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최근작 중 가장 즐겁게 본 '페니키안 스킴'

헷갈릴 여지없이 작중 내내 '페니시아'라고 발음되는데 왜 굳이...
베니시오 델 토로가 연기하는 주인공 자자 코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같은 사업가입니다. 그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만큼 많은 적들을 만들었고 틈만 나면 암살시도를 당하는 처지입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또 한 번의 암살시도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자는 더는 안되겠다 싶어 여러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총 9명의 자식들 중 어렸을 때 수녀원에 보내버렸던 외동딸 리즐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일생일대의 숙원이었던 페니키아라는 곳에 대형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페니키안 스킴'을 달성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날 훌륭한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가장 개성적이고 확실하게 자신만의 인장을 새긴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웨스 앤더슨이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정점을 찍은 이후의 작품들은 평단에서 딱히 혹평을 받은 적은 없지만 관객들에게는 이전보다도 더욱 호불호가 갈리기 시작하며 소위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죠. 특유의 아름다운 미장센과 딱딱 맞아 떨어지는 프레임은 이젠 너무 강박적으로 다가오고 무뚝뚝한 출연진들의 연기 스타일은 답답하게 느껴지고 초호화 캐스팅은 배우낭비 아니냐는 불만이 늘어난 것이죠.
원래부터 알기 쉬운 오락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빠개지는 난해한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최근엔 뭔 이야기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반응도 많았구요. 특히 바로 전작 '아스테로이드 시티'가 그랬죠.

이런 비판을 어느정도 인식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만들다가 결과물이 이렇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작품은 최근에 불호로 꼽혔던 부분들이 상당부분 줄어들고 꽤 자제한 느낌입니다. 주인공의 '페니키안 스킴'이라는 것이 초반 현란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대사에 낚이지만 않으면 그냥 돌아다니며 동업자들 한 명씩 만나서 사업자금 끌어들이는 거라고 이해하면 땡이고 결국은 부녀간의 관계회복, 로드무비로 심플하게 즐길 수 있는 내용입니다. 감독의 전작들 중에서는 '로얄 테넌바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가장 많이 생각났어요. 화면비 장난질(?)도 이번엔 러닝타임 거의 대부분이 아카데미 비율보다 약간 넓은 1.5:1 고정이고 중간 중간에 잠깐씩 들어가는 흑백 시퀀스에서만 바뀝니다.
정말 그 배우들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인맥, 위상과시가 아닌가 싶었던 초호화 캐스팅도 이번엔 그럭저럭 납득이 가는 수준으로 이뤄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겨우 저 분량에 저 연기 하려고 출연했나'라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몇명 나오긴 합니다만;;; 그래도 주요 조연들은 적재적소에 써먹었습니다.

포스터에 올린 이름들은 많지만 결국은 이 3인의 이야기입니다.
베네시오 델 토로는 감독의 초기작에서 주로 빌 머레이, 고 진 핵크먼 등이 연기했던 자기 일만 좋아하고 인간관계는 서툰 아버지 캐릭터를 맡았는데 전형적인 웨스 앤더슨 스타일 주인공이면서도 본인의 재미있는 개성과 매력을 잘 섞어넣었습니다. 이 명배우가 주연급으로 기량을 100% 발휘하는 작품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아쉽게 느껴졌네요.

주인공의 딸 리즐 수녀를 연기한 미아 트리플턴은 완전 처음보는 신선한 이름과 얼굴이었는데 세상에 무려 케이트 윈슬렛 대배우님의 따님이셨다고 합니다. 또 네포 베이비냐 싶기도 한데 웨스 앤더슨의 인터뷰에 의하면 6개월에 걸친 오디션 과정을 통해 선발했는데 캐스팅 이후에도 한참 뒤에서나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작중에서도 그렇고 평소 외모가 그렇게 엄마를 확 연상시킬 정도로 닮진 않기도 했고 라스트 네임이 달라서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했습니다. 연기는 뭐 엄청난 대형 신인이 나왔다! 정도는 아닌데 딱 감독이 원하는 스타일로 아주 잘 소화했어요. '로얄 테넌바움'에서 기네스 펠트로 느낌을 생각하시면 될듯해요. 다른 것보다 대사칠 때 목소리 톤, 억양같은 건 엄마를 쏙 빼닮았더군요. 그냥 물려받았는지 조기 가정교육(?)의 효과인지...
가장 좋았던 배우는 마이클 세라였습니다. 뭐하다가 이제 처음 캐스팅했나 싶을 정도로 웨스 앤더슨 월드에 찰떡같이 달라붙는 모습이었고 제가 보기엔 커리어 베스트로 뽑힐만한 연기였어요. 한 때 할리우드 청춘영화 남주 독식하다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제법 잊혀졌었는데 자기 본연의 색을 꿋꿋이 유지하면서도 노련, 성숙함이 더해져 커리어를 잘 이어나가고 있는 듯해서 보기 좋았고 웨스 앤더슨 차기작에서도 꼭 또 봤으면 좋겠습니다.
각종 OTT와 IPTV에 올라왔는데 대충 만원 정도에 개별구매로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스트리밍으로 그냥 올라온 곳은 없는 것 같아요.
바비에서 그냥 병풍같은 개그캐릭인줄 알았는데 후반부 활약이 대단했다는 게 나름 반전이었죠. 웨스 앤더슨은 특유의 작품세계에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관객들도 꽤 있죠. 원래 취향이 아니시라면 이것도 별로일 확률은 있어요. ㅎㅎ
살아 있는 인간들과 현실 배경을 갖고 이렇게 그림책 내지는 신문 삽화 느낌을 내는 것도 참 신기하지만. 그 스타일 하나를 시종일관 계속해서 집요하게 밀어 붙이면서 이만큼 인정 받고 또 재밌게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싶습니다. 물론 말씀대로 모든 작품이 다 재밌는 건 아니었지만요. ㅋㅋ
그리고 올려주신 이미지들로 보면 베네치오 델 토로가 정말 이 그림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네요. '프렌치 디스패치'에도 나오긴 했었지만 여기서 훨씬 더 어울리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하하.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그 죄수 화가 역할도 정말 이 분만 이렇게 소화해낼 수 있는 역할이라고 봤는데 여기서도 정말 잘 어울립니다. 뭐 애초에 수많은 배우들과 작업하는 감독이니만큼 맞는 배우를 잘 알아본거겠죠. 본문에 썼듯이 마이클 세라도 원래 쭉 출연해온 배우인 것마냥 잘 어울렸구요.
주인공의 아홉 아들은 양자들도 있어서 그렇게 숫자가 많다는 설정이었습니다. 리즐이 왜 애들을 입양했냐고 물으니 친자라고 똑똑하란 법이 없으니 양자로 인재풀을 넓히려 한다는 내용의 황당한 대사가 있었어요. 친딸도 어린나이에 수녀원에 넣은 아버지가 (양)아들이라고 사랑으로 키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리 머릿수가 많냐는 의문에 대한 답이 되기는 했습니다.
아 그랬죠. 아인슈타인 같은 애가 있을 수도 있으니 확률게임 한다는 식의 대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