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는 로맨티시즘

  • OPENSTUDIO
  •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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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의 인터뷰가 실렸다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뉴욕,LA 등 미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생활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예쁜 사진들과 함께 실려있는 책이었어요. 평소에 인터뷰를 읽는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책은 걱정부터 들더군요. 수없이 쏟아져나오는 외국/여행 서적들중 하나인, 그저 외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예쁜 사진들과 묶어서 파는 그런 책은 아닐까 싶어서요.

저자(혹은, 출판사겠죠)가 목표한 독자층이, 20대(와 그 이후의)여성들, 좀 더 자세하게는 자신의 꿈을 위해 고민(혹은 방황)하는 여성들인 것 같더군요. 책의 어조는 내내 '꿈을 잃지 말아라. 꿈을 위해 노력하라. 결국엔 이루어진다' 뭐, 이런 거였어요. 사실 그 어조만으로는 비난받을게 하나도 없죠. 몽상가가 욕만 먹을 이유는 없잖아요? 그런데, 불안불안하게 읽어내려가다 보니, 역시나 걸리는 구석들이 많더라구요.

책에는 여러명의 한국 여성들(미국에서 일하는)의 이야기가 실려있어서 뭉뚱그려 책의 내용이 모두 다 그렇다고 비난할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저자의 어조는 충분히 지금까지 우리가 소비해온 "미국! 그 곳에서 자유롭고 더 나은 인생을 사는 여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꿈을 잃지만 않는다면!!!!"이라는 환상을 팔려고 하는것처럼 들리거든요.

출판사의 입김이었을지는 몰라도(사실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작가의 성향이 원래 그런것 같지만), 뉴요커라는 챕터아래에, '뉴욕을 당당하게 누비는 한국여성! 그녀를 따라 나도 뉴요커가 되어보기로 한다. 아침엔 콘도 1층에 있는 라운지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센트럴파크에 개를 데리고 가서 산책하며, 주말엔 브런치를 먹고, 저녁엔 브로드웨이 쇼를 본다'라고 하고 나서는, 아무리 꿈이 어쩌구 해봐야, 진지하게 읽을수가 없잖아요. 저는 이 책의 의도가 정말, 당당히 꿈을 이룬 여성들을 보여주는 거였다면, 그녀가 어떻게 그 물가 비싼 뉴욕에서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리는지, 그것의 의미가 뭔지를 언급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견을 갖지 말고 읽자며, 차분하게 더 읽어봤지만, 다음 챕터, 다음 인터뷰이에서는, '우리는 그녀의 하늘색 뉴비틀에 올라 캘리포니아를 달렸다'라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정도의 양념도 없으면,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기가 힘들었을거야'라고 이해하려해도, 이쯤되니 더 이상 읽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아무리 흥미로운 인생을 산 진지한 얘기도,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으면 진실되게 보이지 않으니까요.

뉴욕에 산지 오래 될 수록, 참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거나 스치게 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저마다 복잡한 존재들이지만, 가끔 대책없는 낭만주의와 소비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마주칠때가 있어요. 사회/문화적으로 여러가지 배경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문장 하나에, 짧게 정의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지만, 가끔은 답답할때도 있구요.
저도 주변 친구들이 모두 '하고 싶은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몽상가라고들 얘기하고, 현실에 발 묶이지 않아 보인다고들 하는데, 사실 이런 책(혹은, 더 나아가 이런 사람들)을 볼때면 아무래도 불편해요.
솔직히 말해서, 저 책에 실린 한 분도, 책에서 말한 그 직업만으로는 절대 생활을 연명하는게 불가능해요. 단지 그 직업이 가지는 직함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업뿐만 아니라, 다른 갖가지 일들을 하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이야 가능하겠죠. 하지만, 책은 그런 얘기를 담고있지 않아요. 꿈을 찾아 떠나라고 부추기면서, 그에 따르는 위험에 대해서는 얘기해주지 않는 꼴이잖아요. 물론 책에서는 내내, 외국인으로서 언어때문에 겪은 고생같은것이 언급되는데, 왜 이래요, 우리 모두 다 알잖아요. 그정도는 가장 큰 '현실적인' 장애물이 아니라는걸.

검색해봤더니, 출간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책인데, 인터넷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리뷰를 올렸더군요.
어느 리뷰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이 책을 읽고 나도 내 가슴이 뛰는 일을 찾기로 결심했다, 라고.
이런 책들이, 정말 의도대로, 누군가가 꿈을 잃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말하려고 하는거라면, 꿈이라는 것의 현실적인 의미가 뭔지, 그리고 그 모든것에 따르는 책임감의 의미는 뭔지도 얘기해줄순 없는걸까요? 책이라는 매체의 장점이, 그런 면에서 좀 더 진지해질수 있다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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