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대홍수.

영화를 보기 전부터 기묘한 현상들이 눈에 띄더군요. 먼저는 스레드였는데, 장문의 글들이 올라왔어요. 이게 그렇게까지 혹평 받을만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블라블라. 그 다음에는 영화를 보다 말고 본 이야기들이었는데, 전 세계 각국에 (넷플릭스) 1위로 흥행하고 있다, 감독의 철학이 느껴지나? 어제 남은 부분을 다 보고 나서는 허지웅의 참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 정말 기묘하네요.


혼잡한 검색 결과를 피해, 개봉 이전의 기간으로 검색하면서 느낀 점이 또 있었습니다. 영화 보고 나서도 대략적으로 손익분기점이나, 촬영 비용 등을 토대로 뭐, 그 돈으로 이 정도 찍었으면 고생 했네, 같은 감각이 생기는데 [대홍수]는 지금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더군요. 같은 감독의 [전지적 독자 시점]의 경우, 손익 분기점이 600만, 제작비는 312억이라고 하니 [백두산]이나 [더 문] 정도 비용으로 만들었구나 하는 감을 잡을 수 있는데 말이죠. 이걸 통해서 극장 개봉과 넷플릭스 공개의 차이가 뭔지 슬슬 짐작이 가더군요. KOBIS 같은 공신력 있는 데이터도 접근이 불가능하고, 자기들이 짬짬이 대충 보여주는 국가 순위권 정도만 얻을 수 있고요. 공식 채널 외에도 여기저기서 흘리는 것들을 주워 모아야 하기도 하고.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면, 지난 주 일요일 저녁 10시 반에 틀어놓고 보다가, 도저히 월요일 새벽 0시 30분까지 영화를 보면서 일요일 밤을 허송세월하고 싶지 않아서 멈추고 딴 걸 하고 놀았답니다. 이 영화가 감당하긴 힘든 시간대였죠. 하지만 화요일 7시에는 다시 관대해져서 1시간 정도는 할애할 수 있겠다 싶어 마저 보는데, 나름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마 월요일 자정을 넘어서까지 굳이 다 봤다면 악평을 쏟았을 수도 있어요. 여유있을 때 보는걸 권장합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셋, 좀 더 처주면 넷 정도 등장하는 아주 작은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재난물을 좋아해서, 공개 광고를 할 시점부터 보겠다고 마음 먹었었고요. 개연성은 나름 있지만 아주 뛰어나진 않았어요. 내적 논리는 그럭저럭 맞아들어가긴 하는 것 같고. 사실 영화의 포멧 때문에, 제 5의 등장물인 아파트의 디테일이 잘 안 다뤄지는 것 같아 아쉽군요. 상당히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 복도형 아파트에서의 삶의 행태들을, 외국인들은 과연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떤 마음으로 봤을지.


[인생이 영화]라는 예능을 가끔 보는데, 거기서 최강희라는 분이 나와 로코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왜 요즘에는 로코물이 잘 안 될까에 대한 그의 답을 들었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답답한 여주인공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다들 굉장히 미워하기도 하고. 그런 허당끼를 수용하며 사랑에 빠지는 것인데.'와 전혀 비슷하지 않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요체는 고구마 캐릭터를 무지하게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홍수]의 초반부에서도 대재난에서 탈출해야 하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장애물로 작동하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보면서, 아아... 한국인들 버틸 수 있을까... 읊조리게 되더군요.


하지만 마지막 쯤 가면 그 아이를 비난의 눈으로 봤던 사람들을 전부 멕이는 재미가 있는데, 꼭 그렇게만 작동하진 않겠죠. 일상화된 파국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그 이후 같은 식으로도 찌그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딱 맞아들어가진 않을 것 같고. 여튼 일상화된 파국 개념 자체에서 벗어나 아이를 구해낸다는 개념은 나름 나쁘지 않았습니다. 벗어나는 표현도 뭐 그 쯤이면 열심히 했다 싶고. 모성애라는 고리타분함을 어떻게도 숨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죠. (저는 그래도 보통의 영화였다면 명명백백한 장애물-빌런-아이였을 캐릭터가 그 세계를 꽤 잘 이해하고 있고 관찰자인 우리보다도 먼저 파국적 개념이 사실은 별거 아니란걸 파악하고 있었다는 지점 하나만으로도 큭큭거릴만 한, 얻어갈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해봅니다.)


영화를 정리해보면, 완전 망해버린 지구를 벗어나 우리의 후손들을 우리가 직접 설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음, 어머니와 아이 세트로 만들고 반복 훈련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구해내면 지구에 투입할 인간으로서 완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는 것인데, 음...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유명해져서 그런 것이 아닌지.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보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좀 더 시나리오를 오래 가다듬어서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비 고치를 잘라서 더 빨리 변태하도록 돕는 우화 같달까요. 시나리오로 전하고 싶은 바가 복잡한데 너무 혼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마음대로 이 영화를 바꿀 수 있다면... 애초에 이런 강화 훈련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테니 납득이 안 될 겁니다. 인간 다음 존재에 꼭 감성을 넣어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그래도 복도식 아파트에서 생존 루프물을 찍고 싶다는 욕망은 충분히 저도 입맛을 다실거고, 편집과 촬영, 과정은 좀 바뀌겠지만 처음에 재난물처럼 시작해서 납득 불가능한 결과에 도달하는 것과, 생존 루프는 남겨봅니다. 우주에서 인간을 빌드하기 위한 고지능 컴퓨터로 생체 뇌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자원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연구원의 뇌를 가져다 쓸 수 밖에 없었고, 그 내부에서 미련에 의한 에러 구조가 구성되었다, 이런 거면 더 낫겠군요. 생체 뇌와 연산 시스템간의 힘겨루기가 이뤄지고... 산으로 가게 되겠군요.


여튼, 이 영화는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이 훨씬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 자체의 볼륨은 어디 쯤일까요? 100억이 [검은 수녀들], [독전], [염력] 정도고, 50억이 [범죄도시 1], [잠] 정도라는데 그 사이 쯤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넥플릭스는 행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공개 초기 반응이 너무 험악한 수준으로 안좋아서 이에 대한 반발로 '괜찮은데 왜들 그렇게 까냐?' 이런 반응들도 나오고 허지웅이랑 영화 번역가 황석희씨도 한마디씩 참전을 했었나 보군요. 어떻게 보면 별다른 극장 흥행작도 없었던 올해 국내 영화계에서 안좋은 의미로라도 이렇게 높은 화제성과 열기를 유발하는 유일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 




      일단 흥행은 72개국인가 1위 찍었다니까 대박이고 넷플은 웃고 있겠네요. '너희는 깠는데 1위' 뭐 이런 논리도 많이 보이는데 작품의 흥행과 평가는 항상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해외에서도 IMDb 5.4, 레터박스 2.6로 관객들 평점 자체는 평균보다 낮습니다. 국내는 네이버 3.8, 왓챠피디아 1.8 유독 더 까이고 있는 건 맞네요. 뭔가 승리호 때도 그렇고 유독 국내 SF 같은 장르물은 한국 영화팬들이 더 가혹하게 평가하는 느낌도 있어요.

      • 작년 연말을 떠올려보면, 이 정도면 행복하고 활기찬 연말 아닌가 싶습니다. 올 해 영화가 힘이 약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랬을지도? 되돌아보니 그렇네요. 해가 지나가기 전에 이런 소소한(?) 멱살잡이들을 보니 왠지 좀 따뜻하고 훈훈할지도.




        댓글로 달려다가 글을 하나 더 써버렸네요. 그러게요 어째서 이게 이렇게 되는 것인지? 저도 그 마력에 이끌려 글을 두 개나 써버려서 좀 부끄러워졌습니다, 하하.

    • 잘 읽었습니다. 필요이상으로 까내림과 과소평가를 받는 면도 분명히 있고, 동시에 그다지 좋은 점을 찾고 싶어지는 영화도 아니긴 하더군요. 외려 이 만큼 널리 퍼진 뻔한 이야기를 진지한 척 늘어놓고 할 수 있다는 건 놀란이나 워쇼스키 같은 반도국 대중이 좋아하는 감독 따라하라는 제작+투자 쪽의 악영향 아닐까 같은 생각도 들더라구요. 사실 아무리 분칠하고 잘 만들어봤자 애니매트릭스에서 정신으로 시스템의 한계를 넘는 스포츠맨 에피소드 정도 수준인데 결국 그건 이미 20년 전 작품이란 거죠. 굳이 특정 장르 팬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현재 관객들이 좋아할 리는 없었던 건데 그걸 밀어붙인 건 배짱인지 뭔지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요. 하여튼 이런 거라도 있어야 조폭이나 연애질 빼면 눈에 띄기 힘든 K반도국 영상물에서 차별화나 개성이랍시고 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이것저것 누적된 고름 같이 곪아터진 K반도국 영상업계의 악덕이 시범 케이스로 터진 건데 매도 먼저 맞는게 나은 건가 싶기도 하고요. 하여튼 헛소리가 길어졌네요. 좋은 성탄 되시길. :DAIN_

      • 어느 쪽이든 엄청나게 양산된 잊혀진 영화들 사이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몇 개의 영화가 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에는 소소한 영화들 하나 하나도 다들 열심히 기억해주는 건가 싶고요. 이후 좀 찾아보니 자연 재해물이 그렇게 자주 개봉하는 건 아닌가 보더군요. 한국 영화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전 그래도 올 해 몇몇 한국 영화를 좋게 봤답니다. DAIN_ 님도 좋은 성탄 보내세요.

    • 영화소개프로그램에서 매트릭스같은 가상 아파트 시스템화면 보여줘버려서 (도대체 왜?) 대충의 전개는 예상하고 봤는데도 재미없었어요.

      초반은 진짜 재난이고, 후반부는 아들찾기위한 엣지오브투모로우+미션임파서블인데, 재난부분이 너무 성의가 없었네요. 그많은 사람들은 왜 도중에 다 사라지고 없는지, 재난, 인류멸망의 느낌이 전혀 안났어요.
      • 사실 모르고 보는 쪽이 의도한 바였을텐데, 소개 프로그램이 도의가 없었네요.


        사람들이 없어지는건 표면적으로는 몇 번의 쓰나미를 거쳐서 다 쓸려간 거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아무래도 우주에서 애플리케이션을 돌리는 컴퓨팅 파워를 효율화하려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ㅋㅋ.


        전체적으로 왜 그렇게 체감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성의없음'이 있었어요. 확실히 각 아파트 내부는 잘 꾸며놨고, 바깥 구성도 아파트 같은데, 유기적으로 전체가 딱 붙는 느낌이 없단 말이죠. 추측되는 하나만 말해보면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빌드업이 꼭 들어가는데, 이 영화는 한 명이 전부 감당해야 되서 그런 것 같아요. 일상 세계를 전반적으로 묘사한 후에 비일상 세계로 진입해야 그 갭이 큰데, 여기는 그 갭이 거의 없죠. (특히 차 사고는 그냥 들어내고 다른 빌드업을 넣었다면 어땠을지...) 나머지 인물군도 완전히 NPC화 되어 그런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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