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만족이었습니다.
스포일러...물론 포함되어 있지요..
트로이의 가장 큰 미덕은 번쩍번쩍 빛나는 근육을 뽐내며 후까시 잡고 돌아다니는, 지구상에서 가장 마초적으로 섹시한 페로몬을 발산하는 최고 몸값의 남정네들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취향과 거리가 멀어 즐거움을 못느끼시는 분들은, '개연성 없고 막나가는 스토리에 짜증나게 첨가된 구색맞추기 러브스토리가 포함된 멍청한 전투씬이 전부인 영화'라고 느껴도 할말 없지요. 아무리 줄거리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도 빨간 비디오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그을린 허벅지에 흐르는 땀방울만 보면서 2시간 반동안 좋아할 수도 없는일 아니겠어요? 라고 물으실 수도 있고요.
그러나, 저는 좋았답니다. 결론적으로 대 만족이었습니다. 만세~~~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이기에 줄거리에 신경쓰지 않고 더 편히 감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조금 뒤면 땅바닥에 내리 꽃혀 마차에 질질 끌려다닐 처지가 될 거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헥토르와 아킬레스가 마주보고 창을 겨누는 장면에서는 스릴조차 느껴졌고요.
첫번째로, 브래트 피트. 말이 필요없습니다. 정말 한 몸 하더군요. 나는 몸으로 먹고 산다. 라고 온 몸으로 외치는 듯 합니다. 그래도 역시 40줄에 접어들어서인지, 예전의 꽃미남틱한 분위기는 없어졌더라구요. 주름도 보이고요. 그래도 여전히 탄탄하고 멋진 것은 어쩔 수 없죠.
또 브래드 피트의 아킬레스를 보면서 새로운 경험을 했는데요, 그에게는 남자가 어울려.라고 생각하게 만든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전 지금까지 그 사람 자체에게 내재된 특성 때문에 이사람은 게이같다. 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트로이의 아킬레스를 보면서, '이런 사람은 남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오더군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브리세아스와 아킬레스의 씬은 필름 낭비로 여겨졌습니다. 한없이 가벼워서 팔락팔락 나부끼는 영화의 스토리중에서도 가장 중량감이 적어 무중력 상태에 가까웠던 관계랄까요. 또 나머지 두개의 러브 스토리-헥토르와 파리스의-와는 다르게, 현재진행형인 사랑이야기였기에 서로가 반하는 과정을 짦은 시간 안에 보여줘야했었던 것도 이 둘의 관계가 어설퍼 보이게 만든 큰 이유인 듯 합니다. 그 반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너무 스피디해서 말도 안된다 어쩌구 하기에도 입이 아프죠. 하긴, 10년전쟁이 한 3일 쯤으로 압축(중간에 12일 후라는 자막을 빼면)되었으니, 말을 말아야지요.
원수에게 노예로 끌려와 그의 막사에서 한밤중에 목에 칼을 겨누는 브리세아스의 모습은 데자뷰를 일으킬만큼 너무 익숙해서 귀엽기까지 했습니다. 다음 브래드피트의 대사도 예상 가능한 것이었죠. '어서 죽여' 푸하하하하. 그러다가 바로 나신을 드러내며 첫날밤 모드로 돌변하는 것도요.
두번째로, 에릭바나.. 아, 손떨립니다. 사실, 첫번째로 브래드 피트를 언급한 것은 긴 세월동안 지켜온 지조때문이고, 에릭바나, 그야말로 슈퍼루키입니다. 헥토르 캐릭터가 워낙에 좋기에 그 효과도 있었죠. 이 영화에서 가장 어필하기 쉬웠던 인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킬레우스가 그를 죽이고, 마차로 끄는 장면에서, 뒷줄의 여성분들의 "성벽에서 (아킬레우스를) 그냥 화살로 쏘아버리면 되잖아, 왜 안쏴~ 쏴버려"라는 격정적인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신선했던 것은 파리스 역의 올란도 블룸이었습니다. 두 근육남 사이의 철없는 야실야실한 왕자역이 잘 어울렸습니다. 그가 결투를 하기 직전에, '내가 죽으면 헬레네에게 사랑했다고 전해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같이 간 분이 킥킥거리는 바람에 그 뒤에도 파리스가 뭔 말만 하면 자꾸 웃음이 나더라구요. 졸지에 파리스와 헬레네가 제게 코믹커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화살쏘기 장면.. 정말 안떠오를 수가 없더군요. 금발 가발만 쓰면 표정이고 구도고 너무 똑같아서..하하..;
그리고 늙은 피터 오툴을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컴퓨터로 손질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푸른 눈은 여전하더라고요.. 불타는 트로이를 바라보며 절규하는 장면이 특히 좋았어요..
헬레네 는 역시나 기대 이하의 비주얼이었습니다. 짧은 눈썹도 그렇고 안어울리는 스모키 아이즈에 사각얼굴까지, 007의 러시아 애인처럼 생긴 사람을 왜 지중해 최고 미녀로 캐스팅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또, 아쉬웠던 건 숀빈이었습니다. 워낙에 출연 장면도 없는데다가 그의 행동동기에 대한 배경설명이라고는 '우리나라는 약소국이니까'라는 단 한줄의 대사뿐이었잖아요. 그의 오디세우스 캐스팅 소식을 듣고 드디어 숀빈이 왕 역할을 하게되었다고 혼자 흐뭇해했었는데, 왕은 커녕 시다바리역이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일리아드를 압축하려다보니, 장면 장면들이 너무 기능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헬레네같은 경우는, '나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으니 이 쯤에서 한번 괴로워해 줘야지'하는 생각으로 한밤 중에 뛰쳐나갔다가 헥토르가 안아주면서 몇마디 해주자 바로 다시 들어가버렸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에릭바나한테 한번 안겨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끊임없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일 전투에 나가지 마세요'라고 중얼거리면서 방긋방긋 웃는 어린 아들을 보여주는 헥토르의 부인의 역할은 블록버스터의 저승사자죠. "이사람은 가족들 내비두고 무지 불쌍하게 죽을 사람이예요. 그리고 내 역할은 동정심 자극하기라구요." 하고 계속 광고를 하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극중에서 가장 안정된 커플이고 가장 보기가 좋았어요.
하지만 여튼, 저는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쓰다보니 위에는 여러가지 것들에 투덜거렸지만, 보는 내내 거의 황홀경 상태였답니다. 사실 어제 보고 난 직후에 간단한 감상을 써서 올리려고 했지만, 흥분상태가 가시질 않아 지금에서야 자판을 두들깁니다. 에게해의 푸른 파도를 배경으로한 고대 사극이라니..게다가 브래드 피트라니..이 두가지 사실만으로 몇개월을 고대했고, 트로이는 역시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