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세계의 주인.

의심많은 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 이사해야 할 월세집을 확인하듯 움츠러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알고 지내는 과정에서, '아, 갑자기 그래서 팍 깼어'라는 편이 있다면, 저는 먼저는 깨어있고 나중에 잠드는 편입니다. 아마 추측컨대, 의심은 벌거벗음 앞에서 희미해질 겁니다. 무장한 사람 앞에서 내놓은 손을 확인하듯, [세계의 주인] 초반부는 깊은 사실감과 리듬감으로 제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교복 입고 소파에 올라 타는 장면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음을 말해봅니다.)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사람이란 것이 너무 두려워 상처를 입었다는 말에, 그것이 가능하냐는 식으로요. 찬찬히 생각해보니, 이 부분에 제가 창작물을 보는 본질이 담겨 있더군요. 저는 실세계와 창작세계를 확실하게 쪼개고, 창작세계를 비춰 알 수 있는 것은 창작자 자신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던 겁니다. 창작세계의 것들은 본질적으로 허구라 믿으며, 창작자들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논픽션을 훨씬 많이 읽게 됩니다. 위 대화를 했던 분이 그렇게 이야기 하시더군요. 영화에서 실제 촬영을 할 때 그 인물은 실제 존재한다고. (어떤 영화를 찍은 감독이 '이 영화는 그 사람이 없었다면 찍지 못했다'라는 이야기를 곁들이며.) 듣고 보니, 영화는 연극과 마찬가지로 몸이 있고... 어쩌면... 어쩌면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세계의 주인]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역시나 많은 아이들이었습니다. 편견에 의해서,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하는 연기가 어디까지 진짜 연기일까, 라는 궁금증과 함께 생동 자체인 세계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도 깊게 봤던 것 같은데 뭔가를 남겨두지 않았나 봅니다.) 많은 영화에서, 실세계의 어린이들 비율보다는 언제나 적은 어린이들이 나오는데, 마치 그 비중을 맞추기 위해서라는듯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나와 좋았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가 탁월하게 다루고 있듯, 우리가 유년기라는 반석에 삶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어쨌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저는 서글퍼집니다. 영화의 이마라고 생각하는 오프닝을 지나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며 관객들에게 인식시킨 후에는,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과 함께) 갈등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우리는, 어두운 전조를, 경험하지 않은 미래의 기억을 어슴푸레 느끼게 됩니다. 특히 초반부에 주인공에게 인간성을 느껴버리게 된다면 갈등을 만나고 그 갈등이 해소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 오리라는게 괴로울 것입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 보다는 좀 더 쾌활해 - 보이는 이주인에게, 최근 상당한 입소문을 타게 만드는 서사가 몰려오려면 어떠한 갈등이 어느 정도 규모로 펼쳐지게 된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많은 영화들에서 갈등을 해체했다고 감독은 손 놓고 떠나지만, 납득되지 않는 관객은 잊기 전까지는 그 영화에 영원히 갇혀 고통받게 됩니다. 과연 무슨 이야기일까.


알다시피 영화는 굉장히 뛰어나게 이런 의문들에 보여줬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행선지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앉아있는데, 제 옆에 앉으신 나이가 꽤 드신 할머니 분께서 제 얼굴을 뻔히 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더군요. 저는 가을볕을 받고 있는 세상이, 너무 영화가 세상을 잘 떠와서, 한동안 영화처럼 보이고 있던 몽환 상태일때 말이죠. 거기서 살짝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아 화장실에서 세수를 해야 했었구나.


영화에 대한 이런 저런 좋은 이야기들은 다른 분들이 해주실테니,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을 뽑아봅니다.


미도와 주인이 차도교 아래의 산책길을 걸으며, 무엇이 제일 힘든지 대화합니다. 아직 그들이 모이는 모임이 어떤 모임인지, 이 영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짝 혐의는 있지만 명확하게 뭐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짐작 속에서 제일 힘든 것이 사랑과 용서, 라는 이야기가 어떤 확신과 함께 괴로움을 줍니다. 보통의 산책 중 속 터놓는 이야기치고는 너무나 철학적이며, 그것이 사실은 연극적 대사가 아니라 실전적 대화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


주인의 어머니가 어린이에게 꼬집힘을 당합니다. '이래도 안 아파?' '이래도 안 아파?' '...' '이래도 안 아파?' '(작은 목소리로)아파......' 

(이 시퀸스는 이 영화의 전체에 메타적으로 반복됩니다.)


김홍중은 자신의 철학 세계에서 행위자에 비견되는 감수자라는 개념을 만드려 애씁니다. 한 구절을 옮겨보자면, [서구 사회이론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파악해왔다. 그것은 활동적 남성을 모델로 한다. 하지 않은 것은 무시되거나, 존재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에는 '하는 자(것)'들 뿐 아니라 '겪는 것(자)'들도 존재한다. 참는 자(것)들, 견다는 자(들), 묵묵히 흡수하고 감수하는 자(것)들이 거기에 있다.] 이후 김홍중의 주장에 의하면, 세상은 사실 감당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다른 영화에서 잘 포착되지 않는 그 사실을 잘 잡아내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너무 말하고 싶었던 한 장면을 이야기해봅니다. 후반부에서 미도를 포함한 청소 모임이 다 같이 청소를 하고 있는데, 법정 다툼이 어떻게 되가는지를 서로 대화합니다. 그 중 안경 쓰신 분이 '가해자가 이런 표정을 지으며 부들부들 하더라니까?' 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연기를 다 같이 하는데, 안경 쓰신 분이 그 연기를 너무 잘해서 누군가에게 찬탄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만 방청에 참여해봤지만, 지금까지 봐온 가해자들은 울분에 가득차 있더군요.


하, 너무... 조아써요, 한 줄만 써도 될 것 같은 영화지만 좀 더 군더더기를 붙여봅니다. 좁고 가는 길을 감당하신 감독 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


P.S. GV 참여하느라 한 번 더 보는데 다시 보니 처음 봤던 교장실까지의 말을 토해내라는 압박 증가가 덜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깨알 같은 장면 하나, 수호가 식당에서 싸인을 받으려고 권유하며 준 패트병 음료가 사과 음료더군요.


저는 영화에서 제가 느낀게 꽤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GV를 통해서, CCTV에 녹화된 누리와 주인의 긴장관계가 감독 님의 의도대로 해석한다면 극이 끝나고도 남아있는 물음처럼 느껴지더라구요. 플래쉬 백을 쓸 생각이 없는 영화에서 어린 시절을 관객과 주인 양 쪽에게 상기시키는 아이들, 과 그 대치에 있는 누리와의 관계가 사전조사에 의하면 좀 더 부정적일 수 있다고 하셨고. 영상의 영상으로 액자화될만한 사실은 영화의 가장 깊은 영역 중 하나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영화 전반에 걸처, 흔적(상처라고도 말할 수 있는)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엎치락 뒤치락이 반복되는데, 당연하게도 좀 단순하게 생각했던 긍정적인 해석보다는 복합적으로 남겨두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앎과 해석에 대한 생각도, 다시 볼 때 처음 볼 때와 세차장으로 구분되는 전반부가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 다름이 해석을 지배하게되는 그 영역을 역시나 신경 쓰이게 됩니다.)다시 보니 영화가 생각보다 더 타이트했고, 2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뺄 곳이 없어보이더군요.

    • 저는 이해가 잘 안가는 파트도 있지만 그래도 어떤 충만한 감정이셨는지 공감도 되고 전달이 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아마 많이들 세차장 씬을 기억에 남는 씬으로 꼽으실텐데 저도 2회차 감상하고 나니까 언급하신 그 두 장면들이 많이 와닿더군요. 꼬집히는 장면에서 장혜진 배우 연기가 너무나도 훌륭했죠.




      출연진 중에서 고민시가 현재 가장 유명하고 잘나가는데 왜 포스터에 이름도 빼고 홍보에서 내세우질 않았을까 궁금했는데 영화 본편을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구요.

      • 감사합니다 ㅋㅋ. 따뜻한 답변이네요.




        PS에 추가로 적어보았지만, 그 꼬집히는 장면이 생각보다 더 많은 생각과 물음을 가져오는 장면으로 변모되었어요. 저는 좀 단순하게 주인이가 누리에게, 아픈 것을 이해시키고 싶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투영에 대한 분노와 이해 등의 여러 정서들이 투사되는 (즉 또 다시 일어나는 폭력인가 아닌가...) 복잡한 상황이 어머니에게 전달되고 있던 거구나 싶더군요. 좀 더 복합적으로 슬픈 장면이었습니다. (그래도 수호가 밝은 얼굴로 주인이를 꼬집기 때문에, - 이것도 영상의 영상으로 액자화되지만 - 해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긍정화 된 것 같기도.)




        미도에 대해선, 어떻게 이해가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세상의 주인이니까... 포스터 독점은 이해가 되지만요.

        • 아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신인인 주연배우에게 가야할 스포트라이트를 개봉 전부터 뺏어가는 일도 방지하고 작중에서 그렇게 중간에 의외의 친구, 지원군처럼 등장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 아하, 확실히 극 내에서 갑작스런 등장에 힘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좋았습니다.

    •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청소모임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두번째 관람 때 열심히 들었는데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런 표정을 짓고 부들부블"은 가해자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전 재판 때 다른 피해자의 배우자가  피해자/증인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변호사인지 판사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재판 후 그 사람에게 앞에 가서 "이런 표정 부들부들"을 했는데 거기서 더 나가지는 못하고 노려보기만 했다는 맥락으로요. 저는 재판 때 청소 모임 사람들이 방청석에서 피해자/증인에 공감해서 같이 울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게 힘든 경험을 했고 아직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용기내어 법정까지 갔어도 가해자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는데 '나도 2심 때 뒤집혔어, 정의가 이긴다", "나는 못했지만 내 몫까지 더해서 죄값을 받아줘"라고 말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맙게 느껴졌고요. 뻔한 피해자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 정형외과 간호사로, 배우자가 있는 임산부로, 도장 후배를 챙기는 넉넉한 선배로 생존자들이 그려지는게 정말 좋았습니다. 생존자는 여자들이 다수지만 당연히 남자도 있었고요. 본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조연들이지만 이 생존자들을 섬세하게 비춰서 익명의 편지 화자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결말이 더 울림이 있었다고 봅니다.     

      • 그 순딩이 같은 00 삼촌이, 였던가요. 제 방청 경험상, 도움주러 나오신 분들은 법정 진행 상황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 거의 그런 행동을 피해서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그 사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웃은 맥락이 좀 더 이해가 되네요. 판결을 보러 갔을 때, 같이 오신 분들이 판결이 나오기 직전에 각자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던 기억이 너무 또렷하게 남아서, 영화가 얼마나 현실적인가 생각했습니다. 영화에서 그 장면 중에 맨 앞에 앉아 핀트아웃된 여성분은 모친이 아닌가 싶더군요. 저도 방청 연대를 하는 그런 생존자 분들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지만, 적어도 미도와 주인의 현재 삶을 설명하는데 주요한 커뮤니티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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