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사랑한 얼굴 , 내가 살아간 표정
표정에 약합니다. 사람들의 표정에 약해요. 혐오. 분노. 슬픔. 외로움. 처연함. 고통. 환희. 사람의 표정에 담길 수 있는 무한가지의 표정에 관심이 많아요.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도 모르게 그 표정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극장을 나설 때, 극장 세면대에서 주인공과 닮아있는 표정을 나에게서 발견할 때 그 영화는 저에게 좋은 영화로 기억됩니다. 어쩌면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사실 영상이나 서사가 아니라 그 영화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 때문 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아니요.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영화의 '표정'만이 영화를 사랑한 유일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만큼 가까이 내밀하고 은밀하게 타인의 표정을 훔쳐볼 수 있는 매체는 없으니까요.
작년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일대종사 그리고 쇼를 사랑한 남자 였어요.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다. 좋은 영화였다. 를 직관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자신이 없어요. 어쩌면 이 영화들은 사실 좋은 영화라고 자신하지도 못해요. 왜냐하면 제가 이 영화에 마음이 털린 것은 주인공들의 열연이나 연출의 섬세함이 아니라 배우들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에요. 일대종사. 사실 이 영화는 너무 거칠고 너무 많은 이야기가 빠져있는 듯해요. 불친절하다는 인상까지 줄 정도로. 아마도 편집의 문제겠죠. 하지만 저는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난 뒤에도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어요. 장쯔이의 표정이 너무나 선연하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제가 말하는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 기억하실겁니다. 그 것은 사실 어떤 문장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오직 영화만이 잡아낼 수 있는 처연함이 있어요. 그 처연한 표정 만으로 티켓의 값이나 영화의 완성도는 무의미해지는,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쇼를 사랑한 남자. 저에게 이 영화가 너무나 '개인적인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아마 몇몇 분들은 아직 기억하실 겁니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에 대해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에요. 마이클 더글라스의 열연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도 아니구요. 정말 사랑하는 배우가 출연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혼자 극장에 앉아 자신이 사랑했던 한 사람의 마지막 무대를 상상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저는 그 표정을 마주했던 지난 여름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영화 속 그의 모습처럼, 그의 마지막 연기를 나 홀로 극장에 앉아 지켜보는 상상을 했어요.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가지는 한 사람의 모습을 어두운 심야극장의 객석에 혼자 남아 지켜본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저의 유일한 시네마 천국 입니다. 그 천국을 상상 하는 것 만으로도 영화는 현실로부터 달아나는 도피처가 아니라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로 느껴집니다. 그 표정만이 내가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이었어요. 평생.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저는 이렇게 가슴에 남았던 사람들의 표정을 모두 떠올릴 수 있어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표정. 나를 상처주었던 표정과 나를 괴롭혔던 표정. 나를 환희에 들뜨게 한 표정과 나를 침울하게 만들었던 표정. 그 한장 한장을 오려서 종이에 붙이면 아주 두꺼운 사전이 될겁니다. 어느 주말 혼자 침대에 누워 한없이 그 지나간 표정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 하나 하나를 지나서 나는 여기 까지 왔구나. 그 장면이 내가 봤던 거울이었구나 하면서 제 스스로 짓고 있는 표정을 상상해봐요. 사람은 안타깝게도 평생을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신경쓰며 살아도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그 순간을 통과했는지 알지 못하잖아요. 우리가 유일하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은 거울을 보거나 셀카를 찍을 때가 아니라 타인의 표정을 볼 때라는 사실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습니다.
세상을 떠난 필립의 영화 중에서 저는 '매그놀리아'를 가장 좋아합니다. 사실 이 영화가 다우트나 카포티 처럼 '필립'만의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처음 그가 어떤 사람이구나. 어떤 배우구나 라고 알았어요. (물론 필립 뿐만이 아니라 그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배우의 표정을 그 때 깨달았어요.) 필립은 이 영화에서 노쇠한 사람을 간호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없이 자상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병자의 주름진 얼굴을 내려볼 때, 저는 영화를 멈추고 브라운관에 손을 가져갔어요. 그때 이 사람이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는 나이들었고 연륜이 넘치고 앳된 기운은 사라진 표정으로 영화를 찍어왔죠.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최근에 보았던 마스터나, 그의 대표작으로 생각하는 시네도키 뉴욕이 아니라, 제가 그를 처음 보았던 때의 표정을 떠올렸어요. 그 자상하고 따뜻했던 앳된 배우의 표정을요. 그 표정을 사랑했어요. 영화를 보는 동안 제가 살았던 표정이었어요.
이제는 더이상 새로운 그의 얼굴을 보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픈 밤입니다.
헉. 정말이군요. 정말이야...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추모특집이라며 영화를 틀어주길래..헉했는데.. 이 배우 좋아했어요. 젊지도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막 끌려!!!!......
뉴스 찾아봐야겠네요;;;;미션 임파서블의 악역마저도 멋졌고, 최근 마스터도 이분 때문에 보고 싶었어요(+감독), 킹메이커도 좋았고.. 명복을 빕니다.
글을 참 잘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