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쓰는 자들의 아쌀함-유니버설 발레단 30주년 갈라 공연 'Thank you' 후기

   발레는 작년 봄에 국립발레단의 ' 라바야데르' 가 마지막이었고 연말에 국립오페라단의 '라보엠' 을 관람한 것이 그나마 최근에 본 편에 속하니 고양이 보는 낙 말고는 없는 사람에게 눈호강의 주기가 절실히 돌아온 이즈음 UBC 30주년 갈라 공연 정보는 일찌감치 입수했으나 어찌어찌 일상에 밀려나니 원하는 좌석은 손에 넣을 수가 없어 포기했었지요. 때마침 좋은 좌석을 착한 가격에 올리신 듀게의 모님이 계셔서 접선. 2월 21일 금요일 저녁 첫공연으로 다녀왔습니다. 좌석은 아주 좋았어요. 센터가 아닌 게 아니라 센터보다 더 좋은 위치라 시야 확보 및 무용수들의 거리감도 과하지 않은.

 

   사실, 요즘엔 성인발레다 취미발레다 뭐다 해서 발레 대중화가 된 지도 오래되고 직접 레슨받는 분들도 많고 공연마다 찾아다니는 분들도 많지만, 저는 아주 오래전이나마 발레를 해봤었고 그후로도 아주 오랜 세월 발레애호가로 지내왔어요. 이렇게 쓰니 제가 애호가 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것도 같은데, 사실이 그래요. 늦은 밤 집에서 쏘맥을 말며, 지긋지긋한 공적인 관계의 사람들을 하루 종일 보던 눈을 씻어내려면 발레공연은 필수죠. 그냥 아름다움을 보는 것으로 금쪽같이 귀한 잠 잘 시간을 깍아먹는 줄도 모르고. 여하튼, 그런데 학원 찾아 다니면서 이걸 다시 하고 싶지는 않은...

 

   공연 후기부터 먼저 쓰자면, 사실 저에게 이 공연이 아주 좋았다 라고는 말씀드릴 수는 없겠네요. 그런데 이것은 순전히 저의 감상평입니다.

공연은 어떤 면에선 사실 아주 좋았기도 했어요. 다만, 제게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은 국립과 비교했을 때 지금 현재 UBC에 이렇다 할 간판 무용수가 너무 부재하다는 것과, 무용수들의 기량이 평균 이상의 획일성이 없다는 느낌. 무엇보다 체격조건이 균일하지 않음에서 오는 약간의 거슬림, 같은 건 제가 까다로운 관객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어요. 무엇보다 공연의 성격이 전막이 아닌 갈라 공연이다보니,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선 매력적이긴 한데 산만하다는 느낌도 들었고, 자칫 학예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막과 막 사이의 어색함이라고 해야할까요.

 

   1막 첫 작품이었던 라바야데르 망령들의 왕국 중 아라베스크는, 작년 국립은 별다른 무대미술 없이 그냥 내려오는 단조로운 무대장치였는데, UBC는 무대미술과 희부윰한 조명 그리고 심지어 오케스트라 피트 앞에 아주 촘촘한 미세막을 더 쳐서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효과를 내더군요. 국립이야 작년이 초연이었지만 UBC는 고정 레퍼토리로 몇 년 동안 해왔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점에선 더 좋았습니다. 다만, 소문난 칼군무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아라베스크의 각도나 들쑥날숙한 발레리나들의 신장이 아쉬웠습니다. (이게 왜 그런 것일까 하는 얘기는 좀 있다 따로 쓸게요).이날 공연에서 저는 박세은씨와 같이 나간 로잔에서 3등한 김채리씨의 춤을 처음 봤는데, 무용수에 대한 큰 기대없이 본 것이 조금 미안할 만큼 깔끔하게 잘 추더군요. 로잔 당시의 사진을 보면 박세은씨가 너무 마르고 가벼워서 김채리씨는 상대적으로 좀 통통해 보였는데 무대 위에선 길고 가녀리더군요. 다만 아직은 이 춤, 저 많이 춰보지 않아서 일단은 클래식 발레의 공주역할 밖엔 소화가 안 될 거라는 느낌도 들고. 하지만 아직 어리니까요. 얼마 전 수석 된 이동탁씨는 과연 우락부락한 인상이 너무 강해서 클래식보다는 모던 발레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두 번째 작품은 김나은씨의 로즈 아다지오 였습니다. 음... 저는 왜 이 작품을 이 분에게 할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실은 오로라를 제법 추던 심현희씨의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해당되는 날짜가 김나은씨 공연이라... 잠미녀는 분홍색 튀튀입고 장미처럼 추는 게 다인 것 같지만 발레리나들 사이에서 엄청난 체력 소모와 고도의 정석 발레 테크닉, 어마무지한 발란스로 악명 높은 작품인데, 아니나다를까 저는 김나은씨의 춤에서 정말 미스캐스팅된 배우를 보는 것처럼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어요, 업하고 팔 1번 동작한 채 4명의 왕자와 돌아가며 손을 잡는 동작에서 부들부들 떠는데 제가 불안해지더라구요. 무엇보다 이 작품을 하기엔 신체적인 부분이나 타고난 공주스러움이 많이 부족해서 진짜 예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그냥 무난하고 실수없이 췄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은 춤이었습니다.

 

   이후 강미선씨와 콘스탄틴의 돈키호테의 결혼식 파드되, 이 작품은 당연히 웬만큼 잘 추는 무용수를 올리는 거니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대감이 이미 있는 상태였는데, 강미선씨의 짱짱하고 에너제틱한 매력이 묻어나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훼떼도 중심축이 많이 흔들리지 않고 처음의 바운더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잘 돌고(저는 발레리나들 훼떼 돌 때 시작점이 여긴데, 끝점이 저 멀리에 가 있으면 그냥 아웃으로 치기 때문에ㅎ). 연말 호두까기에서 강미선씨에게 공개 프로포즈 했다는 콘스탄틴의 춤도 그냥 예쁘더라구요^^. 두 분 결혼식때 이벤트로 이 작품 변형해서 해도 재미있을 듯.

 

   오네긴의 황혜민, 엄재용 커플의 춤은 연륜이 묻어나는 드라마 발레가 주어진 것 같은데(2막에서도 춘향 재회 침실 파드되 역시) 황혜민 발레리나는 얼마나 몸이 작고 키도 작은데,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으면 그 작은 키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정말 잘 추고 표현력이 좋아요. 몸도 작아서 그런지 너무 가볍고 이제 남편이 된 엄재용씨가 리프트 하기 얼마나 편할까 싶은 생각도 들고 ㅎ. 그녀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클래식발레의 공주 역할도 잘 어울렸는데 정석적인 발레작품도 잘 하지만 연기력이 된다는 걸 '심청' 보고 느꼈거든요.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역시나 화려한 클래식 발레에 묻혀서 박수갈채가 잦아든 것이 조금 미안하여 제가 열심히 쳐줬습니다.

 

   다음이 해적의 파드트루아였고, 이용정씨가 메도라로 나오더군요, 몇 년전 어느 국제콩쿨에서 돈키호테 결혼식 파드되로 3등 했을때부터 직접 봤었지만 예뻐요.

키가 생각 만큼 크지는 않지만 라인도 좋고 발레리나로서의 느낌이 좋은. 그런데 어딘가 살짝 경직되어 있는 것처럼 춤이 유연하지는 않은 듯 해서, 아마 첫날

첫공연이라 그런가보다 생각하기로. 이분도 UBC의 주역이 곧 되겠죠. 그리고 저는 이 날 공연에서 진짜 왕자님을 봤습니다. 이건 발레리나의 미모를 압도하는

조각 미청년의 현현이었죠. 바로 강민우 씨 입니다. 알리 역으로 나왔는데, 콘라드 역을 맡은 이동탁씨와 너무 대조가 되어 저 혼자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발레리노들의 역할을 바꾼다면 이동탁씨가 알리를 해도 어울릴 것이지만, 강민우씨는 익살스러운 콘라드 역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하긴 이 분도

몇 년전 콩쿨에서 남자들이 대부분 선택하는 해적이나, 다이애나와 악테온, 또는 돈키호테의 바질이 아닌 고전 중의 고전인 백조의 호수에서 왕자님을 했었죠. 

다른 남자무용수들은 몸자랑 하느라 어떻게든 맨살을 드러내는데 강민우씨는 역으로 검은 벨벳 자벳과 흰색 타이즈를 입었었는데 말 그대로 귀족적인 수려한

용모이긴 했었죠.

 

   1막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조금 생소한 '베니스 카니발' 이 올랐습니다. 그닥 눈여겨 보지 않았던 UBC의 신예 홍향기씨가 주역이더군요. 그냥 어린 무용수 답게

예쁘게 잘 춰요. 한예종의 고만고만하게 잘 추는 사람 중 하나로만 기억했는데 무대에 올라가니 무대빨을 확 받는 느낌이랄까. 타고난 무용수처럼 한눈에 사로잡는 매력은 아니지만, 노력으로 극복할 듯.

 

   이렇게 1막 끝나고 20분 휴식후 다시 시작된 2막은 1막과는 상반된 모던발레 일색. 물론 2막 첫공연은 창작발레 춘향의 옴니버스 공연이긴 했죠. 이중에서

황혜민 엄재용 커플의 농익은 해우씬, 침실 파드되는 정말 유려하더라구요. 황발레리나는 이날 공연에서 튀튀를 한 번도 입지 않고 길게 내려오는 다소

초라한(?) 의상들이었는데, 몸에 착착 감기는 춤을 춰요.

 

   남성 3인무 두엔데는 저에겐 큰 감흥은 없이 지나가고, 역시 다음 작품인 인더미들에서 강미선 발레리나의 파워와 탄력은 예상했던 바로 그것이더군요.

 

   그리고 ABT수석 서희씨. 원래 공연은 서희씨와 남성 무용수의 로미와와 줄리엣 발코니 파드되였다는데, 남성무용수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독무를 추게 되었다고 해요. 서희와 서희씨의 춤을 처음 본 제 소감은... 춤추는 사람 그렇게 많아도 그 중 빼어난 얼굴와 체형을 가진 천상 발레리나구나 싶은 생각. 다만, 파트너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독무로 돌린 탓인지 작품도 그렇고 서희씨도 조금은 다운된 듯한 느낌이어서, 관객 호응도도 유명세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클래식 추는 모습을 못봐서 그런 지는 몰라도, 춤 자체를 아주 감칠맛 나게 잘 춘다는 느낌은 못 받았어요. ABT 수석인데 저 정도는 당연히 기본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 자체가 너무 정적이어서 그럴 수도.


   그리고 빨간 타이즈를 입고 솔로로 나와 솔로를 춘 이고르 콜브의 존재감은 과연 무대 전체를 꼭 채우는 섹시함과 동력이 있더군요. 혼자 나와서 추는 춤인데도 전혀 그 무대가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대담하고 동시에 유연하고, 호응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순서대로 쓰느라 이 긴 글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 되는 슈트트가르트 수석인 강효정씨의 춤. 작년에 열린 발레 엑스포에서도 췄다는 팡파르LX는 음악부터 그리고 남자파트너와 짝을 이룬 빨간 타이즈까지 강렬했어요. 사실 저는 강효정씨가 클래식 발레를 하기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얼굴 느낌이라고 생각해서 롬앤줄의 발코니 추고 바로 수석 발표 받았다는 게 조금 의아했는데 이날 그 선입견을 완전히 깼어요. 작품은 모던발레였지만 춤 자체가 이날 본 공연 중 가장 매력있고 탄력적이고 유연하여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흡인력이 대단하고 표현력과 공연에서의 색기가 너무 출중하여 아 이래서 수석됐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습니다. 슈트트가르트 대선배인 강수진씨 만큼의 화려함은 없지만 클래식 발레에도 나름 어울릴 것 같은.

 

   마지막으로 UBC에서 야심하게 준비한 작품이자 관객동원 커튼콜 작품인 마이너스7은 예전에도 몇 번 얘기는 들었지만 참신했어요. 점잖고 우아해서 지루하기만 한 클래식 발레라는 통념을 깨기에 충분한. 첫날 첫공연이라 관객들이 과연 신나게 호응해 줄까 싶었는데, 우리들 지친 마음 속에도 다들 열정과 광기는 있어 이런 흥을 내는구나 싶어 아낌없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여기서부터는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조금 조심스러운 얘기인데(듀게에도 혹시 무용계에 종사하시는 분 계실지;;), 어떤 단체든 흥하고 쇠하고의 주기기 분명히 있는데 제가 UBC의 전성기라고 느낀 것은 아마도 2004~2008년 정도였던 것 같아요. 일단 당시 장신 발레리나로 유명한 이상은 씨를 비롯한 재능 넘치는 신예 무용수도 여럿 있었고, 임혜경씨, 강예나씨, 손유희씨 안지은씨,이현준씨 등 주역으로 춤추던 다양한 중견 무용수들이 꽤 많았죠. 동계, 하계 발레학교 운영 등 여러모로 재미있는 기획으로 홍보도 꽤 하고 있었고요. 상대적으로 국립발레단은 이전까지의 명성이 무색할 만큼 김지영씨의 네덜란드 진출, 김용걸씨의 파리 진출, 이원국씨의 퇴단, 무엇보다 최태지 단장님의 부재로 김지영, 김주원 두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 내던 발레에 대한 대중들의 흥미와 쟁쟁함을 잃었었던 것 같구요. 그런데 어느새 최 단장님이 다시 돌아오고 나서 국립의 중흥이 시작되고 이때부터 유니버설 무용수들이 슬슬 국립으로 갈아타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유난희씨를 비롯한 발레리나부터 이후 UBC 들어갔던 무용수들이 몇 년 사이 상당수 국립으로 옮겨가버리는 듯한. 그래서 작년에 봤던 국립의 라바야데르는 실력이나 체격면에서 빼어난 균일한 무용수들로 채워지고 지금은 오히려 자체 경쟁이 너무 치열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뛰어난 무용수들이 많죠...


   반면 UBC의 외국무용수들은 나름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영입한 국제단체의 성격도 있겠지만, 사실은 쓸만한 한국무용수들이 국립으로 상당수 빠져나간 뒤를

보충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상은씨나 한서혜씨 같은 미래가 촉망되는 무용수들이 또한 대거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거니와 최근에는 댄싱나인에 출연하여 스타가 된 김명규씨도 퇴단했죠... 물론 민간발레단이 가진 자본(은 오히려 국립보다 나을 수도 있을지?)이나 맨파워가 국립보다는 약할 수도 있고 또 얼마 전에 은퇴한 최태지 단장의 어마어마한 노력과 공력으로 일궈낸 국립의 발전이 후원도 많이 이끌어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상대적으로 UBC의 고군분투가 외로운 항로인 것도 같지만 어쨌든 이번 30주년을 갈라쇼는 이런저런 것들 떠나 말 그대로 땡큐 라는 의미에 걸맞는 공연이었습니다.

    • 상세한 감상 잘 읽었습니다. 전 주말에 서울 다녀왔는데 일정이랑 동선 맞는 공연을 찾다보니 난생 처음 보는 발레 공연으로 이걸 봤거든요. 발레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 급하게 살림지식총서의 발레편 하나 빌려읽고 봤는데 생초보라 그런지 확실히 1부보다 2부가 재밌었어요.
      • 생애 첫공연으로 본 발레공연이 이 공연이었다면 나름 운좋은 타이밍에 잘 보신 게 아닐까 해요. ^^ 잊어버리기 전에 되는대로 급하게 썼더니 오탈자는 왜 이리 많고 장황하기는 왜 이리 장황한 지, 줄이려고 해도 어디를 줄여야 할 지 모르는, 멋진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중구난방의 그냥 후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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