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 삼부작 봤습니다.
사진출처:http://cinemadal.tistory.com/
세영화 모두 두 남자 사이, 그리고 동성애자들과 사회속의 역학관계들을 다루고 있어요. 힘세고 목소리센 남자들의 줄다리기이기 때문에 서로 정서적힘이 뻥뻥터집니다. 이송희일의 시그니처 격인 앞섶씬도 세 작품 모두에 들어가있고요.
[지난 여름, 갑자기]
맘에 담아두던 선생님을 게이바에서 본 학생이 그걸 빌미로 협박하며 데이트를 요구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구도에선 학생이 일방적으로 열세에요. 근데 사실 누가봐도 학생 상우는 협박할 마음이 없어보이거든요.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미소년의 이미지라면 뭔가 달달한 이야기가 진행될거라 보일텐데, 선생인 경훈의 차가운 철벽 방어로인해 영화는 아름답고 탁트인 여름 한강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시종 갑갑하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갑니다. 누구나 익숙하듯이 스승과 제자간의 로맨스는 시한폭탄이고 더불어 클로짓게이인 경훈의 경우엔 이런 관계는 더 큰 공포일테죠.
촬영당시 스물여덟살이었던 한주완의 십대 연기는 훌륭합니다. 과장되게 매력발산해가며 꼬셔대는 것도 아니고 풋풋한 척을 하지도 않지만 기대와 좌절감을 오가는 상우의 표정은 질풍노도 그 자체고 정말 보기 귀여워요. 반대로 이 영화속에서 진짜 갈등의 주인공이어야할 경훈은 너무 갖혀있습니다. 갖혀있는거야 말그대로 맞는 상황이긴 한데, 그래도 감정이나 분위기에 있어서 배우 김영재가 지나치게 깔끔한 것 같아요. 더 불안하고 더 흔들렸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운데 관심 갖고 볼수록 한계도 보이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는자가 구하라'에서 정치인 풍자도 그렇고, '또 하나의 약속'에 기꺼이 악역으로 출연해준 것도 그렇고(거기서도 심하게 평면적인 연기를해요.ㅜㅜ) 뭔가 의식있는 분 같던데 좋은 작품 만나서 확 떴으면 좋겠습니다. 경훈의 차 뒤에 붙은 '세시간째 직진 중'이라는 스티커는 영어로 번역했을때의 중의적인 의미로 뭔가 상징을 담은 것 같아서 귀엽습니다. 근데 여름방학의 이미지를 나타내면서 학부모 설문조사의 설정을 재료로이용하기엔 좀 어색한 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배경음악이 참 좋아요. 뭔가 심란하게 들리는 노래 전주만 계속 나오다 두어번 뚝뚝 끊기더니 막판에 노랫말이 탁 흘러나올때 뭔가 뭉클함이 있어요.
[남쪽으로 간다]
두번째 단편은 복무시절 썸을 타다가 제대후 마음이 변한 선임에게 무시무시한 테러를 가하는 말년병장의 이야기입니다. 남쪽으로 놀러가자는 주인공의 헛된 약속을 담은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역시 영어 번역 제목으로 봤을때 중의적이죠. 남쪽으로 자동차 방향을 트는 순간 이둘의 상황은 표현 그대로 아랫길로 치닫습니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 둘이 나와서 맘에 들었는데, 이 작품의 주연은 모르는 배우들이지만 이 둘도 굉장히 좋은 캐스팅 같습니다. 제대후 연락을 끊은 선임 역할의 전신환은 정말 차갑고 현실주의자적인 모습이고, 영화 도입부에서 선임으로서 역학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기세가 정말 리얼해요. 무서운 싸이코 김기태 병장 역의 김재흥은 세작품의 주연 여섯명중 제일 순둥이 같은 외모를 해서 더 묘하게 어울립니다. 희고 긴 목을 뻗으며 먼 곳을 응시할때 정말 예쁘더군요.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익숙할 군부대 주변 마을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낯선 이국의 여름숲같은 배경으로 전환되는 과정도 매우 아름답고요. 세상에서 둘이서만 떨어져 모든 걸 벗고 진실만을 말해주길 바라는 기태의 모습이 포스터에서 나타나는것 같아요. 뽕짝과 트랜스 음악이 묘하게 섞인 엔딩음악도 좋았습니다.
기태의 행동은 극단적이지만 '나를 진짜로 어떻게 생각해'라는 소모적인 질문을 계속 들이대는 찌질한 정서가 저는 솔직히 공감갑니다.
[백야]
세번째 영화를 보면서 이 삼부작의 몇가지 공통점을 더 발견하게 됩니다. 세 영화 모두 우리나라의 현실의 끈에 묶여있는 게이들이 우리나라 같지 않은 우리나라 배경들 속에서 떠돌아요. 듀나님의 평처럼 '백야'속 새벽의 서울은 매우 낯익은 공간이면서도, 쓸쓸하게 뚝 떨어져나간 또 다른 세계처럼 그려집니다. 혐오 범죄의 기억으로 인해 복수심에 가득찬 원규와 밝고 건강하지만 은근 맘약한 구석이 있는 퀵서비스 기사 태준의 이야기입니다. 둘 사이에선 아까보다 좀 더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75분짜리 영화에요.
이것도 역시 배경음악이 좋습니다.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이 쓰였고 저 사진 속 장면에서는 게이 아티스트들의 뮤즈격인 크리스 가노의 "Love Zombie"가 쓰였습니다.
둘의 시너지가 참 좋지만 사실 각각의 캐릭터는 그닥 매력이 없어요. 원규는 지나치게 자기애/자기연민이 강하고 태준은 종종 뜸금없이 감상적이죠. 근데 원래 대부분의 게이들 감성이 약간 이래요. 굳이 몇몇 김조광수 영화처럼 정형화된 캐리커처를 눈앞에 흔들지 않아도 이런 섬세한 정서적 디테일들은 쉽게 공감이 갑니다.
전 일단 두 배우가 열한살 차이라는데서 놀랐고, 꽤 어린 나이에 자기 역할을 덤덤하게 잘 소화해낸 이이경이 최근 인기드라마로 주목받고 있는 걸보니 기분 좋습니다. 과장된 표정연기도 없고 동선이 많은 영화인걸 감안하면 모션도 굉장히 좋은데, 다만 대사 호흡이 좀 둘쑥날쑥했던 것 같아요. 페이스가 느린 아트하우스풍 영화가 원래 대사 따라잡기 좀 힘들긴 하지만요. 차기작은 김기덕 감독 작품이라는데 왠지 어울릴 것 같아요.
'퀴어영화'의 한계를 넘어 여러 장르에 대입하고 싶다던 이송희일 감독의 인터뷰를 봤는데 미쟝센을 강조한 앞의 두편의 단편을 시도한게 참 맘에 듭니다. 이제훈, (카메오였지만)유연석에 이어 퀴어영화에 나왔던 배우들이 하나둘씩 꾸준히 잘나가는걸 보니 기분 좋기도 하고요.
세 영화 다 한번 이상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을 쫌 세게 던지는데, 실제 상황이었다면 데이트 초기의 웬만한 게이커플들은 다 쫑나지 않을까 싶어요.
[아 근데 갑자기 글씨가 작아지는 현상이 생기면 원래대로 어떻게 수정하나요?]
저도 앞의 두 편 밖에 못봤네요. 백야도 언제가 볼 기회가 있겠죠. 영화를 참 섬세하게 보시는 분 같습니다. 자주 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1. 지난여름 갚자기. 누가봐도 상우는 협박할 마음이 없어보인다는건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실까 해요. 상우는 이미 협박을 하고 있고, 그 협박을 실재로 질러버릴 생각까지는 없어보일수는 있겠네요. 전 제가 선생님 입장이었다면 상우를 죽여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것 같아요. 자기가 너무 사랑하기때문에 하는 협박도 협박이고.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죽여도 살인이죠. 치정살인이니 더러운 치정극이니 관련단어도 있잖아요. 사랑의 매같은단어도 떠오르고 그러네요. 상대방을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거나 내 감정나오는대로 질러도 된다면, 강간이 범죄가 아니겠죠.
3. 백야. 전 지난여름 갚자기랑 백야만 봤는데. 백야는 상대적으로 대본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달까, 같은 감독이 나중에 찍었다는걸 믿기 어렵더군요. 실재 폭행사건의 피해자에게 감독이 욱해서 감정이입을 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의 섹스신에서 왜 화장실에 껌을 붙이는지 궁금했는데, gv에서도 똑바로 이야기를 안하고 돌리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