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왕국과 콘서트: 게시판이 돌아와서 쓰는 일상의 잡담

그 동안 정말 그리웠어요. 갑자기 사라진 뒤로 원인을 알기까지 초조했었지요. 저는 트위터도 최근에 다시 하느라 소식도 못 들었어요. 


먼저 겨울 왕국 이야기부터. 혹시 장녀 증후군이나 그 비슷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하고, 문제는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이러 저러한 일들은 반드시 꼭 계획대로 수행되어야 하고, 규칙을 잘 지켜야 하고, 등등의 생각을 가진 여성들이 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것이 장녀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하더군요. 제 직장에 저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분이 있어요. 평소 그 분의 일 처리가 매우 마음에 들고, 성격도 좋아서 우리는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 분은 장녀, 저도 장녀입니다. 제 친한 친구들이요? 대부분 장녀입니다. 장녀가 아닌 경우에도 실질적인 장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는 부모님께 기본적인 책임감을 갖고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지가 되려고 노력하죠. 직장에 문제가 생겼나요? 일단 나서서 해결 방법을 알아봅니다. 문제가 없을 땐 앞으로 할일과 이미 한 일을 살펴보죠. 혹시 잘 못 될 수도 있으니까요. 상사가 급한 업무를 던지나요? 후다닥 계획을 세우고 밤을 새워서라도 해냅니다.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머리를 막 굴리느라 진도가 느린 경우도 있고 간혹 생각에 파묻혀서 압도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책임감을 기반으로 업무를 수행하지요. 출근 시간이나 마감이요? 감기몸살로 걷다가 길에서 쓰러지거나 과로로 운전 중에 기절하더라도 지키려고 하지요. 가장 싫어하는 건 계획이 틀어지는 거에요. 


누가 알아주길 바라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인정에 대한 욕구보다, 우리를 움직이는 건 책임감이에요. 당연하게 일을 해내다가 가끔은 그래도 남들이 나 노력하고 있고, 수고하고 있다고 말 좀 해줬으면 할 때가 있어요. 너무 힘들 때가 있어요. 지금 부서에 세 명의 인력이 있다가, 둘이 기한이 차서 나가고, 저 혼자 지난 일 년간 대부분의 일을 하게 되었지요. 일이 구멍나거나 잘못될까봐 너무 부담이 되어서 늘 새벽에 서너 번씩 깨곤 했어요. 제 일 중 일부는 사람들에게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거에요. 일이 그런 방향으로 잘못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거에요. 그래도 직장에서는 무책임한 인간들에게 간혹 분노를 뿜을 망정, 업무에 필요한 싹싹함 모드를 늘 유지하면서 척척 일을 해내곤 했지요. 다행히 제 상사는 되는 만큼만 하자는 주의에다, 능력이 매우 뛰어난 분이라서 제가 늦은 퇴근을 하는 걸 적극 막았어요. 제 일도 많이 덜어갔구요. 인생은 즐기기 위해 있는 거고, 빡센 업무는 삶의 질을 하락시키는 거라면서. 그 분이 아니었음 저는 늘 새벽에 집에 가면서 지금의 두 세 배 되는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붓고 있었을 거에요.


그래서, 엘사가 let it go 를 부르는 걸 듣고 눈물이 날 뻔했어요. 늘 신경쓰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가 말해주었으면 했거든요. 저는 완벽한 인간이 아닌데 과한 책임감으로 늘 그렇게 되고 싶어했어요. That perfect girl is gone.


최근에 어떤 가수의 팬이 되었어요. 그래서 지난 주말에 콘서트도 다녀왔어요. 스탠딩 한 번, 좌석에서 한 번 봤는데 근 1년 가까이 운동을 열심히 한 덕인지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요. 저는 사실 이렇게 과한 감성과 스타일링은 취향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더라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예전에 디자이너들이 나와서 경쟁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어요. 모두 탈락하고 마지막 두 참가자가 파이널에 올라갔지요. 한 명은 유학파 출신에 예선에서부터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의 첫 번째 스테이지만 봐도 감각이 대단했고, 각 옷의 완성도와 쇼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모두 극도로 정제되어 있었어요. 반면 다른 참가자의 첫 스테이지는 학생 발표회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보였어요, 적어도 제 눈에는요.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발전했고, 마지막에는 본인의 취향을 적절히 반영하면서도 상당히 다듬어진 룩을 선보였어요. 승자는 두 번째 디자이너였지요. 저는 첫 번째를 더 좋아했지만 두 번째를 뽑은 심사위원들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 가수를 보는 제 마음도 그 비슷한 거에요.  또 한편으론 이 가수에게 제 책임감 부분이 투사되어서 더 안쓰럽기도 해요. 


집에선 그냥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내일은 부모님 집에 갑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장녀로서 공감이 갑니다. (일정부분. 저는 marc님처럼 성실한 사람은 아닙니다) 


      계획을 지키고 계획대로 이루어질 때 안심이 된다는 점이 특히 공감백배. 


      안정이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 저도 늘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계획이 틀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전전긍긍해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별들도 때로는 폭발하지 않는가, 라는 구절을 보고 부릎을 쳤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가슴은 여전히 안정을 바라더군요. 

      • 늦은 덧글이라 못 보실 수 있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별들도 때로는 폭발하지 않는가' 이 구절의 출처는 어디일까 궁금합니다. 

        •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할아버지의 축복' 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지금 찾아보지 정확한 표현은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네, 다만 모험이 있을 뿐이지. 별들도 때로는 폭발하지 않는가!


          로베르토 아사지올리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군요.




          이 구절이 나온 장 전체가 참 인상깊어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두려워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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