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님의 <어린신부>와는 아주 다른 관점의 글
컬티즌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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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신부], 제도권 드디어 '미숙한 여성'을 포섭하다
문일평 neoidea@hitel.net
1. [어린 신부]가 3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이 숫자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의 상당수는 10대 관객이다. 다수의 10대와 소수의 20대 관객만으로 이 영화는 300만의 기록을 달성했다. 이 영화의 보도 자료는 지금 10대들 사이에서 [어린 신부] 신드롬이 일고 있고, 문근영의 추종자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 영화를 두세 번 보는 이들도 여럿 있다고 흥분하며 홍보하고 있는데, 여러 루트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이것이 단순히 과장된 언론플레이 만은 아닌 듯 하다.
70년대에 청춘 영화들이 관객몰이를 한 이후에 한국 영화 속에서 여고생이 온전히 주목을 받아 본 사례가 없다. [여고괴담] 시리즈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처럼 장르적인 목적이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아니면 여고생은 좀처럼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내사랑 싸가지]와 같은 여고생이 쓰고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들이 영화화되었고 앞으로도 줄줄이 개봉할 예정이며, 안방에서는 여고생과 검사가 결혼하는 이야기 [낭랑 18세]가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낭랑 18세]의 극장판 격인 [어린 신부]의 성공도 일단 이러한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2. Just One 10 MINUTES 내 것이 되는 시간
순진한 내숭에 속아 우는 남자들
- ‘10 Minutes’(이효리) 중에서
나는 콧대 높은 여자 시건방진 여자
자신있음 이리와 봐 애송이들아
- ‘애송이’(LEXY) 중에서
지난해까지는 ‘남성지배형 섹스어필’을 주무기로 삼은 이효리나 LEXY가 대중들의 눈을 사로잡았었다. 저 위에 인용한 가사에서, 그리고 그들의 옷차림이나 제스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생물학적 결정론(10분이면 어떤 남자나 나한테 넘어온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과 과도한 자신감(자신 있으면 이 콧대 높은 나를 한번 꼬셔봐라, 이 애송이들아.)으로 무장하여, 여성 대중들에게는 동일화의 쾌감을 안겨주는 한편, 남성 대중들을 시각적인 쾌락으로 길들였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섹스어필 전략의 전형적인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이 성적 주체가 되었음을 의기양양하게 내세우고 자신을 ‘신여성’으로 규정하지만, 성적 노예상태를 오히려 심화시켜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역전술은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결국은 이들도 그저 ‘섹시스타’라는 상투적인 언어로 기록될 뿐인 것이다.
3. [낭랑 18세]에서 여고생으로 분한 한지혜가 급부상하고, [어린 신부]의 문근영이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이러한 ‘섹시스타’의 하강 국면과 톱니처럼 맞물려있다. 사람들은 냉소적인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위장한 유혹에 슬슬 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효리나 LEXY는 작년에 구사했던 전략으로는 다시 정상에 설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물러난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교복을 입고 호기심에 찬 눈을 가진 여고생들이다. [어린 신부]의 성공은 이러한 맥락에서 수긍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섹시스타들은 세상을 한 눈에 모조리 꿰고 있는 듯이 노래한다. 번번이 자신의 유혹에 함락 당하는 남성들을 바라보며 귀납적인 추론을 통해 생물학적인 결론을 내린다.(“요즘 남자들 똑같애.”) 그리고는 영화감독 홍상수처럼 말한다. ‘남자는 어쩔 수 없는 동물이다. 따분하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어린 신부]에서 문근영은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고 노래한다. 그녀에게 세상은 아직 미지의 텍스트다. 이효리나 LEXY에게 남자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반응기제가 고정된, 예측 가능한 행태만을 보이는 동물이고, 그들에게 세상은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 뻔한 상투적인 TV드라마나 에로 비디오와 같은 것이다. 반면 문근영은 야구부 선수를 멀리서 지켜보며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번을 만나도 느낌이 중요’한데 ‘난 아직 사랑을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노래한다. 그녀에게 세상은 여전히 ‘떨림’으로 감지되고, 그러한 아우라는 모호함과 미묘함을 통해서만 지속된다. 섹시스타가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는 결정론의 세계에는 그러한 떨림이 없다.
4. 그런데 [낭랑 18세]에서 여고생은 검사와 결혼하고, [어린 신부]에서는 늙은 대학생과 결혼한다. 그리고 예전에 개봉한 [내 사랑 싸가지]에서는 여고생이 부잣집 대학생과 노예 계약을 맺는다. 즉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불확실성의 세계에 사는 여고생과 세상의 구조에 대한 독해가 어느 정도 가능한 사내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신부]에서처럼 두 당사자는 그러한 만남을 어이없어한다. 이 영화는 바로 이러한 관계의 불균형을 주요한 모티브로 삼는다. 남편 있는 여고생은 자신이 사모하는 야구부 주장에게 ‘남친은 없다’고 언어 논리의 허점을 이용해 잡아떼고, ‘남편’은 ‘아내’가 다니는 여고에 교생으로 부임한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에서처럼 이 영화는 이러한 난처한 에피소드를 나열하는데 몰두한다.
그런데 이러한 억지스러운 만남 덕분에 문근영은 아역배우에서, 그리고 조연에서 주인공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즉, 여고생과 야구부 주장의 사랑만으로는 그 이야기가 극장에 걸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EBS 청소년 드라마로나 가능한 스토리다. [낭랑 18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고생이 결혼이라는 제도로 포섭되고, ‘비제도권’의 여성들이 ‘제도권’의 남성들과 만나야 그들은 비로소 소비될 수 있다. [여고괴담]에서 여고생들이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컨벤션에 포섭되어 소비되었듯이, 이번에는 제도권 남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소비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관계를 어이없어하던 대학생이 결국은 여고생과 결혼해 그녀의 존재를 ‘반려자로서’ 인정하듯이, 이제 관객들에게도 이 여고생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5. 이 지점에서부터는 배우 문근영이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는다. 그녀는 앞서 언급한 섹시스타들의 육탄공세와는 정 반대의 전략으로 대중들에게 접근한다. 섹시 스타들의 제스처가 “난 다 알고 있어. 그리고 너희들도 다 똑같아.”인 반면, 문근영은 “난 아무 것도 몰라. 알게 뭐람.”이라는 식의 표정을 짓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새롭게 선보이는 연기의 질감이 매우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 영화 속에서 여성은 몇 가지 스테레오타입의 목록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데, 문근영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그 목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강하게 작용한다. 이 영화는 문근영의 얼굴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녀는 이 영화 이전에 주인공으로서 연기한 적도, ‘여성’으로서 연기한 일도 없다. (또한 한국 영화에서 ‘여성’이 아니면 주인공이 되기도 어렵다.) 그녀는 [TV는 사랑을 싣고]나 [가을동화]에서 과거를 재연하는데 필요한 대리인에 불과했고, 기껏해야 [장화, 홍련]과 같은 영화에서 몇 마디 대사도 없이 사라지는, 말 그대로 유령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무대 앞쪽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마치 이제 막 번데기를 벗고 나온 나비처럼 프레임 안을 마음껏 날아다닌다. 이 영화가 지금까지 기록한 300만의 관객동원은 이 갓 태어난 나비의 날갯짓에 힘입은 것이 분명하다.
6. 어린 나이에 데뷔해 무대 위에서 성숙한 모습으로 ‘지나치게 열심히’ 춤을 추던 보아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돼서 세상을 얻고 싶어하는 영악한 어린애의 이미지였고, [낭랑 18세]의 한지혜는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하는 안타까운 20대 여성의 모습이었다. 이들과는 달리 문근영은 스스로 여고생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쪽 세계에서 유효하고 의미있는 존재로 감지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예전에 한국 영화에서는 목격하지 못했던 신선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평론가로서, 관습적인 기준으로 채점할 때, 이 영화에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배우 하나만으로도 영화가 충분히 관객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 영화는 배우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어느 한 순간을 적절한 타이밍에 포착해 성공한 영화다. 그녀가 앞으로 섹시스타로 거듭날 수도 있고, 제도권의 연기방식을 열심히 내면화해 상투적인 얼굴로 ‘표준화’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절묘한 시기에 그녀를 기용해, 앞으로는 그녀로서도 더 이상 재현할 수 없게 될지 모르는 자태를 뽐내게 한다. 그리고 이는 섹시 스타의 기세가 한풀 꺾인 상황에서 조용한 신드롬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어린 신부]는 이렇게 어느 배우의 결정적인 순간을 필름에 담아내고, 수많은 아역 배우 중 하나로 지나칠 뻔했던 문근영을 재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