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수필의 경계?/정글만리
작년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으며 약간 당혹스러웠습니다.
주인공 전대광의 입을 빌어 몇 페이지씩 계속되는 중국사회에 대한 서술을 읽다보면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소설에 나오는 작중인물들 대화의 상당부분이 극중 사건의 전개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냥 중국사회에 관한 이모저모를 작가가 이 인물 저 인물의 입을 빌어 그때그때 풀어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각자 개성을 가진 인물들의 대화라기보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인물을 목각인형 삼아 복화술로
직접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
그러다보니 학생때 '태백산맥'을 읽었을 때 같은 문학적 감동은 없었어요.
스토리 부분도 어떻게 보면 기업극화 류의 통속소설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실망이었는데,
다 읽고나니 이러면 또 어떠랴 싶기도 합니다.
노대가가 요즘 필 꽂혀계신(?) 중국에 대한 공부의 결과물로 독자들에게 시원하게 한번 썰풀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한 구성일 것이고,
독자들은 교양서보다 훨씬 재미있게 나름 유익한 정보들도 습득하면서 책을 읽었을 것이니까요.
문학적 성취에 대한 강박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도의 작가니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죠.
원래 작가들이란 중증의 수다쟁이들이잖아요.
빅톨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끝도 없이 곁다리로 빠져서 이어지는 줄거리와 상관 없는 온갖 것들에 대한
박물기적인 묘사에 지칠 때마다 느꼈던 것처럼.
그래도 작중 인물의 대화가 전혀 실제 인물들의 대화 같지 않을 때 불편하긴 합니다.
이런 방면의 상습범(?)인 작가 하루키의 '1Q84'의 예를 들자면
거친 밑바닥 인생을 거쳐온 특수부대 출신 보디가드 다마루가 도피생활을 해야하는
킬러 아오마메에게, 혼자 오래 시간을 보내야하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도 읽으면 어때?
하고 권하는 장면 같은 경우죠.
보디가드 직업군의 문학적 소양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프루스트를 권하고, 안톤 체홉을 인용하며, 샌드위치를 솜씨 있게 만들어주는 다마루는
자위대 특수부대 출신 대머리 게이인 프로 보디가드라는 느낌보다
그건 다 코스프레고 뭐 그냥 하루키 본인의 분신일 뿐인 것 같더군요.
그래서 다마루와 아오마메의 대화 장면마다 극중 상황에 몰입할 수는 없었어요.
그렇긴 한데, 그 현실감 없는 대화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참 좋더라고요.
천편일률적인 정치 얘기 연예인 얘기 입시 교육 얘기 등에서 벗어나
누구나 다 이렇게 지적이고 섬세하게 대화하는 평행우주로 소풍갔다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말이죠.
소설에서 핍진성을 일부 포기하고
대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 또는 전달하고 싶은 분위기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도 어떠랴 싶어요.
소설과 수필의 경계를 허무는,
그냥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소설도
그걸 잘 하기만 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다만, 정말 잘 하는 작가의 경우만 용서되지
안 그러면 '일기는 일기장에' 소리만 나오겠지요...
문화란 언제나 경계가 해체되고 새로이 조립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체계의 해체와 메타적인 시도들을 좋아해요. 소설중엔 일단 생각나는 게 <플로베르의 앵무새>같은 게 그랬죠. 읽다보면 소설인지 전기문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요. 또한 영화에서도 이런 해체와 재조립은 자주 일어나고 있죠. 예를들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초반 20여 분간 정말 엄청난 스팩타클을 보여주잖아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앵글들과 사지가 짤리고 피와 내장이 쏟아지는 사실상 '전쟁 포르노'에 가까운 장면들은 그 전까지 전쟁 영화들이 가졌던 표현체계를 완전히 해체했죠. 결국 인간의 문화가 발전하는 양식은 언제나 그 전까지 축적된 것들을 뛰어 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비록 또 다른 체계로의 진입일지언정.
공감합니다. 다만 '정글만리'나 '1Q84'에서 제가 든 예들은 경계의 해체 수준의 야심까지는 없는 나름 소박한(?) 작가적 자유 정도로 느껴져요. 그래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강하게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한국드라마에서도 기존 관습을 해체하는, 그러면서도 의욕과잉은 아니고 반 보 정도만 앞서 가는 작품을 만나서 미드 중독증에서 벗어날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저도 전에 많이 따졌었는데,저사람이 저런말을 할수 있을까 하고요.
이젠 할수 있겠지 생각합니다.
드라마에는 김수현 작가가 있죠.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기자신이죠. 최악은 임성한...이런거 보면 작가의 자유 이런 생각 안들죠.
원래 여담은 평판이 좋지 않죠. 수사학 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비난을 받아왔으니. '호밀밭의 파수꾼'을 보면 영어시간에 연설인지 발표를 하다가 학생이 다른 얘기로 빠지면 모두들 '여담(digression)이야!'하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18-19세기까지 서구에서 수사학이 글쓰기/말하기의 모델이었고 이게 많은 부분 공교육에 남아있었으니 당연한 일인 셈이죠.
하지만 억압의 역사가 길다는 건 인물의 입을 빌건 서술자(전지적 서술자이든 1인칭 서술자이든)가 직접 맡아 하건 스토리라인을 정지시키고 다른 얘기에 오래 빠져드는 전통 역시 유구하고 연설가나 글쟁이들의 고질적인 병폐라는 말도 되지요. 원래 하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플롯(곁줄거리)일 수도 있고 언급하신 예처럼 에세이나 사변적 성찰과 같은 지식담화나 진리담화일 수도 있고요. 16-18세기에 여담을 즐기는 소설가들이 워낙 많기는 했습니다만('트리스트럼 섄디', '톰 존스', '운명론자 자크' 등등) 그전에도 그후에도 예는 무수히 많고요. 말씀하신 '레미제라블'도 있고 (바리케이트에서 비장한 사건이 벌어지려 하는데 이야기를 멈추고 파리의 하수도에 관해 수십쪽에 관해 통계수치를 들이대며 설명문을 내놓는다든지) 발자크도 있고 톨스토이도 있고 모비딕도 있고 프루스트나 무질이나 헨리밀러나 박상륭도 있지요(박상륭의 근작 제목이 무려 '잡설품'이죠!). 무슨 대단한 실험적 작품이 아니라 일반적인 소설사의 고전들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그렇다는 거죠.
어쨌든 거부감이 드는 건 자연스럽죠. 롤랑 바르트가 그랬잖아요. "묘사, 설명, 성찰, 대화를 건너뛴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누가 '전쟁과 평화'나 프루스트를 한자한자 읽었단 말인가?"
하지만 거꾸로 단편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부차적', '잉여적', '필연성 없는' 단장들 없이 순전히 할 얘기만 하는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해야겠죠. 비록 일직선으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선조적 플롯이 오랫동안 서사물에서 지배적 모델이기는 했습니다만 실상은 스토리라인의 진행이라는 게 선로이탈과 플래쉬백과 플래쉬포워드와 갈림길과 삼천포로 빠지기와 주행정지가 없이는 되는 법이 없으니까요. 지나치면 지루할 수 있습니다만 역으로 그런 부분이 더 흥미로운 경우도 있죠(저는 '모비딕'의 플롯 파트보다 선박, 선원생활, 고래의 생태, 포경 등에 대한 저자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과시하는 설명문 파트가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플롯구성에 관한 선조성, 경제성, 일관성, 동질성, 핍진성 등의 이념은 문학사의 몇몇 특정 시기에 강조되었던 것일뿐이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모델(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모델에서 비롯된 모델)을 가장 완벽히 구현하는 작품은 상업적 대중소설이거든요. 그러니 속도감 있는 플롯진행의 이념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이런 게 오히려 '문학성'의 표식일 수도 있고요. 헐리웃 영화가 '속도감'과 '투명성'을 추구할 때 타르콥스키를 비롯한 유럽의 몇몇 감독들은 '느림'과 '물질성'을 탐구했던 것처럼요.
이상 오랫동안 듀게에서 digression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던 자의 잡설이었습니다.
잡설이라니요! 감동했습니다. 특히 "플롯구성에 관한 선조성, 경제성, 일관성, 동질성, 핍진성 등의 이념은 문학사의 몇몇 특정 시기에 강조되었던 것일뿐이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모델을 가장 완벽히 구현하는 작품은 상업적 대중소설이거든요. 그러니 속도감 있는 플롯진행의 이념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이런 게 오히려 '문학성'의 표식일 수도 있고요." 부분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고보니 정말 그렇군요. 책 읽으며 느꼈던 저의 막연한 의문에 대하여 이렇게 문학사를 관통하는 풍성한 가르침을 주시니 황송합니다. 문학 전공이신가요? 인문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정초에 들게 하시네요.^^
롤랑바르트의 말은 많은 위안이 되네요. 독서중에 "내가 방금 뭘 읽은거지? 읽기는 읽은건가?"하고 깜짝 놀라곤 할때가 있거든요.
저는 그런 잡설이 때로 발효의 시간을 주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혹은 진짜 하고픈 이야기를 하기 전에 독자를 준비시키는.
부끄럽지만 문학 전공자 맞습니다. 20년 공부하고 대학에서 초급불어나 가르치고 있지만 ㅠ.ㅠ (인문대가 교양 위주로 흘러가다 보니 예전 기준으로 3-4학년 때 듣던 고급과목이 자주 개설되지 못하는 학과가 적지 않지요. 저희 쪽이 좀 극단적이기는 한데 선배 강사 한 분은 불문학으로 박사를 받고 10년 동안 초급불어만 가르쳤다고 한탄하더군요)
아무튼 '핍진성'이라는 단어를 쓰시는 걸 보고 동년배인게 느껴져 반가웠습니다:-) 이게 Verisimilitude의 예전 번역어라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문과 출신이 아니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단어를 쓰시다니^^
그런 기능은 분명히 있지요.
수사학(설득의 기술, 말하기의 기술)의 창시자인 코락스는 연설(고대 그리스에서 연설-웅변은 주로 의회에서의 정치연설, 재판소에서의 변론, 추도사나 축사 같은 행사용 연설 등 세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었죠. 로마 시대 최강의 수사학자 키케로도 직업이 변호사였던지라 그의 변론문들이 책으로 잔뜩 남아있습니다)을 '프롤로그(청중의 관심을 유도하고 할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 '진술부'(사실관계 정리), '여담', '논증부'(참, 거짓, 옳고 그름을따져 밝히는 파트), '결론'의 다섯 파트로 구성할 것을 권했는데 '여담'은 심각한 얘기를 듣던 청중에게 잠시 정신적 휴식을 주는 동시에 교묘하게 자기 논지와 연결되는 내용을 담고 있덨다고 합니다. 물론 청중을 현혹하려는 여담이 남용되자 나중에 아레오파고스 재판소에서는 여담이 나오면 정리가 나서서 바로 중단시켰다고 합니다만.
소설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사변적 성찰로 시작하는데 이게 작품의 서사구조와 절대 무관치 않으니까요. 인물이 논설문에 가까운 내용을 말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서툰 수법으로 취급되지만 '이야기'이든 '논설'이든 액자구조는 호메로스 이래로 계속된 것이기도 하고요. ('오뒷세이아'에서 오뒷세우스는 한 섬의 왕궁에서 잠시 이야기꾼이 되어 트로이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를 수십쪽에 걸쳐 늘어놓습니다. 돈키호테는 문학비평가라도 된 것처럼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을 하기도 하고요. '트리스트럼 섄디'에는 혼전계약서가 통째로 삽입되어 있고 한국소설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면 역시 주인공이 쓴 학부졸업논문이 통째로 실려있죠.) 처음 볼 때는 이런 여담이 플롯에 아무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책을 다시 읽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기능이 보이게 마련이고요.
(댓글 낙장불입이라 슬픕니다 ㅠ.ㅠ) 인물의 입을 통한 사변적 담론의 끝판왕은 역시 '티보가 사람들'이겠네요. 일곱 권 중 한 권이 통째로 정치토론이니까(1차대전 직전 스위스에 망명해있는 각종 좌파 혁명가들이 주인공이죠). 프루스트의 책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20년 공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님의 댓글마다 느껴져서 감동중입니다. 저도 일단 문과 출신이기는 한데,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빵을 위한 학문'(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의 아버지인 형법학자 안셀름 포이에르바하의 말이죠) 전공자이고, 그나마 직업인으로 일하고 있을 뿐 님처럼 계속 공부의 길로 매진한 바도 못되니 제 분야도 님처럼 풍성하게 설명할 내공이 없어 부끄럽네요.
고맙습니다.
1.태백산맥에서도 말씀하시는 그런 잡설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김범우였던듯 한데, 이건 노골적으로 김범우의 입을 통해서 작가가 하고픈 말을 원없이 하는구나 싶더라구요.
2.언젠가 발자크를 예로 든 글을 읽었습니다. 발자크 본인은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그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서는 참으로 성실하고 진실되게 묘사했기에 본의 아니게 시대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고보니 태백산맥에서도 그런 부분이 꽤 있었네요. 김범우, 염상진(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독백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기억) 등 지식인 남주들의 입을 빌어 작가의 사색이 드러나지요. 그런데 여성은 겨우 '꼬막맛' 운운하는 욕망의 객체로나 등장하곤 할 뿐^^;; 작가의 분신으로서 발언할 기회가 없네요. 작가가 자신과 다른 성의 주인공에 온전히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여 다른 성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발언할 수 있게 하는 데 성공한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얼른 생각나지 않는군요.
사실은 (불경스러울 수도 있으나) 듀나 님의 소설에서 그런 점을 많이 느낍니다. 등장하는 캐릭터가 다 비슷하죠. 인물들의 대화를 읽다보면 말하는 순서를 홀짝홀짝으로 잘 맞춰주지 않으면 누가 말하는 건지 헷갈릴 때도 꽤 있습니다..
작가의 화법과 문체가 캐릭터의 개성을 압도하는 게 꼭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보전달에 효율적이더라구요. 설정과 진행이 중요한 장르에서는 오히려 미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