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라이언 일병 구하기] 보고 왔습니다
한 늙은 백인 남성이 가족들과 함께 어떤 묘지에 갑니다. 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를 봤으니 이 묘비가 군인들의 묘비일거라는 건 추측가능합니다. 영화는 그의 눈동자를 깊게 클로즈업하고 이제 전쟁 한복판의 플래시백이 이어집니다.

제가 전쟁영화를 보면서 딱 한번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흐른 적이 있습니다.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였는데, 유대인들을 집 밖에 정렬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총으로 쏴서 죽여버리는 장면입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보면서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천지에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나, 하는 절망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그냥 슬퍼서 울었던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건 슬픔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오히려 공포라는 감각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이 노르망디 상륙 시퀀스를 보면서 그런 감정을 두번째로 느꼈습니다.
정말이지 참혹해서 말이 안나오더군요.
주인공들이 작전을 시작하면, 적군의 치열한 견제와 거기에 쓰러지는 아군들, 그럼에도 돌진하는 주인공 일행들이 의례적으로 나와야됩니다.
즉 서로 싸워야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몇분동안 아군들만 계속해서 죽어나갑니다.
상륙작전이 실행되자마자 관객이 가장 먼저 보는 건 군모에 총알자국이 생기고 허수아비처럼 쓰러지는 미군병사들입니다. 그야말로, 무차별 살육이 시작됩니다.
뭘 어떻게 할 수 있어야 잘 할려고 해볼텐데, 사람들이 끝도 없이 죽어나갑니다.
이제 캡틴 밀러가 주인공으로서 옆의 병사와 뭘 해볼 수 있겠다 싶으면 그 병사는 또 죽어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영화 속에서 거의 피의 비가 내립니다.
심지어 물속으로 미군들이 뛰어들었는데도 물 속에서도 총을 맞고 죽습니다.
물 속으로 들어가면 일단 안전해진다는 상식조차 무의미해집니다.
누가 봐도 온 몸이 너덜너덜해졌는데 의료병들이 그 병사를 어떻게든 구하려고 붕대를 메고 난리를 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무모하고 잔학하면서 아무 대책이 없다고 느끼는 시퀀스는 거의 처음입니다.
무방비 상태로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에 떨궈진 그 느낌...
보는데 너무 지독해서 눈물이 나더군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을 수 있나?
저는 전쟁을 주장하는 인간들은 반드시 전장에서 선두지휘를 해야한다고 봅니다.
자기도 죽을 거라는 걸 체감을 해야 그런 주장을 안할 수 있겠죠.
(저는 이 시퀀스를 가지고 "쩐다!!"는 말을 쉽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스필버그가 시체 애호가라서 저렇게 찍은 게 아니니까요)
이 노르망디 상륙씬은 이 영화에서 전쟁의 의미를 아예 못을 박고 시작합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의 결투일수도 있고, 항전일수도 있고, 스마트한 작전수행일 수도 있고, 긴장감 넘치는 타임어택일 수도 있고, 비장한 애국행위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필버그는 아예 '죽음'이라고 말하고 시작합니다.
전쟁은 죽음이라고요.
전쟁씬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바로 죽기 시작합니다.
상대를 죽이지도 못합니다. 그냥 배에서 내리는데 수십명이 바로 시체가 됩니다.
전쟁은 사지가 원래대로 붙어있지도 못하고 한 순간에 바로 시체가 되는 그런 사건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죽음' 속에서 병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톰 행크스는 밀러 대위에 정말 최적의 배우였습니다.
그의 평범함과 소시민성은 많은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밀러 대위는 전쟁영화에서 기대할만한 카리스마나 마초적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사람 좋은 직장 상사죠.
그런데 전쟁이 나면 이런 사람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이런 사람들이 전장에서 고생합니다.
아마 전쟁이 나면 우리 모두가 저런 처지에 놓이겠죠.
명령은 따라야하고, 사람을 죽이기 싫지만 아군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또 계속 죽여야하고, 때로는 아군들을 사지로 몰아야하고...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밀러 대위는 오른손의 떨림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 영화는 아예 처음부터 PTSD에 걸린 채로 시작되는 거죠.
저는 이 손떨림의 묘사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선하고 성실한 사람이, 자기 옆에서 아군들의 핏덩이 시체가 굴러다니는데 아무렇지 않을리가요.
저는 밀러 대위가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미션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어느 순간까지는 투덜대면서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에서부터 무의식적으로 그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겁니다.
그 전장 속 누군들 아니겠나요.
탈영을 할 수도 없고 퇴임을 할 수도 없죠.
아무 의미없이 죽고 죽이는 짓을 하지 않으려면, 의미있는 행동을 찾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쪽 아군이 열명이 죽으면 백명이 행복하게 살거라는 상상 속 논리를 끌어오죠)
적군을 죽이고 영토를 탈환하라, 적군을 몰살하고 그곳을 24시간 사수해라...
이런 명령보다 우리 아군 중 누군가를 구해서 집으로 반드시 귀환시키라는 그 명령이 그의 양심을 움직였을 겁니다.
이 전장에는 생이 없습니다.
상대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그 둘 중 하나의 상태만이 계속 번갈아서 지속됩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임무는 그에게 훨씬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여겨졌을 겁니다.
어쩌면 그는 그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부터 계속 탈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살아남아봐야 '아직 안죽은' 상태이고 '상대를 또 죽여야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그 시작과 끝이 매우 명확합니다.
누군가를 살려내서, 그를 home으로 돌려보내는거죠. 이 지옥에서 빼낼 수 있습니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았을 겁니다.
여러 전쟁 영화를 보았지만 이 영화만큼 제가 전쟁의 참혹함을 새기고 현재의 평화에 감사하게 만드는 영화가 또 없네요.
저는 그 동안 해병대 할아버지들이나 군부심 부리는 사람들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싸워준 사람들에게는 존경심이 생깁니다.
물론 이것이 군국주의나 미국중심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겠지만서도...
(현재의 미국을 생각하면 진짜 어이없는 블랙코메디네요)
그래도 그 충격이 여전하네요.
사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그냥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극장에서 아직 안보신 분들은 꼭 보셨으면 좋겠네요.
극장 재개봉을 하는지도 모르고 얼마전에 집에서 재감상을 했어요. 저도 기왕이면 극장에서 보고 싶었는데 최근에 본 걸 또 보려니 티켓값의 압박이...
이번에 볼 때 그 '가짜 라이언'을 찾았던 곳에서 만난 소대장이 자긴 왜 그런 임무를 받았는지 이해한다고 하니까 밀러가 "Do you?" 하고 되묻는 대사가 기억에 남았는데 저는 밀러가 이해를 하고 있다기 보다는 자기도 완전히 납득은 안가지만 어떻게든 합리화 하려고 언급하신 그런 논리도 가져오고 애를 쓴다고 봤어요. 나중엔 라이언 백명이라도 도중에 죽은 자기 부하들이랑 안바꾼다는 말도 하죠.
이 영화하면 항상 말이 나오는 게 '발암캐' 업햄인데 저도 어릴 때 보면서 너무 답답해서 욕을 많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가장 그럴듯한 캐릭터로 받아들여집니다.
오마하 상륙 신 정말 무섭죠. 저도 몇 년 전에 이 영화랑 '지상 최대의 작전'을 재감상하고 당시 사진도 찾아 본 적이 있어요. 이 영화를 보면서 스필버그가 영화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 실감했어요.
재개봉했는지 몰랐는데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보고 싶네요. 요즘 보고 싶은 재개봉 영화가 많은데 몸이 안 따라가 주니 문제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오 그러셨요 그 영화가 듀나님이 같이 보라고 추천했던 영화맞죠?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총탄에 의해 '부서지는 신체'를 생생히 묘사해, 현대 무기의 무서움을 보여준 초유의 전쟁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폭발음도 큰 잔해 부터 모래 소리 까지, 시차를 두고 덮쳐서, 실제 전투장에 있는 느낌을 주었죠. 마술사 스필버그가 창조해낸, 생생한 지옥도 였습니다. 개봉 관람 당시, 전투 장면이 개시되면 두려워졌던 영화었습니다. '87년 '플래툰'에서도 소총 소리에 놀랐는데, '라이언 일병'은 차원이 다르더군요.
2025년에 이 영화를 보면서도 놀랐는데 20세기 당시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상상이 안갑니다. 이 전쟁영화를 능가하는 다른 영화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제가 (극장에 있는데도!) 총알맞아 죽는 것같이 느껴졌고, 같이 보자고 저를 데려간 사람과 엄청나게 싸웠고. 다시는 전쟁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된 그 영화군요. 지금 생각해도 온몸이 떨립니다. 전쟁은 정말 절대 안돼요.
아... 이해합니다. 보는데 정말 괴롭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