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그림자 군단] 보고 왔습니다

@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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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개선문 앞에서 나치 군대가 행진한다. 프랑스는 나치에게 점령되었다. 이 초현실적인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통과하는 첫번째 문이다. 그 국가적 패배와 치욕을 두고 다음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누군가는 분명히 맞서 싸울 것이다. 

 

관객이 처음 보는 것은 안경을 쓰고 있는, 평범해보이는 중년 남성이다. 그는 군용 차량에 타서 어딘가로 호송되고 있다. 그는 자기 앞에 앉은 간수에게 교도소가 시설이 좋다는 등의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그는 범죄자일텐데 그 간수는 오히려 범죄자인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말한다. 

 

주인공인 제르비에는 체포된 상태다. 그 역시도 프랑스의 나치군부에 저항하고 위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의 이야기들은 확인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은 제르비에란 인물이 일단 잡혀서 교도소에 끌려왔다는 것이다. 주인공으로서 각성하고, 훈련해서 강해지고, 뜻과 지혜를 모아서, 뭔가를 결행하고, 그게 성공했거나 실패했다는 투쟁의 역사를 관객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기대한다. 나레이션으로 제르비에는 교도소의 간부나 감시 상태를 비웃는다.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한 데는 뭔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일전에 건설 쪽 전기기술을 다뤘던 사람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교도소의 전력을 통제하는 관리자와 친해지게 된다. 통제실 안에 들어가서 스위치들이나 전력기구들의 상태를 살펴보는 그의 눈초리가 매서워보인다. 젊은 죄수이자 관리자는 제르비에를 신뢰하며 함께 탈출하자는 계획을 몰래 전한다. 제르비에는 믿음직한 동료도 구했고, 교도소를 혼란에 빠트릴 전력통제소를 조작할 수도 있다. 같은 방의 죄수들은 게임이나 하며 노는 얼빠진 사람들이다. 이제 얼추 그림이 짜맞춰졌다. 제르비에는 결행일을 기다린다.

 

어느 밤 감옥문을 두드리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제르비에를 데리고 나간다. 다른 죄수들은 그를 안쓰러워한다. 일이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는 사람들과 도심지 호텔로 간다. 그 곳에는 나치 정복을 입은 군인들이 있다. 아마 이곳에서 처형 혹은 그에 준하는 뭔가를 당할 것이다. 그는 다른 포로와 함께 있다가 작은 작전을 짠다. 자기가 말을 걸면 그 사이 틈을 봐서 둘이 함께 달아나자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끔 흘깃거리는 시간이 제법 오래 지속된다. 제르비에는 담배를 빌려달라고 하면서 전광석화처럼 독일군의 목을 칼로 찌른다. 허둥대는 다른 독일군을 몸으로 밀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지만 아까의 그 포로가 향한 방향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제르비에는 반대 방향으로 전력질주를 한다.

 

중후한 목소리로 나오는 나레이션은 긴장감을 자아내지만 제르비에가 뭔가를 해내는 건 없다. 그는 잡혀오거나 도망친다. 철저하게 짜놓은 탈출계획은 실행할 틈도 없었고 그는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이송된 호텔에서 간신히 도망쳤지만 그의 작전은 다른 포로를 희생시킨 느낌마저 든다. 어두운 밤거리를 질주하는 제르비에는 겁에 질려있고 긴박해보일 뿐이다. 그는 이발소로 황급히 도망쳤고 이발소 주인은 떠나려는 제르비에가 독일군에게 쫓기는 걸 눈치챈다. 그 주인은 자신의 다른 색 코트를 입으라며 건네준다.

 

베레모를 쓴 젊은 조직원이 광장에서 대기 중이다. 그는 아마 제르비에와 같은 조직에 몸담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경찰이라며 소개한 다른 남자와 함께 차를 탄다. 그 차에는 제르비에가 타고 있다. 다른 조직원이 베레모를 쓴 그 젊은 남자가 밀고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을 담지 않는다. 밀고자에 대해 경멸이나 배신감을 느낄 법 한데도 그들은 사무적 태도로 일관한다. 이 장면은 제르비에가 독일군들에게 호텔로 붙들려갈 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제르비에 일행은 젊은 밀고자를 어느 집으로 끌고 간다. 그들 사이의 공기는 무겁지만 옆집에서는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난다. 원래라면 비어있어야 할 옆집에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이사를 온 탓이다. 때문에 밀고자를 총살하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들은 밀고자를 앞에 두고 칼로 죽이자고 계속 대화를 나눈다. 칼은 없고 또 다른 조직원을 기다리는 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이들은 별 수 없이 목을 졸라 죽이기로 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에 열의가 넘치던 신참 조직원은 지독하고 우악스러운 이 처형논의에 절망한다. 밀고자는 도살자 앞의 가축처럼 계속 두려움에 떤다.

 

원칙주의는 개념으로만 접할 때는 철두철미한 신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제르비에를 포함한 레지스탕스들의 실천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밀고자는 죽어야한다, 이 원칙을 실천하는 과정에 잡다한 소란이 계속 따라붇는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이 압력에도 이웃집 사람들의 일상 속 소음이 계속 새어들어온다. 이 어수선한 현장에서 이들은 방법과 도구를 급조하고 실행한다. 결국 한명은 다리를 잡고 한명은 팔을 잡고 의자에 앉은 밀고자를 남은 한명에 뒤에서 수건으로 졸라죽이기로 한다. 이 구질구질한 과정을 거쳐 처형은 간신히 완료된다. 비범한 정신은 속되고 비루한 현실의 고역들을 마주한다.

 

놀랍게도 이 내용이 영화 전체를 축약하고 있다. 이들은 밀고당하고, 간신히 탈출하고, 그 다음에 밀고자를 죽인다. 이것이 이 영화가 그리는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이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로서 독일군을 죽이고 맞서 싸우는 그런 영광된 대결은 없다. 끝없는 실패와 도주와 내부단속뿐이다.

 


 

멜빌의 영화답게 [그림자 군단]은 어떤 씬들의 호흡이 유난히 길다. 뭔가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시간조차도 영화는 담고 있다. 그것은 임무를 성공하기 위한 신중한 기다림일 것이며 동시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주저함일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관객은 점점 더 초조해진다.

 

한편으로 그 숨막히는 기다림이 기이하게 안락하다. 어떤 결행의 순간이 지금 당장은 유예되어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고 그 때가 다가오면 또 필사적으로 뛰거나 지독한 뭔가를 치뤄야한다. 그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이 필연적인 무위의 시간은 잠시나마 편안한 감각을 제공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제르비에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장면일 것이다. 제르비에가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할 때 지상에서의 대공포 공격이 시작된다. 혹시라도 비행기가 격추될까봐 영국군은 제르비에에게 일어나 탈출할 준비를 하라고 한다. 상황은 심상치 않다. 그러다가 비행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영국군은 제르비에에게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어준다. 제르비에는 모포로 몸을 두르고 잠을 청한다. 비행기의 소음 속에서, 격추될지도 모르는 위험 사이사이로 낙하 직전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찌보면 이 여유는 고단함 속에서야 간신히 챙길 수 있는 찰나의 휴식일지도 모른다.

 

이와 대조되는 것은 제르비에가 총대장과 함께 영국을 방문한 장면들이다. 자신을 체포하려는 나치나 비시 정부 요원들이 없는 영국이 그에게는 훨씬 더 안전하고 여유로울 것이다. 그는 좋은 호텔에서 더 말끔한 정장으로 옷을 바꿔입고 총대장과 함께 영화관람도 한다. 독일군의 비행기 공습을 피해 들어간 어느 건물에서는 연합군 남녀가 함께 춤을 추고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 광경도 목격한다. 그러나 제르비에는 그 어느 순간에도 영국의 안전과 여유로움에 빠져들지 못한다. 그가 실제로 평안을 느낄 수 있는 영국에서도 그는 계속 겉돈다. 그는 투쟁 말고는 마음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군다. 동료 펠릭스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곧바로 귀국한다.

 

어쩌면 이 기묘한 이완의 감각은 멜빌이 실제로 레지스탕스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때에, 인물들은 급습을 당하거나 체포된다. 이 영화의 흐름을 보면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때란 자신이 위험한 뭔가를 하려고 긴장하고 있을 때 뿐일 것이다. 정말 마음을 놓으면 한순간에 총살을 당하게 될 테니까.

 

 


 

용산 CGV에 박찬욱관이 생긴 기념으로 이 영화가 특별상영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영화가 끝나고 정한석 평론가는 이 영화를 설명하다가 관객들에게 이런 내용의 질문을 했다. 제르비에가 독일군에게 총살당하기 전, 그는 이 전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밀고자를 처형했던 기억, 영국에서 춤추는 젊은 군인들을 봤던 기억, 마틸드와 공원을 거닐며 작전을 논의하던 기억... 일반적인 주마등의 현상이다. 그런데 '무한과 연속'이라는 표제의 책을 보는 장면이 제르비에의 기억을 스쳐간다. 그런데 이 장면은 제르비에의 과거가 아니다. 총살현장에서 탈출한 후 외딴 시골의 집에서 총대장의 저서를 살펴보는 미래의 사건이다. 즉 그 책 표지 장면만 미래의 장면이다. 왜 플래시백 사이에 플래시 포워드가 끼워져있는가? 

 

해당 저서가 수학적 개념을 다루는 '초한'의 개념이기에 나는 그 내용과 영화를 연결지을 지식이 없다. 그렇다면 남는 해석은 두가지 뿐이다. 하나는 제르비에가 죽기 전에 그 전에도 그 책을 봤었고 그 정보가 없는 관객에게만 미래의 유사한 장면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히 미래에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잘라서 갖다 붙였다. 그게 정말로 과거의 사건이었다면 미래의 장면을 그대로 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는 제르비에가 미래를 예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 경험하지도 않았지만 그가 이미 겪은 것처럼 미래를 보았다. 이것이 가능한지는 제쳐두고 그 현상이 정말로 벌어졌다면 의미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과거의 기억들 가운데에 미래가 끼어드는가. 그렇게 본 미래를 다시 마주했을 때 제르비에의 시간과 삶은 무엇이 되는가. 

 

죽음 앞이라는 그 현장에서 제르비에는 미래를 보았다. 죽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틀렸고 그는 그 미래를 마주했다. 미래는 이미 정해져있다. 그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정해진 미래 안에서의 과정이다. 그의 미래는 죽음으로부터의 도주다. 그것은 그가 이 영화에서 내내 반복해오던 것이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그는 프랑스의 독립과 승리라는 미래를 만들어낼려고 하지만 그가 꿈꾸는 미래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의 미래를 과거형으로 서술한다. 누군가는 참수당했고, 누군가는 뛰지 않은 채로 총살당했고 누군가는 옥사했고.

 

단죄하고 처벌하는 것은 오로지 아군뿐이다. 지옥같은 현재를 거쳐도 더 나은 미래는 끌어와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돌고 돌며 쳇바퀴같은 도주와 살인만을 거듭하는 레지스탕스의 삶이란 무엇일까. 심각하되 결실이 없는 이들의 행위를 보며 역설적 감정에 도착한다. 허무가 이렇게 격렬할 수 있다는 것을.

 

    •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 비장함과 건조함에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감정이 생기게 되는 지점들을 잘 쓰신 거 같아요. 어떤 영웅주의와 환상도 없는 사실적인 표현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갱스터와 큰 차이가 없게 보였는데 제가 느와르를 좋아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 영화란 생각을 합니다. 대의와 현실 사이의 격차에서 생기는 멜랑꼴리함은 어떤 영화 보다 잘 전달한 거 같고 여운이 큰 영화였어요. 이번에도 보고 싶었으나 시간 맞추기가 넘 힘들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 저도 처음 봤을 때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감흥에 휩쌓였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를 처음으로 멜빌을 알게 됐는데 걸작이란 생각이 바로 들었네요. 건조한 묘사 사이로 중간중간 나오는 사운드트랙은 또 얼마나 구슬픈지... 이 감흥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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