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이준익을 위한 사소한 변명
코멘트로 달기엔 글이 길어져서 답글로 돌립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덮어놓았던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한 게, 결국 현재의 정치상황 때문임을 은근히
표출하고 있습니다. '왕의 남자' 같은 '환상의 제공'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었다고 술회하고 있고요.
전 인터뷰를 읽기 전에 관람했지만, 보면서도 위의 두 느낌을 여실히 받았었지요.
이준익은 늘 지나간 역사를 통해 현재를, 정교하지 않은, 촌스럽지만 진지한 비유법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처음부터 '황산벌'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역사를 입맛대로 짜맞추는
파격성이나 고증의 어설픔이나 정치를 단순화한 것, 현대의 젊은이를 그냥 갖다놓은 듯 한 견자의
얄팍함 모두 미워할 수 없는 감독의 일면이었기에 그 의도 자체를 소극적으로 웃으며
즐길 수 있었습니다. '사극'의 무게감을 기대하신 분들에게는 안 맞았을 것 같긴 합니다.
이몽학의 난을 임진왜란 직전으로 왜곡(?)한 큰 이유는 감독 말로는 텅빈 궁궐에서 둘이 싸우게 하는 장면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전 그 답없는 대결이 주는 황망한 느낌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스산한 백지와
구름낀 달의 이미지가 꽤 근사하게 보이더군요. 궁궐을 탈취하러 간 초라한 대동계무리가 궁궐을 지키게
되는 아이러니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감동' 보다는 강한 허무를 느끼게 하려는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그가 생각하는 역사란, 조선이란, 임진왜란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아무리 올드보이의 촬영감독을 붙여 놔도 티 나는, 장면 연출스타일이 약간 구린 건...
몇편의 이준익감독 영화를 보고 난 지금엔 그냥 그 감독 특유의 멋이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그래도 한옥세트 외의 산과 들의 풍경들만은 그 자체로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기 하더군요.
'감독이 원하는 배경과 상황이라는 설정을 위해서 개연성이 포기된 것이지요. '
이 말씀엔 저도 동감합니다. 여기에 초라한 반란군과 떨어지는 몰입도까지 모두가 감독의 의도처럼
보이기만 했는데, 저도 보면서 이 점 때문에 웰메이드를 사랑해마지않는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나게
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시대의 아픔을 온 몸에 지고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
리얼한 궁궐 묘사, 사실적이고 웅장한 군중전투씬, 비장하고 처열한 클라이막스를
만들었어다면 다들 좋아했을텐데... '구르믈 버서난...'프로젝트에 관객과 제작사 사람들이 다들
기대했던 것도 이런 잠깐이라도 보면 즐겁고 현실을 잊고 즐길 수 있는, 죽이는 영화였던 걸텐데
이준익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하는 고민거리를 던져 주더라고요.
답은... '그게 이준익이니까' 였습니다.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았습니다.
>
> 별로라는 평을 접했기에 안 보려다가 또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는
>평을 읽게 되어 보았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별로라는 평이 맞았네요.
>
> 이 영화의 장점을 꼽으라면 황정민의 연기입니다. 연기를 참 재미나고 맛깔나게
>하더군요. 그리고 다른 장점은, 음... 없네요.
>
> 반면 이 영화에서 눈에 거슬리는 점은 꽤 많았습니다.
>
> 먼저 고증입니다. 저는 고증에 그렇게 집착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면, 고증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고증의 미비함이 단순히 귀찮음이나 게으름의 결과물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
>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왕과 신하들이 사용하는 말투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독이 연출하고자 했던 분위기와 스타일이 있었겠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당쟁'을 다루는 시각은 너무 단순하고, 유치합니다. 왕과 조정 대신들간의 회의 모습은
>노골적인 코미디인데, 그렇기 때문에 우스운 장면도 많이 나옵니다만,
>풍자의 날카로움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아' 수준의
>정견을 자랑하는 동네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정치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너무 얄팍합니다.
>
> 서자인 견주의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견주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대가집 도령들을
>쥐어 패고 정실에게서 태어난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해댑니다.
>제사상에 술 올리는 것을 직전에 거부당하기는 하지만, 세상에! 그 자리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조선시대의 천출서자가 감히 이런 안하무인격의
>행동거지를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
> 견주를 짓누르는 것은 거대한 시스템의 힘입니다. 천출 서자가 느꼈을 차별과 설움, 고통은
>그렇게 소리 꽥꽥 지르며 울부짓는 걸로 가볍게 묘사하기엔 너무도 무겁고 무서운 것입니다. 서자로서의
>정체성은 견주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핵심이므로, 오히려 고증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캐릭터의
>무게감을 실어 주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견주의 모습은
>시스템에 짓눌려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그냥 불만과 반항심으로 가득찬
>질풍노도 시기의 청소년을 묘사하는 데 가깝습니다. 만약 그게 원래의 의도라면, 견주라는 캐릭터는
>처음부터 그런 얄팍한 두께의 캐릭터인 것이겠죠.
>
> 이몽학의 난이 발생한 시기를 임진왜란 직전으로 당겨와 왜곡한 이유도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굳이 그렇게 왜곡해야 할 당위성을 못찾겠습니다. 텅 빈 궁궐과 그 궁궐을 함락하자마자 왜군에게
>방어하게 된 반란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싶어서였을까요. 연출을 효과적으로 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
>습니다만, 배경 음악이 깔리는 와중에 '궁궐은 우리가 지킨다. 우리 꺼잖아'를 외치는 반란군 지휘자
>의 모습은 안쓰러웠습니다. 분명 관객들에게 감동을 느끼게 하고픈 포인트였을 텐데, 완전히 실패
>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꺼'가 '반란군 꺼'라는 의미인지, '조선 사람 꺼'라는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던 당시 저는 후자로 받아들이고 민망해 했습니다.
>
>
> 무엇보다 왜군의 침입이 발생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 올라오는 상황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결성된
>대동계가 마냥 한양으로만 진격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궁궐의 썩은 무리들을 다 쓸어버리고
>나서 왜적을 막자는 말이 정말 설득력이 있습니까? 이몽학에게도 머리가 있다면, 자신이 한양을
>점령하더라도 바로 왜군의 공격을 받게 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을까요? 또 반란군과 왜군이 그렇게
>동시에 쳐들어오는데 왕과 조정 대신들이 한양을 비우고 피난을 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 했을까요?
>
>
> 이는 이미 고증의 문제를 벗어나 개연성의 문제가 됩니다. 감독이 원하는 배경과 상황이라는 설정을
>위해서 개연성이 포기된 것이지요. 개연성이 뚝 떨어지는 이런 전개에 전투 장면의 초라함이 더해집니다.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점령한 반란군이라고 보기엔 이몽학 군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껏해야
>수십명에 불과해 보이거든요. 이준익 감독이 규모의 연출에 강한 편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죠.
>몰입도가 확 떨어지니까요. 명색이 영화인데, 규모의 연출이 거의 TV 사극 수준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
>
> 한지혜가 연기한 백지 역은 이 이야기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고, 차승원이 연기한 이몽학은
>위치가 어정쩡합니다.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악역에 머무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객의 공감대나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엔 부족합니다. 등장 인물들 사이에 선문답 같은 대화가 몇 번
>오가기는 하는데, 의미가 모호하고, 그냥 있어 보이려고 삽입된 것 같다는 생각만 듭니다. 황정학과
>이몽학의 1:1 대결 액션의 경우 이 영화 액션의 하이라이트라 해야 할 텐데 역시 효과적으로
>연출되었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가끔 나오는 슬로우 모션은 오히려 액션이 별로라는 걸 확인시
>켜 주는 역할을 하더군요.
>
>
>
> * 덧붙이는 말
>
>1. 신정근이 연기한 유대감은 동인이었으니 아마 류성룡이었을 테고, 류승룡이 연기한
>정대감은 서인이었으니 아마 정철이었겠죠? 그런데 류승룡은 류성룡과 무슨 관계일까요.
>
>2. 반란군이 궁궐을 점령하고 뒤이어 이민족이 침입하여 궁궐로 쇄도하는 모습은 차라리
>명청 교체기의 이자성의 난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3. 실제 역사에서 이몽학군이 서울로 진격해 점령하는 일 따위는 당연히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