. 에휴 참. 

게다가 대학생이 고양이 키울 때 있을 수 있는 대표적인 클리셰 중에 하나. 어머니는 고양이를 질색을 하십니다. 

그러다 1-2년쯤 지났을 때인가. 이사해야 할 무렵이었고, 이불에 오줌 싸는 버릇을 못 고쳐서 고생했고, 아무튼 이래저래 고양이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고양이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지식 조차 없었으니까요. 

책 한권 읽을 생각을 안 했고, 그저 냥갤이나 냥이네 같은 커뮤니티 오가다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을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무지했고)

듀게에 징징대는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딱히 재입양시킨다거나 버린다거나 그런 뉘앙스도 아니었고,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전부였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저에게 고양이를 보내셨던 분에게서 듀게 쪽지가 온 겁니다

(그분도 듀게를 하는 줄 알았다면 듀게에 글을 올리지 못했겠죠. 일단 분양은 다른 커뮤니티에서 받은 거니).

정 그렇게 안 되어서 다른데 보낼 생각 하는 거면 자기한테 도로 보내라고. 

순간 정신이 팍 들었죠.

아 내가 섣부른 짓을 했구나. 그렇지만 선택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내 것이다.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의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놈은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은, 말로 다 하자면 사흘 밤낮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악행을 저질렀지요. 

다행히 첫째 들인 직후에 엄청나게 귀엽고 얌전하며 심지어 제가 그 이름을 닉네임으로까지 쓰게 된 둘째와 묘연이 닿아서

고양이가 다 그런 거다 하는 편견을 갖지 않게 해주었고 

두놈이 알콩달콩 귀엽게 노는 꼴을 보면 고생과 시름이 잊혀질 때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여전히 고양이에 대해 무지한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요. 

그저 길거리 헤매는 신세보다는 먹을 거 마실 거 잘 거 걱정 없는 늬들 신세가 안 나으냐. 하는 마음으로.

어디 갖다 버리지만 않으면 책임은 진 거지 하는 식으로 살았어요. 

고양이를 키우긴 했지만, 동물 애호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그러다가 2012년 가을에 둘째가 크게 아프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급한 병환은 수술을 했지만 그 후처리만 몇 달은 걸렸고, 수술 불가 판정을 받은 질환도 안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눈에 띄는 큰 탈은 없어 병원에 단 한번도 데려가본 적 없던 저는 

처음으로 우리 고양이들이 이제 나이가 먹어서 늙은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병원에 대한 정보와, 질병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하면서 제가 얼마나 고양이의 생태에 대해 무지했는지 알게 되었고요.

그렇게 고양이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첫째가 왜 그렇게 매일같이 사방에 오줌 테러를 했는지도 지금은 대략 파악이 됩니다. 

그리고 왜 그러는지 알게 되니 어떤 말썽을 부려도 고양이가 원망스럽기보다는 더 잘 해주지 못한 내 탓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결국 저는 아무 준비 없이 고양이를 들여서 서로 적응하는데 십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 십년이 지난 사이에 우리 고양이들은 이미 할배 할매가 되었고, 이제 살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웠지요. 

제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지했는지 깨달으니 많이 안타깝더라고요.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첫째놈 붙들고 분투하는 대신 훨씬 즐거운 시간들 보낼 수 있었을텐데

첫째놈 성격도 이렇게까지 비뚫어지지는 않았을텐데

이제 이놈들 죽으면 난 어쩌나. 

(다행히 의도치 않게 업둥이 셋째가 생기긴 했습니다)


아랫글 쓰신 분, 지금은 마음이 좀 진정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처음 쓰신 글 보고는 솔직히 화가 많이 났습니다. 무지하고 무책임했던 저의 예전 모습이 오버랩되어서 더 그랬는지.

그렇지만 중간에 댓글로 달아주신 저간의 사정을 보니 조금은 더 이해가 되면서, 안타깝기는 더 안타깝네요.

글쓴 분은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고양이를 키우면 안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도, 이제 키운지 2년 되셨다고 했는데 그에 비하면 고양이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많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저 책임감 하나로 몇 년을 버텼던 제 모습과 너무 비슷해 보여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행히 제 파트너는 동물을 낯설어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저보다 훨씬 더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러나 이전의 동거인들 중에는 트러블이 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겪어낸 지금은 그저 기억될 뿐이지만)

글쓴 분의 파트너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불행의 시작인 거지요. 

그렇지만 끝까지 책임감 있게 잘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처음에 우여곡절이 있어도, 결국에는 잘 되기를, 진심으로. 



    • 이제 막 왕초보이긴 하지만 동감합니다 저도 가끔 제가 도무지 감당못할 상황이 올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단지 최선이 아닌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요


      그나저나 님의 고양이는 왜 오줌테러를 했는지 살짝 귀띔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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