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각된 세계를 상상하기.

그 심정은 듀게에 꼭 써 놓고 싶었었는데, 차일피일 미룬 건지 밀린 건지 모를 시간이 지나서 이미 헌재 선고일이 확정되어 불확정한 시간은 지나버렸습니다. 그래도 얼마 안 지났으니 빠르게 그 감상을 짧게나마 적어놓고 싶네요. 어쩌면 불확정 상태에서는 도저히 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시국이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나니, 박근혜 때를 떠올려보는데 그 당시 시위에도 참여해보지 않았고 공간 근처에도 가보지 않아서 마치 그 시간들이 (이제 와서 보면) 금방 흐른듯 착각하게 되더군요. 아마 사진첩을 뒤져보면, 당시의 1, 234, 56, 7, 8 탄핵 소추 통과 때 실시간으로 찍어놓은 가/부 표 사진도 있을 것이고 그 불확정한 시기에도 어느 정도 마음을 졸였을텐데, 이후 다림질을 해버린 셔츠처럼 구김이라고는 떠올리기 힘들더란 말입니다.


무언가 결정이 안 된, 손에 아무것도 잘 안 잡히는, 마치 비유가 아닌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기간은 뇌가 재구성하는 것도 힘들어서 아예 추방시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근 두 달 - 다 쓰고 셈해보니 네 달이군요! - 간 온갖 상상을 하며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음' 속에 있었던 그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겠죠.


저는 보통, 미래의 여러 시나리오 중 다양한 부정적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는 편입니다. 기후위기나 트럼프 치세, 불안정한 국제 정세 등의 여러 시나리오들을 떠올려 보는 편이죠. 그런데, 그런데 이해를 하긴 어렵지만 도무지 이번에 기각된 세계는 뇌가 상상을 거부하더랍니다. 마치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하루 하루 뒤로 밀리는 것처럼, 상상이 또렷해야 더 편안해지는데 상상 자체를 거부하니 더 이해하기 힘든 정신적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차라리 제발 결론을 내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누가 떠올리기 어려운 방식의 멘탈 고문이랄까요.


이번 주 월요일이었나, 헌재가 이번 주에도 판결 안할 낌새이자 '이번 주 목 금에는 판결할 것'이라고 반복했던 언론사들이 물밀듯 '한 3주, 4주도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기사를 쏟아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기간동안 헌재가 왜 그런지 온갖 소설들이 나오는 것도 (저도 하나 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도했습니다.


아마 결과가 나오면, 미래에 '아, 당연히 이런 결과였지, 그걸 반대편에서 북치고 장구친다고 우리가 너무 마음을 졸였었지.' 또는 이 기간은 쏙 잊히고, '윤이 헛 짓해서 자기 임기를 줄여줬지, 5년 간 했으면 어쩔뻔 했어'하고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당장 코로나 시절도 '왜 그렇게까지 빡세게 굴었냐'라고 이야기 나오거나, 그다지 디테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걸 보면 따로 적어 놓지 않으면 손 사이로 다 빠져 나가더군요.


(혹은... 최후의 그 기간동안 한참 기회를 줬는데, 해외 이동도 자유로웠는데 다들 가만히 한국에 있었지, 같은 상상도 조금 했습니다. 발터 벤야민이나 앙리 베르그손의 삶도 떠올리며, 그 때 왜 미국으로 떠날 기회가 있었는데 안 떠났을까, 같은 식으로 안 끝날 거라 믿고는 있습니다만, 오바 쌈바를 안 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적어도 이젠, 당시 유럽을 떠나지 않은 지식인들의 마음만은 아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튼간 적어도 선고일이라는 확정적 미래는 정해진 상태에서, 대부분 남김없이 잊혀져버릴 불확정 연옥의 고통을 남겨봅니다. 나중에서야 무엇이든 인과가 확실하게 보이는듯한 착시효과가 있겠지만,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는 것을.


P.S. 제 냉장고에는 12월 둘째 주에 붙여놓은 '윤석열 탄핵' 카드가 있는데, 탄핵 되면 떼겠다 마음 먹고는... 그렇게 오래 붙어있을 줄 몰랐습니다. 이제 다른 걸 좀 붙여보고 싶은데.

P.S.2. 다시 읽으며 보니 두 달이 아니라 네 달이고 한 걸 보니, '풀려난 이후 12일 만에 첫 메시지'에서 벌써 12일이나 지났다는 충격, '한, 일주일 지나도 재판관 미임명'에서 일주일이나 지났다는 충격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시간의 앞도 뒤도 안 파악이 안 됩니다. 정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돌려주기를.

    • 저도 지난 가을과 겨울을 거쳐 삼월까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개인적인 상실에다가 나라 상태까지 이러니 정말 괴로움에 딩굴딩굴했던 어두운 굴을 돌아보는 느낌이고 구체적인 게 잘 떠오르지 않아요. 


      결국 내일로 도래하긴 했는데 말씀처럼 윤가가 돌아오는 건 아무리 상상하려고 해도 상상이 안 되는데 이건 상상할 수 있는 근거가 아무것도 없어서라고 생각하고 하루 더 견뎌야겠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대행들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나라를 후퇴시킨 배운 놈들 죄과를 반드시 따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 이 쯤 보니 세상 모든 것이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게 느끼게 되고, 아무리 다수로 지지한다 해도 세상의 삼 분의 일 쯤은 반대로 생각하는게 아닐까 상수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요즘 세계를 보면 더디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만으로도 불만을 깊이 삼키게 됩니다. 마음으로는 줄줄이 죄과를 따지길 원하지만, 실제 되지 않는걸 보며 스트레스 받을 걸 생각해서 그런가 봅니다.


        내일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힐걸 생각하니...  (오늘에 이르러서야 최악의 사태 양 쪽을 AI로 시나리오 굴려봤답니다. 이제.. 무슨 결과가 나와도 정신적으로는 안정(?)적이군요.)

    • 후손들이 윤비어천가 학교에서 부르는 세상
      • 내전과 독재 시나리오를 생각해봤습니다. 트럼프 쪽은 트럼프 생일을 공휴일로 하자, 공항을 트럼프 이름으로 하자, 달러에 얼굴을 새기자 하는 소리가 있다던데 한국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 생각했네요.

    • 다행히도 상식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결론으로 1차 마무리되긴 했는데...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인 것 같기도 하구요. 윤석열로 인해 한국 사회의 극우화를 너무 실감나게 깨달아 버려서 뭘 해도 희망이 많지 않다는 기분이 듭니다만. 그래도 일단은 기뻐하고 있구요. ㅋㅋㅋ

      • 저는 헌재 결과에 대해 승복하고 2차 서부지법 같은 사태가 당장은 벌어지지 않아서 그래도 더 가진 않는구나 하고 약간 안심했습니다. 그 때 잡힌 사람들의 후과가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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