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레코더 잡담

제가 처음 샀던 컴퓨터가 MSX였고, 에메섹스는 주된 소프트웨어 공급매체가 롬팩이었습니다. 저장매체로는 그당시 8비트 표준 저장장치였던 데이터 레코더를 썼습니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란 게 존재하긴 했지만, 에메섹스가 애초부터 롬팩으로 프로그램을 공급한다는 걸 전제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수요가 적었고, 그래서 FDD 가격이 본체가격이랑 맞먹었습니다. 그래서 그건 그냥 있다는 사실만 알고있는 물건이었죠. 남의 나라 이야기.

데이터 레코더는 카세트 테이프를 매체로 사용하는 장비이고, 기계적으로는 음악 듣는 카세트와 똑같았습니다. 컴퓨터가 카세트 동작을 제어하는 케이블 단자가 더 붙어있었을 뿐이죠. 물론 데이터 레코더에 일반 테이프 넣고 음악을 듣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매체를 사려면 컴퓨터 매장이 아니라 동네 레코드 가게에 가면 되었습니다. 음악 녹음할 수 있는 테이프면 다 쓸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매체 가격도 당대 제일 쌌습니다. 음악 테이프 제일 비싼 걸 사도 플로피 디스크 보다는 훠얼씬 쌌어요.(적어도 에메섹스 기준으론)

데이터 레코더를 사용하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장비가 드라이버였습니다. 아날로그니까, 뭐든 미세조정을 해줘야하잖아요. 아날로그의 특징이 모든 개체가 다 유니크하다는 거죠. 내가 직접 기록한 거 나혼자 쓰는거라면 매번 조정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남이 만들어놓은 데이터 테이프를 갖고 와서 틀면 조정이 거의 필수였습니다.

조정하는 방법은 카세트의 헤드와 테이프에 기록된 데이터가 맞물리는 각도가 가장 잘 맞도록 맞춰주는 거였습니다. 카세트에 헤드를 고정하는 나사를 드라이버로 살살 돌려주는거죠.
우선 소리를 켜고 테이프를 돌리면 프로그램 헤더 부분의 소리가 들립니다. '삐' 하는 소리가 몇번 나오다 본 데이터가 시작되면 찌지직 하는 잡음이 계속되게 되는데, 삐소리가 날때 그 소리가 최대한 맑고 선명하게 들리도록 맞춰주는 겁니다. 그리고 됐다 싶으면 소리 끄고.
그리곤 컴퓨터에 화면 뜰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우리나라는 공식적인 에메섹스 소프트웨어 유통체계가 없다시피했기 때문에 해적판의 세상이었습니다.(일부 대기업이 공식적으로 유통시킨 게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게 진짜 정당한 거였는지도 의심스럽고) 양적으로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던...거기다 대기업에서 몇페이지도 안되는 베이식으로 짠 게임을 몇만원(당시돈으로!) 받고 파는 걸 보고 기겁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롬팩은 복사하기도 귀찮고 매체 비용도 비싸서 해적판 제조업체들은 롬팩에서 뽑아낸 데이터를 카세트테입에 담아서 유통시켰습니다.

당시 에메섹스의 롬팩은 최대 용량이 256Kb였습니다. 킬로비트. 롬은 비트로 계산하는 게 관행이었죠.(나중에 무려 1메가비트 롬팩이 개발되며 메가롬이라고 거하게 선전때렸지만 그래봐야 플로피 디스크 한'면'도 안되는 용량...) 256을 바이트로 바꾸면 32KB. 일본은 롬팩만 꼽아 쓰라고 램이 8케이비인 기종도 나오고 그랬지만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램이 48케비는 되었던 것 같고 어지간하면 64달고 나왔죠. 그래서 롬팩의 내용을 통짜로 램에 올려 실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속도.

속도는 1200보, 2400보 두가지가 있었는데, 이게 아마 bps였을 거예요. 그때는 baud라고 했습니다.
시판되는 해적판 테이프는 1200보로 기록되어 나왔고 집에서 직접 데이터를 '녹음' 할 때는 2400보로 했죠. 비됴 테이프의 2배속(3배속이던가?) 녹화랑 대충 비슷한 개념이랄까... 2400으로 하면 테이프 용량을 두배로 쓸 수 있는데다 로딩 속도도 두배 빨라집니다. 단점은 사알짝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거지만, 1200보도 신뢰도가 썩 높은 건 아니었으니까요 뭐.

로딩 속도는 2400비피에스로 치고 계산해보니 대충 2분 좀 못되게 나오는 것 같네요. 당시 체감상으로는 '아주 길다'였는데요. 계산상으로는 시간이 그렇게 얼마 안걸렸던 것 같기도...? 
지금도 뭐 스펙상 속도와 실제 속도의 차이가 상당히 크니까 뭐 그때도 스펙 그대로의 속도는 안나왔을지도요. 전 한 5분쯤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200으로 로딩하면 계산상으로도 5분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만...

롬팩에서 떠낸 데이터라면 순수하게 데이터만 로드하는 거니까 그래도 빨랐던 편이고, 처음부터 테이프로 돌리도록 만들어진 건 진짜 인성수련도구였죠.
나중에 들은 거로는 남들이 풀지못하도록 암호화하면서 속도가 엄청 느려진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기억나는 건 호비트 어드벤처 게임이 로딩 시작하고 나서 라면 하나 끓여서 다 먹고 나니까 그때 게임이 시작되었던 거(64케비 램에 로딩하는 거고, 저 먹는 속도 느린편입니다)

테이프를 데이터용으로 썼을 때 전체 용량이 얼마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걍 대충 기억으로 롬팩 게임이 두자릿수 단위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여러개가 들어가 있게 되면, 테이프는 랜덤 억세스가 안되는 물건이라... 원하는 게임이 대충 어디쯤에 있는지 카운터 숫자를 대충 맟출때까지 FF를 한 다음에 로딩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따블데크가 있으면 테이프 대 테이프로 직접 복사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치만 아무래도 신뢰도 문제가 있었죠.


에메섹스가 롬팩 위주로 굴리는 걸 상정해서 만들어진 물건이다 보니 위에서 말한 건 대부분 (당시의 우리나라 였으니 가능했던) 편법이고, 테이프는 게임 데이터를 세이브한다든가 하는 보조용도였죠. 나중에 롬팩만 굴리도록 만들어진 재믹스가 나왔을 때는 그렇게 테이프를 보조용으로 사용하는 게임에는 제약이 걸리게 되지만 뭐 크게 신경들 안썼던 것 같기도 하고요.

에메섹스2는 롬팩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물건이다 보니 결국은 플로피가 필수장비가 되었고 그렇게해서 데이터 레코더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전 에메섹스와 인연이 끊어져서... 그 뒷일은 잘 모릅니다.





-테이프가 느리고 불편하다 보니 보완하려는 물건이 나왔었습니다. 이름하여 퀵디스크. 이름부터 퀵이잖아요. 일단 디스크 모양을 하고있고, 플로피와 카세트의 중간쯤 되는 물건이었습니다. 최대의 장점은 에프디디보다 훨씬 싸다는 거.(그거보다 더 비싸게 판다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당연히 로딩 속도는 테이프보다 훨씬 빨랐지만 랜덤 억세스는 안되었던 모양이고요. 직접 써본 친구 말로는 플로피와 카세트의 단점을 모아놓은 것 같다고... 퀵디스크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려보지도 못하고 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테이프를 쓰던 때에는 애플 쓰는 친구네 집에 가면 세상 부러웠는데요. 에프디디 하나만 있으면 세상 모든 게 다 날아다닐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년 있다 아이볨을 사면서 플로피 디스크를 직접 써보게 되었고.... 플로피가 얼마나 느린 물건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죠ㅎㅎㅎ



전 지금도 타이핑할때 손가락 놓는 방법 모르고 속도도 느리지만 에메섹스 쓰던 동안은 BLOAD"CAS:",R 이거만큼은 빛의 속도로 쳤네요ㅎ




    • 대우 MSX로 자낙이나 킹스밸리 한번 하려면 그때 기억으로 한 시간은 기다렸던 것 같은데 그냥 기분이 그랬던 걸까요 여튼 집에 굴러다니는 카세트 테이프가 그대로 컴퓨터로 연결된다니 참 신기하더라고요. 그 다음인가...삼성에서 SPC가 나왔는데 이건 본체에 카세트 데크가 같이 붙어 있어서 더 신기하게 보였지요. 국민학교 때 특별활동 컴퓨터 반이라고 해서 가봤더니 컴퓨터는 1대만 있어서 선생님만 쓰고 애들은 나무판에 스펀지로 붙인 키보드 모형을 주면서 해보라고...다 옛날 추억입니다  

      • 이번에 비피에스로 계산해보고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적게 나와서 놀라긴 했는데 제 기억에 대충 5~10분 걸린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빨리 게임을 하고싶어하는 조바심에 체감시간이 늘어났던 거 아닐까요.


        SPC-1000은 샤프의 MZ 시리즈를 개조한 거였는데 MZ 시리즈가 카세트 내장으로 만드는 게 전통이었죠. 울니라에 MZ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전 갑자기 골천년전 일본 컴퓨터 이름이 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건지 궁금해했었습니다.





    • 테이프 저장매체는 들은 것 같긴 한데 제가 그 당시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저장매체는 5.25 플로피 디스켓인데 그 전 세대의 매체인가요? 아님 거의 동시대?
      5.25는 아주 짧았던거 같고, 그 이후는 3.5 인치 플로피, zip 디스켓, CD, USB 그런 플로우죠. 
      • 같은 시대에 있기는 했어요 가격이 월등하게 비쌌지요 지금도 그거 하나 들고 우쭐대며 돌아다니던 친구 녀석이 기억납니다

      • 8인치 플로피 디스크(전 딱 한번 본적 있습니다)가 처음 나온게 70년대 초이고 테이프가 저장매체로 사용된 건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둘이 생긴 것만 다르지 기본원리는 같은 물건이니까요.


        개인용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카세트 테이프가 보편적인 저장매체였습니다. 일단 가격이 깡패인데다 워낙에 널려있는 물건이었으니까요. FDD는 가격이 비싸 소수만 쓸수있는 거였다가 FDD 가격이 내려가면 테이프가 퇴출되는 순서였죠. 90년대 초에 유럽에선 아직도 카세트 테이프 쓰는 사람이 꽤 있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던 적도 있네요.


        IBM PC도 처음 나왔을 때는 카세트 테이프 단자가 있었습니다. 다만 IBM 살 정도의 재력이면 굳이 테이프 쓸 일이 없어서 IBM에 테이프 달고 썼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ㅎㅎ.

    • 저 아직도 그 카세트 테이프 로딩 소리 대충 흉내낼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 하지만 아시다시피 한국 8비트 컴퓨터 시장은 금방 MSX 호환 기기들이 장악을 했고 그쪽은 대놓고 롬팩 밀다가 3.5인치 디스켓으로 넘어갔기에 많이 써보지는 않았어요. 게다가 제가 처음으로 사용한 컴퓨터는 사촌 형이 조금 갖고 놀다 저희 집에 버린 SPC-150이었고 그 다음엔 아버지께서 큰 맘 먹고 사 주신 대우 X-2였기에 더더욱...




      그 시절엔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한 듯 받아 들였지만 (전교 몇 등 안에 들면 사준다고 그래서 일생 안 하던 공부를 처음으로 죽어라 해 본 추억이 있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 X-2를 사주셨던 건 참 큰 선물이자 투자였던 것 같아서 쌩뚱맞게 마음이...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ㅠㅜ

      • 전화로 피씨통신 연결할 때도 비슷한 소리가 났었죠.


        전 1밖에 안써봐서 엑스2는 실물로 본적도 없네요. 친구집에서 아이큐이천은 본적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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