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용문방'

1980년 유가량 감독 작품.
대걸작 [소림삼십육방]의 속편입니다. 홍콩판도 한국판도 제목은 달라졌지만요. 한국판 제목은 [소림용문방], 중국어 원제는 [소림탑붕대사]입니다.
'탑붕'은 우리말로는 비계입니다. 건설현장에서 작업용으로 외부에 설치하는 임시발판이요. 현장에서는 보통 아시바라고 하죠. 공식명칭이 비계라는 걸 전 최근에야 알았어요. 현대에는 쇠파이프 같은 걸로 만들지만 홍콩에서는 여전히 대나무를 엮어서 만드는가 봐요. 예전 홍콩영화나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공사장 인근에 탑붕이 둘러쳐진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이 탑붕에 매달려서 액션을 펼치는 경우도 많았죠. 이 영화는 아예 그 탑붕을 메인 소재로 삼아버린 겁니다.

글고보면 그시기쯤에 유가량이 대나무에 꽃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오랑팔괘곤]이나 [벽력십걸(36방 3편)] [소림사3]에도 대나무를 이용한 액션이 나왔던 듯... 대나무가 강하면서도 탄력이 있어서 유연한 소재니까 무술영화에서 잘 활용하면 그럴싸한 그림이 나오죠.
제목만 달라진 게 아니라 내용도 확 바뀌었습니다. 전작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걸린 거창하고 무거운 주제였다면, 속편은 일단 스토리상 전작과 딱히 관련이 없고, 대단히 가벼워졌습니다.
전작이 유유덕이란 평범한 청년이 어쩌다 보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소림사의 고승 삼덕화상으로 성장하면서 36방의 주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면, 이번 이야기는 노사분쟁에 관한 겁니다. 아니 이것도 주제상으로는 가볍지 않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방식이 가볍습니다.
사장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거기 노측이 반발하자 사측은 용역깡패를 고용해 노동자를 탄압합니다. 여기서 노동자들이 내놓은 해법은, '소림36방의 무술을 배워서 우리가 깡패들을 때려주자!' 이게 이 영화의 스토리 전부예요. 그게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영화에선 그걸로 끝입니다. 뭐... 쿵후영화니까요. 어떻게든 36방을 등장시키고 싸움 장면을 넣을 구실만 제공해주면 스토리가 할 일은 끝나는 거죠. 글고 대놓고 코미디예요. 언어도 북경어로 제작된 전작과 달리 광동어입니다.(물론 북경어 더빙판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요)
어쨌든 그렇게해서, 36방과 삼덕화상이 다시 나오고 주연배우도 그대로 유가휘이지만 주인공은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유가휘는 삼덕화상을 사칭하는 사기꾼 역할을 합니다. 조연이 된 삼덕화상 역할은 당시에 소후와 함께 유가량 영화에서 무술지도를 했던 이경주에게 넘어갔습니다.(소후도 아주 싸굴틱한 틀니를 끼고는 코미디 조연으로 출연. 소후는 3편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되죠)
노동자들이 사장을 엿먹이기 위해 처음에는 사기꾼 주인걸을 이용합니다. 주인걸, 즉 유가휘를 삼덕화상인 걸로 꾸미고ㅎㅎ 마치 무술고수인 것처럼 쇼를 하는건데, 여기서 재미있는 게, 영화에서 배우가 무술고수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쓰는 트릭들이 그대로 나와요. CG가 없던 시절이니까 전부 로우테크의 수작업들이죠. 무술영화장르에 대한 셀프 패러디랄까...ㅎㅎ
당연히 이게 제대로 먹힐 일은 없고... 그래서 주인걸은 진짜 무술을 배우기 위해 36방으로 갑니다. 하지만 삼덕화상은 정체도 불분명하고 제대로 입문절차도 받지 않은 채 슬쩍 제자행세를 하고 있던 주인걸에게 무술을 가르쳐주지는 않고 허드렛일만 시킵니다. 그리고는 절 주변에 탑붕을 설치하는 일을 맡깁니다. 그렇게해서 3년간 36방에 꼽사리 껴서 지내는 동안 끝까지 정식으로 무술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하산하고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절정고수가 되어있더라는 겁니다. 그니까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을 영상화한 영화...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죠. 유가휘 본인이 말 안되는 소리라고 인증했다고 해요. 하지만 무협물에서는 그게 말이 되잖아요ㅎㅎ 당시 유행하던 성룡영화 아류작들에 이런 말도 안되는 수련으로 고수가 된다는 이야기가 흔했고 심지어 [베스트 키드]에서도 미야기 센세가 다니엘한테 허드렛일만 계속 시키지만 그게 알고보니 다 고수가 되는 과정이었더라는 식으로 영향을 끼쳤으니까...
탑붕 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담너머로 36방의 수련과정을 지켜보며 무술을 '눈으로' 배우는 와중에 주인걸은 그걸 탑붕을 엮는 과정과 섞어 탑붕쿵후를 만들어냅니다. 그니까 실은 주인공이 천재였던 거죠. 사실 말도 안되는 수련이 나오는 영화들 중 상당수가 따지고보면 주인공이 천재였던 경우라고 생각해요ㅎㅎ
그리고는 영화의 액션 하일라이트가 시작됩니다. 유가휘는 일단은 권영문, 장일도 같은 한국에서 출장나온 용병들을 처리한 다음에 사장인 왕룡위와 끝판왕전을 벌입니다. 여기서 왕룡위 일당은 유가휘의 탑붕쿵후에 맞서서 뜬금없이 의자를 무기로 들고 나옵니다. 앉는 의자요. 논리적 당위성이 1도 없지만, 그래도 의자를 접었다 펼쳤다 하면서 싸우는 상황이 재미있어요. 그럼 된 거죠ㅎㅎ
영화의 스토리가 주는 임팩트는 많이 약해졌지만 액션의 테크니컬한 측면에선 발전했습니다. 일단 70년대와 80년대의 차이가 있어요. 실제 연도상으로 전작과 겨우 2년 남짓밖에 차이 안나지만 그사이에 꽤 변화가 있었죠. 유가량의 무술연출 경향도 [36방] 때와는 달라졌습니다. 전작이 전통무술의 정확한 재현에 비중이 맞춰져 있었다면 속편은 발랄한 아이디어로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유행하게 된 시절에 나왔으니까요.(성룡의 영향력으로ㅎㅎ)
글구 끝판왕이 왕룡위라는 것도 전작보다 나아진 부분이죠. 전작의 끝판왕이었던 나열은 배우의 카리스마야 그렇다 쳐도 무술실력이 출중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무술실력으로는 왕우와 도긴개긴)
전작에 이어서 이번에도 괴상한 수련방들이 등장합니다. 전작과 안겹치게요. 애초에 30여개의 방을 두시간 이내 상영시간의 영화 한편에 다 보여주는게 무리다 보니 시리즈별로 나눠서 각각 다른 수련방들을 보여주는 구조가 되었는데 후속작들에 나오는 방들은 첫번째 영화에서의 임팩트에는 아무래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 영화는 홍콩에서는 대박이 난 모양이지만 한국에선 전작 흥행의 1/3토막이 났다고 하네요. 실패까진 아니더라도 성공이라 하기엔 아쉬운 모양새. 1편이 국내에서도 대박이 났다보니 2편은 아예 합작이라고 해서 한국판을 만들어 개봉시켰는데 진지하던 애국영화에서 가벼운 코미디로 바뀐 분위기 때문일지......
진짜 합작이 맞는건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kmdb 시놉시스를 보면 조선 유민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붙였는데 실제 영화 내용상으로는 한국이 참여할 여지도 없고, 야외 장면 몇군데가 한국 로케이션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게 꼭 한국이 아니면 찍을수 없는 그런 그림들도 아니고, 몇몇 조연(주로 악역)들이 한국배우라는 것 정도...
한국판에 참여한 영화사가 정창화 감독이 운영하던 곳이라고 하니, 원래 쇼부라다스 사람들과 인연이 깊은 분이니까 대략 촬영협조 정도 해주고 합작승인 받은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래도 한국 감독을 따로 내세우진 않고 한국판도 유가량 단독명의인 것 같네요.
어쨌든 국내 인지도는 1편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소림용문방]이라는 개봉제목보다도 [돌아온 36방]이란 제목으로 통하게 된 듯하고 딥디도 그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그런 형편이니 3편은 아예 수입되지도 않았고 국내에선 36방 시리즈가 2편까지 뿐인지 알고있죠. 심지어 박스셋도 2편까지만 넣어서 출시했고요.
셀레스철 복원판 DVD 기준으로 상영시간은 103분.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한국판 상영시간은 107분인데, 셀레스철판의 상영시간은 프레임 삭제로 인해 단축된 게 아닌가 싶기도.... (셀레스철판의 HD 버전은 프레임삭제로 DVD보다 더 짧은 것 같습니다)
뭐... kmdb에 소개된 한국판 줄거리는 홍콩판과는 완존히 딴소리를 하고있기 땜에 그와 관련해 추가분량이 있는 걸수도 있겠죠. 아님 뭐 kmdb에 써있는 줄거리와 실제 영화 내용이 딴판인 경우는 흔하니까요.
http://www.djuna.kr/xe/board/14197307
(프레임삭제 관련)
몇일전에 케이블에서 하던데 화면이 참 깨끗하더군요
컨셉이 재밌어 보입니다. 본격 비계 쿵푸 영화라니. ㅋㅋㅋ '계속 허드렛 일만 하다 보니 절정 고수가 되어 있었다'의 원조가 이 영화였던 건가요. 이 영화의 존재 조차 몰랐던 저 같은 사람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클리셰인데. 대부분 '베스트 키드' 아니면 '드래곤 볼'로 익숙했겠죠. 요즘엔 이런 클리셰 어디에서 보기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