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수요일, 4월 3일 목요일 집회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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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저녁 일곱시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 전날 철야를 한 사람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인파가 가득한 풍경에 괜히 찡하더군요. 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어떤 제의 같기도 했습니다. 


어느 교회 사람들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묘하게 좀 마음을 건드리는 게 있었습니다. 세종호텔 고진수 허영희 동지들의 복직 투쟁 현장에서도 뵈었던 분들인 것 같은데, 노래 가사들이 예수와 투쟁을 연결하고 있어서 거기에 괜히 위로받았달까요. 대형 교회 목사들의 파렴치한 기득권 옹호나 야권 대선주자 공격, 소수자 차별이나 선동 발언들만 봐서 정말 지겨웠는데 이런 집회에서 기독교의 이웃사랑을 볼 수 있어서 괜히 반가웠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있었다면 외롭고 고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옆에 있었을 거라고 저는 늘 믿고 있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이 날 행진은 없었습니다. 전날 철야를 했기에 주최측에서도 휴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박민주씨가 행진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주고 함께 부를 수 있어서 보람찼습니다. 이래야 탄핵집회에 온 기분이 난다는 그런 필수적 요건들이 있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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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집에서 밥을 먹다가 좀 늦게 갔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모여있다는 소식을 보기도 했고 어차피 4월 4일에 안국역 헌재 앞을 갈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날 밤이 윤석열이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결국 나갔습니다. 윤석열의 대통령직을 견디는, 그리고 그 현실과 작별하는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습니다.


안국역에 아예 정차를 안하기에 경복궁역에서 하차해 걸어갔습니다. 광장에 세워진 텐트들도 묘한 감흥을 일으켰습니다. 화난 청년학생들의 문화제가 조촐하게 열리고 있었습니다. 안국역 쪽으로 가는 길을 늘 도로 한가운데로 행진만 했어서 차가 다니는 게 좀 어색했습니다. 


안국역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한밤의 야시장을 방불케하는 활기가 서려있었습니다. 그냥 저의 기분이 투영된 것이겠지만 그동안의 광장과는 다른, 좀 들떠있는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이 날 무대는 민주노총 분들이 주도하는 것이어서 또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어떤 노조분은 여의도에서 응원봉들이 반짝이는 걸 보고 적응이 안됐다면서 자기가 모르는 투쟁가가 없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케이팝을 들어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는 게 뭔가 귀여웠습니다. 비상행동측의 무대들보다도, 확실히 윤석열 파면이 다가 아니라 그걸 초석으로 노동자 문제 및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발언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 날 민주노총과 조금 더 친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롱패딩을 입고 가서 앉았는데도 아스팔트 바닥은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성분이 접이방석을 하나 주고 홀연히 떠나시더군요. 시위 때는 늘상 서있느라 이 방석을 처음 써봤는데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냉기가 전혀 안올라오더군요. 이후에 자봉단 분들이 보일러 파이프를 감싸는 스티로폼을 깔아줬는데 정말 따뜻했습니다. 광장이 단순히 모이고, 소리치고 이렇게만 굴러가는 게 아니라 뭔가를 준비하고 또 챙겨주고 그렇게 마음을 나누는 곳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탄핵 심판이 안국역 앞에서 중계되고 있네요. 여기까지!


이 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제가 앉은 곳 근처에서 계속 깃발을 흔드는 정의당 청소년 당원이었습니다. 딱 봐도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무지개 머리띠와 트랜스젠더 머리띠, 그리고 다른 머리띠들을 몸에 두르고 계속 정의당 깃발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서도 지치지 않고 온 몸을 써서 깃발을 계속 흔드는 그를 보면서 작은 수치와 희망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12시까지 제가 앉아있는 내내 그는 노래만 나오면 열심히 깃발을 흔들었고 계속 웃고 있었습니다. 간혹 정의당의 성인 당원들이 와서 안가도 되냐고 묻는 말들이 들렸는데 그 때마다 그는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정의당 성인당원은 그가 기특했는지 힘껏 끌어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진보당 청소년 당원이 인사를 나누며 함께 자기 당의 깃발을 열심히 흔들었습니다. 


집에 가기 전 그에게 예의를 차려 물어봤습니다. 날씨가 추운데 겉옷이라도 입고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요. 그는 몸에 열이 많아 지금 덥다면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를 보면서 무언가를 향한 제일 맹렬한 의지는 순수한 즐거움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떤 거대한 목적의식이나 울분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즐기는 그 모습을 저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습니다. 함께 웃고 춤추던 이 날 파면의 날 이브를 저는 오래오래 기억하렵니다.

    • 그동안 집회 나가시고 글과 사진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집회 운영진과 광장에 나가 고생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네요.


      어떤 곡이었을까요, 김민기가 작곡한 '금관의 예수'가 생각나네요. 개신교가 80년, 90년?대까지는 사회 운동에 한 역할을 했었어요. 야학이나 소모임 같은 게 작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고요. 언제부터인가 차츰 우익화 되더니 극우들 세력에 점령 되고 전광땡 같은 쪽은 거의 사회악으로 자리잡았네요.

      • 오전에 급하게 안국역에 가느라 글을 황급히 마감했네요. thoma님도 그동안 정말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거 생각해보니 예전의 개신교는 정말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런 종교였네요...

    • 집회 꾸준히 참여하시는 시민분들도 그렇지만 정말 계엄당일 망설임 없이 달려나가서 막아선 분들께 가장 큰 빚을 졌습니다.

      • 저도 늘 빚졌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렵니다. 그 날 트럭 못가게 막은 분들 정말 제정신이 아니고 제가 평생 경외하면서 흉내만 내고 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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