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mithrandir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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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역시 재미있습니다. 설사 그게 작동법도 모르는 6mm dv로, 노출을 어떻게 재야 하는지 감도 안오는 16mm 아리플렉스로, 온갖 제한과 한계와 어려움 속에, 스스로의 어이없을 정도로 무능력함을 확인하면서 만드는, "영화"라기 보다는 "습작 영상물"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듯한 것이라 하더라도요.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역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아마추어 학생도, 나이든 거장도 마찬가지일텐데, 똑같이 치열한 고민을 하면서도 무엇이 다르기에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걸까요.

2. 영화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깔아뭉개는 일이기도 합니다. 충무로 인건비 문제라거나, 많은 사람들이 일하다보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들은 넘어가도록 하죠. "카메라 값이 사람 생명 보험보다 비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농담이 숙연해지는 그 당혹스런 경험. 촬영감독이 높은데서 떨어졌는데 머리가 깨졌으면서도 카메라를 위로 번쩍 들고 "카메라! 카메라는?!"이라고 외쳤다는 일화를 듣고,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3.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영화를 만들면서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꿈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그 중에는 스스로를 믿고 자신감을 뽐내는 사람도,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도, 아직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앞으로 밥벌이나 할 수 있는 걸까 고민하는 묻혀있는 진주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모두가 꿈을 잃지 않고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또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겠죠.
카메라를 가지고 실습을 하고 있는데 옥상에서 거리를 찍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끼리 수다를 떨었죠. "전에 누구 졸업작품에서 이런 장면 찍다가 카메라 렌즈가 옥상에서 뚝 떨어졌다며?" "렌즈만 수십만원이래. 야, 장비 보상 못하면 '졸업'이 아니라 '수료'라면서?" 이 때 교수님이 오셔서는 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자 여러분, 이런 장면을 찍을 때는 렌즈가 떨어질 수 있으므로 한 번 확인하시고, 정 확신이 안 설 때는 렌즈를 손으로 붙잡으세요." 우리는 생각했죠. '어이쿠, 교수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는구나. 허긴 이게 좀 비싼가'라구요. 그런데 "왜냐하면..."에 이어진 교수님의 한 마디.
"아래를 지나가던 사람이 다칠 수 있으니까요."
별로 재미없다구요? 이 별로 재미없는 말에, 우리들은 순간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4. 일전에 리포트를 제출하면서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이 만든 영화는 흥미로운 예술작품이 될지는 몰라도, 감동적인 영화가 될 것 같지는 않다."라구요. 좀 웃기고 편협한 관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생각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 좋아하던 영화를 즐기기 위한 돈과 시간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영화를 위한 열정이 사그러들지 않을까 고민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이런 제 고민에 어떤 분이 코멘트해주시더군요. "문제 아닌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 스스로 판단할 것." 이런 코멘트에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러느냐, 이게 왜 문제가 아니냐, 나 진지하다 어쩌구저쩌구..."라고 반론을 달았어야 할까요? 아뇨, 실은 제가 생각하던 결론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게 정말 문제라고 생각했으면 이렇게 시작하지도 못했겠죠. 아니, 여전히 문제라고는 생각합니다. 그치만 어쩔 수 있겠어요? 이미 나는 여기에 미쳐버렸는데. :-)

5. 학교에 들어온지 몇달이나 지났을까요. 다른 학우들과는 달리 변변한 단편 작업도 못해봤던 사람이 이런 개똥철학을 늘어놓고 있는 걸 보면 제가 글을 적어놓고도 제가 다 웃깁니다. 그치만 - 믿거나 말거나 - 이건 제 진심이니까요. 그리고 짧은 경험만으로도, 그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것 만으로도 알고 있는 것이니까요. 힘든 일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길을 제대로 들었다는 안도감이 드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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