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를 보고.

재개봉해서 큰 화면으로 보고 왔습니다. 또 봐도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촘촘한 각본과 연출이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범죄자의 성장 영화인데 일단은 각본과 연출과 연기가 다 잘 어우러진 완성도 있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탕 위에서 특별히 이 분야 다른 영화와 달리 애정을 갖게 된 지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당연히 어떤 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사건들과 인물들과의 만남과 충돌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과 함께 주인공의 내면 상황이 매우 중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련을 겪고 자극을 받는다 해서 그것이 우리들에게 다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데, 주인공 말리크의 경우에는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말리크가 감옥에서 겪은 가장 큰 충격적 사건은 그의 안에 남습니다. 이것은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리크는 죄의식을 잊지 못하기 보다는 '잊지 않음'으로 내면화합니다. 말리크의 경우에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시달리는 식이 아니니까요. 그가 지은 죄는 영혼의 핵심이 되어 그와 동반하고 그를 확장시켜 나가는 식입니다. 내가 해친 사람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할 것인가. 나는 그를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 가장 깊이 그를 두고 가장 소중한 시간에 그와 함께 합니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대화하고 웃고, 그와 함께 기념하고 그에게 배웁니다. 그에 대한 죄의식은 굴레나 억압이 되지 않습니다. 죄를 기억하는 그 시간은 말리크에게 항상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오디아르 감독은 말리크의 내면을 이와 같이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평에서 영화의 이런 특징을 '신비주의'라고 표현하던데 특정한 '주의'라 할 것도 없이 우리의 내면 풍경은 신비한 것 같습니다. 우리 내면은 과거의 이미지와 미래의 희망과 현재의 불안이 뒤섞이고 지난 밤의 꿈까지 출몰해서 설명하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화 같은 풍경이니까요.

말리크가 성장하는 데는 그가 배움이 빠른 사람이라는 점도 있지만 자신의 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아주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감독은 이를 말리크의 성장 동력으로 제시했다고 봤어요.


누구나 죄를 짓고 사는데 각자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영화에서 표현되기는 감옥에 수용된 이의 극단적인 범죄 행위이긴 한데 넓게 보면 의지가지 없이 세상에 던져져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감옥과 별로 다르지 않은 제한적이고 험악한 곳이지요. 부모가 없고 돈이 없고 게다가 문해력이 없다면 감옥이나 바깥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 해당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에 차이가 클 뿐이고 그 차이가 죄상의 차이를 가져올 뿐이지 모두 죄의 범위 안에 살고 있지요. 저는 말리크의 지경에 해당 되지 않은 운에 감사하며 말리크의 지각에 못 미침을 돌아 봅니다. 그가 자신의 죄와 함께하는 것을 보며 감탄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내 처지에서 궁리해 봅니다. 


영화는 경쾌하게 진행되는 속도감 있는 부분들도 많아서 154분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감독과 타하르 라힘의 경력 중에 최고가 아닌가 했고요. 이런저런 뛰어남을 분석할 능력은 안 되므로 오늘도 개인적인 포인트만 늘어놓았는데요. 글이란 게 자신의 한 개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도 소소하나마 써 보는 게 안 쓰는 것보다 좋은 것이고...그런 것 같습니다.  




 













 

    • Nas의 'Bridging the Gap'가 흐르며 말리크가 감옥 내에서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퀀스도 그렇고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은데 언급하신 그 죄의식을 상징하는 한 캐릭터가 막상 말리크한테 별다른 앙심을 품지 않은 것처럼(사실 말리크의 상상이기 때문이겠죠. ㅎ) 동반하는 듯한 전개도 참 재밌었어요. 그게 성장의 동력이라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말리크가 스폰지처럼 모든 상황에 맞게 요령을 배우고 지식을 흡수해서 성장하는 과정이 이걸 관객입장에서 응원해야하나 싶기도 한데 여러모로 재밌죠. 원래 밖에서 다른 직업으로도 잘 살았을 인물인데 운이 나쁜 뿐인지 아니면 감옥이라는 환경이 체질에 딱이었던 건지 모르겠어요. 안에서 동료도 잘 만나서 자연스레 처자식도 물려받구요(?). 타히르 라힘은 그 동료의 아내 역할 배우랑 이 작품 찍고나서 결혼해서 아직까지 잘 살고있더군요.




      다만 '예언자'라는 제목 그대로 말리크의 어떤 예지력을 초능력처럼 보여주는 부분은 뭔가 마지막에 좀 끼워맞춘 것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인데 그냥 살짝 아쉬운 부분이랄까... 자크 오디아르 감독 최고작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후로는 이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 없는 것 같아요. '러스트 앤 본', '파리 13구'는 나름 재미있게 보긴 했습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로 오스카도 받았는데 이건 작품 내외적으로 말이 너무 많았죠.

      • 이번에 보니 방에 혼자 있을 때는 그 캐릭터와 함께 있는 장면이 많다는 게 확실히 눈에 들어 오더군요. 큰 일을 치루기 전에도 나타나고요. 늘 되새기고...영혼의 동반자 같더군요.


        아마 감옥에 있었으니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쉽게 되기도 했겠네요. 밖에서 계속 싸돌아 다녔으면 배울 기회는 더 어렵게 왔을 듯. 뭐 영리하니 잘 나갔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타하르 라힘이 그 아내와 결혼한 건 몰랐네요. 아주 아름답더라고요. 


        저도 여지껏 이 영화를 제목과 연결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슬람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 영화 내에서는 딱 한 번만 예언자라는 단어가 나오더군요.  

        •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각색해서 만들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런 배경을 모르면 '예언자'라는 제목이랑 전체적인 내용은 좀 쌩뚱맞게 느껴질 수 있죠.

          •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런 내용을 읽은 것도 같은데 잊고 있었어요. 아마 이걸 몰라도 영화만으로 설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가...그래서 기억에 없나.... 어째서 본 거 읽은 거 중에 남은 기억은 한 줌이고 대부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어요.  

    • 두시간 반이 넘는데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니! 감독님이 진짜 능력자신가봐요.

      이 정도 후기글이면 진짜 잡담만 하는 제 글보다 훨씬 대단하신대요!!!

      다른 분들 글보면서 매번 한계를 느끼는 중입니다만 어차피 이곳은 놀이터니까 그냥 하던대로 놀겠어요!!!ㅋㅋㅋ

      추천 감사합니다!
      • 어떤 내용을 골라서 전달 하느냐의 문제지 저와 쏘맥 님 사이에는 대단하고는 상관이 없어요.(대단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회원 님들도 계시긴 하지만요)


        쏘맥 님은 짧은 분량에 흥미를 유발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담아서, 더구나 재미있게 명확하게 쓰시잖아요. 


        우리가 뭐 글쟁이도 아니고 자기 식으로 놀면 되겠죠!

    • 크게 관계 없는 얘기지만 그냥 떠오른 최근 일화가 있어서요.




      어떤 학생이 1학년 때 자기 담임을 엄청 괴롭혔어요. 원인은 모르겠습니다만 늘 삐딱하게 굴고 해야할 일 안 하고 담임 욕을 하고 학급 친구들을 규합해서 무시하고 무안을 주는 등등. 담임은 당연히 아주 힘들어했지만 간신히 1년을 흘려 보냈고 2년이 흘렀는데. 이 놈이 3학년이 되어서 자기 힘든 일이 생기니까 바로 그 1학년 담임을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하고 자기 사연을 늘어 놓으며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겁니다. 물론 2년 전 얘기는 전혀 안 하구요.




      이걸 보며 선생들은 입을 모아 "역시 나쁜 짓 하고 남 괴롭히는 놈들은 자기가 한 짓은 기억을 못하는 게 기본인가벼." 라며 혀를 찼습니다만...




      본문에 적어 주신 "죄를 기억하고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이야기 때문에 그냥 끄적거려봤어요. 대다수의 평범한 죄 지은 자들은 자신의 죄를 정확히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성장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ㅋㅋ




      참고로 저 녀석의 상담 주제란 "내가 예전에 욕하고 다닌 애들이 뭉쳐서 그 사실을 전파하며 나를 따돌리고 있다" 였습니다. 자업자득이었죠.

      • 학생 얘기 통한 말씀은 제 생각과 연결되는 면이 있는 거 같습니다.


        이 영화 주인공은 몸담고 있는 곳이 그런 쪽이라 개과천선하는 건 아니고 범죄자로서의 성장이긴 합니다. 그런데도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다 보니 저는 본문처럼 보게 되더라고요. 성장의 동력이라는 표현이 너무 단정적이고 딱딱한 느낌도 있는데...두 인물이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 주인공 말리크가 내면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로이배티 님께서 언제 이 영화를 보시면 제가 너무 자의적인 해석을 했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네요.ㅎ 

    • 원작이 있는거 같아요. 끝날 때 불어 자막>_<으로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감독과 함께 본 영화의 각본을 쓴 각본가 토마스 비더게인은 


      이 영화가 첫 장편영화 작업이었으며, 이후 러스트 앤 본 부터 디판, 시스터스 브라더스까지 계속 자크 오디아르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쓰고 있으며,


       2015년에는 '나의 딸, 나의 누나'라는 제목의 장편 영화로 감독 데뷔했다."


      예언자(영화) - 나무위키




      타하르 라임은 알제리계네요. CGV압구정에서 하는 예술영화들은 거의 다 보거든요. 유명 감독들과 많이 작업한걸로 기억해요.


      구로자와 기요시 영화도 있어요. 이거여요.


      "은판 위의 여인》(2016) : 첫 프랑스 영화. 옛 사진 기법으로 사진을 찍던 남자가 사진 속 여자에게 반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마티유 아말릭 예언자 주인공인 타하르 라힘, 올리비에 구르메가 출연한다."




      자크 오디아르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래요. 조감독을 로만 폴란스키 밑에서 했데요! 감독 데뷔도 마흔 하나로 늦은 편이어요.


      아버지도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셨데요. "대표작으로 알랭 들롱 주연의 느와르 영화 지하실의 멜로디와 데들리 런이 있다."네요.


      자크 오디아르 - 나무위키


       

      • 네. '은판 위의 여인'은 저도 본 영화네요. 타하르 라힘의 출연작 중에 '예언자' 외에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입니다. 이란 감독의 가족 드라마 종류 영화인데 여운이 남았었어요. 


        아버지도 굉장한 분이군요. 감독이 성장기에 환경 영향을 받았겠습니다. 이제 이분도 일흔이 넘으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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