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그냥 주절주절...

  • 룽게
  •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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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습니다.
회사일을 핑계로 동원훈련에 미참 했더니 한달도 안되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오더군요.
훈련기피를 위한 거주지 이전 신고 미이행 뭐 이런 죄목으로 고발 되었으니 경찰서에 나와
조사를 받으라는 연락이었습니다. 질척거리는 날씨 때문에 밀려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경찰서에 ]
가서 난생 처음 조서라는걸 써보고(정확히는 조사관이 적은 내용을 확인 하고 서명하는 정도였지만)
무슨 중죄인이라도 된것 마냥 조사관 앞에서 온갖 시시콜콜한 사생활 이야기며, 경제적 어려움이며
회사일이 힘들고 거주지 문제도 있어서 자주 회사에서 먹고 자기 때문에 동원 훈련 통지서를 받고도
깜빡 했었다는 변명을 늘어 놓고 경찰서를 나서니 기분이 정말 착잡했습니다.
조서 끝머리에 제가 했던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구요.
4 년이 넘는 시간을 군에서 복무 했으며 지난해까지 단한번의 동원훈련 미참도 없이 잘 받아 오다가
실수를 했다. 선처를 바란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생각 하면 비굴하기 까지 한 소릴 늘어 놓고 나오면서 느낀 감정은 분노보다는 서글픔 섞인
연민 같은것이더군요.
그것도 저 자신에 대한 연민 보다는 개인에 대한 희생을 몰아 세우면서까지 지켜야 한다는 대한민국에
대한 연민이었던것 같습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초가을에야 미참자들이 소집되는 동원훈련에 가게 되었습니다. 30만원짜리
벌금 고지서를 받고서 일주일 정도 흐르고 난 다음이었을거에요. 같다 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상에 이런 무익한 시간이 있나 할 정도로 지루한 3박4일입니다. 위안이 있다면 꼬박 세끼 나오는
공짜밥과(그것도 제가 빼앗기는 시간에 대한 보상치고는 턱없이 모자르지만) 낮잠, 그리고 오랫만에
만나는 여러 선후배들(해군은 좁거든요.^^;) 얼굴이 그나마죠.

그리고 거기서 참수리357을 보게 되었어요.
고속정인 참수리 357을 보게 된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적잖이 얼굴을 아는 이들이 그배
에서 근무 했었고 놀러갔던 적도 몇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본 참수리357은 더이상 물위에 떠있는
고속정이 아닌 육지 위에 벌거벗겨진채 상처를 드러 내놓고 있는 고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탔던 배는 아니지만 바다가 아닌 뭍 한가운데 쓸쓸하게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의 배를
본 다는건 늙고 병든 아버지를 바라 볼 때의 마음과 닮았어요.
그냥 온전히 지내다 다른것들이 그러는 것처럼 녹슬고 삭아버린 몸뚱아리도 아니고 곳곳에 포탄과
총탄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에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그 배가 무슨일을 당했었는지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했지만 막상 그 흔적들을 눈으로 본다는것은
다른 이야기더라구요.

먼저 조타실에 올라가 보니 맨 처음 명중했다던 80mm포탄의 구멍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그걸 보면서도 눈어림으로 몇구경 짜리였나 어디서 어디로 뚫고 나간건가를 살펴보니
바로 조타수허리께를 뚫고 지나가는 각도로 첫번째 포탄이 지나갔더군요.
누군가 여기서 죽었다. 내가 지나가다 얼굴 한번 마주쳤던 사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나랑 같이
근무를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서 죽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니 잠시 등줄기가 뻗뻗해지는 느낌이
었습니다.
나도 이런곳에서 살았었구나.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겁니다.

밖으로 나와 후미 갑판으로 가보니 다른데서 보았으면 꽤 반가울법한 녀석이 있었습니다.
참수리357에는 부포로 20mm함상형 발칸포가 2문이 있습니다. 발칸포는 제가 군생활 했을때 포장을
꽤 오래 했던 적이 있어서눈에 많이 익고 지금 다시 사격을 하라 해도 자신 있을만큼 몸에 밴 장비였
어요.
마운트(포를 감싸고 있는 방호물)의 문을 열어보니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와 말라버린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구멍이 여기저기 뚫린 탄통이 보였구요.
수백번도 더 앉아봤던 자리이기에 그 구멍을 낸 금속조각들이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를 뚫고 왔는지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습니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스무해 남짓한 삶을 그 비좁은 마운트 안에서
마쳐야 했고 그 친구의 애인이 놓고갔다는 꽃다발은 계속 그 마운트 안을 지키고 있었어요.

밖에 나와 담배를 물고 쭈그리고 앉아 그곳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도 연민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참 국민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구나, 아니 어쩌면 이나라 뿐 아니라 국가라는것이
애초부터것은 개인한테 수많은 빚을 지워 가며 존엄과 애국을 구걸해야만 살아 남을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발칸포 마운트 안에서, 같은 서해바다에서 20대를 보내던 한사람은
그 안에서 생을 짧은 생을 마치고, 다른 사람은 서른을 넘긴 지금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불합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걸까 생각 해 봅니다.

참수리 357을 바라보며 쭈그리고 앉아 교관들이 제발 피우지 말라는 담배를 피워대며 중얼댔던것
같아요.
'사람은 이렇게 죽으면 안되는데..'
그랬던것 같습니다. 참수리 357에 포탄을 날렸던 북한군도, 양손에 발칸포 조종뭉치를 쥔채로 죽었던
그 친구도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니까요.

누군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 하고 있다면, 희생 했다면, 그 희생이 값진것이 되려면 같은 목적을
위해 바쳐야 하는 희생이 줄어들어야 그것이 온당한 일이 아닌가 해요.
나라를 지키기 위한 희생이 있다면, 그 희생을 하는 사람이 적어지면 적어 질수록 그 희생은 더 고귀한
값어치를 갖게 되는게 아닐까요?
군복무가 불합리와 낭비라면 그것을 합리와 명예와 실리로 발전시키고, 그렇게 해서 불합리한 군생활
에 희생되는 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게 우선이지 모두를 다 군대로 보내는것
이 평등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희생을 하는 이, 그 희생의 댓가로 삶을 보호 받으며
다른 희생을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결코 평등한 일이 아닐것 같아요.

군복무를 둘러 싼 여러가지 얽히고 섥힌 실타래의 끝을 저는 '내가 받은 고통을 남에게 주지 않기위해
노력한다'에서 출발해야 하는것이 아닐까 합니다.
  


가깝게 지내는 이중에 '증인'이 여럿 있다보니 솔직히 칼슘카바이드의 말씀이 마음 한구석에 걸려
몇자 적습니다. 뭐 발톱 세우고 꼬투리 잡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이런 면도 있어요 하는 이야기
로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두서 없이 글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믿기만하면 군대를 안간다는 무자비한 특권이 준비되어있는 종교를 어찌 안믿을수 있습니까!
>앞으로 우리나라 예비 군입대자들의 절대적인 신앙으로 거듭날것 같습니다.
>역시 우리나라는 이렇게 좋은 나라입니다.
>돈안들이고도 군대 안가는 합법적인 기반을 다져주는 나라가 어디있습니까?
>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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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5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링크 가져왔습니다. squant 1,185 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