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책

  • ginger
  •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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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소포가 왔습니다. 한식 요릴 좀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요리책까지 딸려 왔더군요. 근데 그 책이...'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아침부터 재수 없어라.

성별노동분업을 너무 당연시하는 아줌마가 쓴 편지체 요리책이다 보니 몇몇 구절은 공포영화스럽더군요. 분명히 미국 사는 '며느리'들한테 자기 아들 손주 잘 먹이라고 보내준 편지들을 모았다던데, 메주를 띄워라, 간장을 담가라, 묵을 쑤어라, 두부를 만들어라, 제사는 이렇게 지내라(시집오기 전에 너희집에서 제사 잘 지내보아 이미 잘 알겠지만 밀이다란 코멘트가 예술), 혹시 장기로 자리를 비우게 되면 '죄책감 느끼지 말고' 모든 요리를 다 준비해서 냉동실에 넣어놓고 일일메뉴를 냉장고에 붙여놓으면 남편들이 그냥 꺼내서 데워 먹으면 된다...나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필리핀에서 하녀두고 살고, 한국서도 일하는 아주머니를 써다고 하네요...미국에서 메이드 둘 만큼 아들들이 돈을 잘 벌어주는 것 같지도 않고 학생이었다던데.. 자기 아들들을 6,8살부터 미국에 데려다 놓고 공부시켰다면서 종종 굶겨가고 때려가며 한국스타일을 고집해서 기어이 한국며느리를 본 게 흐뭇하다는 아줌마....아들들 버릇 고약하게도 들여놓았군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일에 제 손으로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 인간들이 성인 자격이 있남?

영국에 이민 역사도 길고 숫자도 제법 많은 인도/파키스탄계 사람들이 2,3세대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보니 이사람을 겨냥한 에스닉 프로그램이 좀 있는데요, 그 중에 몇몇은 자기 정체성을 잘 활용하면서도 주류로 안착하는데 성공했죠. 아주 성공한 코메디 프로그램 중에 'Goodness Gracious Me'시리즈가 있었고, 그 팀의 멤버들이 최근까진 'The Kumars'란 토크쇼를 하고 있었어죠.

몇몇 스케치들을 보면서 저도 공감도 많이 느꼈는데, 영국에 나서 자랐으면서도 중매결혼해야하는 괴로움이나, 자기네 특유의 문화와 영국문화 사이에서 느낀 갈등을 웃음으로 풀었죠. 영국사람보다 더 영국적인 속물인 인도계 부부 두 쌍의 서로 더 영국적이고 인종차별적이기 경쟁이나, 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시어머니가 '아들이어야 의사나 변호사를 만들지'하면서 한 발을 들고 동쪽을 향해 몇 바퀴를 돌라면 뱃속의 애가 아들이 된다는 둥의 이야기 하는 장면같은 게 희화화되어서 나옵니다. 그 중에 보면 두 할머니가 만나서 서로 아들 자랑을 하는게 있어요. 서로 이기려고 과장을 하다하다 아주 극단까지 가는게 재밌었는데, 되지 못한 현대적 영국 물이 안 든 아주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현모양처감 며느리를 데려왔다는 걸 서로 자랑하는 장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략 내용이

우리 며느린 펀잡에서 데려왔어
우리 며느린 펀잡에서도 아주 시골에서 왔지
우리 며느린 교통편도 없는 아주 오지에서 왔어
우리 며느린 전기도 수도도 없는 오지 출신이야
우리 며느린 학교도 없는 곳에서 와서 까막눈이야
...


'며느리...'책을 보니 이 스케치가 생각나더군요. 물론 결혼하고 전통적인 성역할분담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도 기쁨과 행복이 많겠고, 맛있는 음식을 해서 가족들과 나누어 먹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없겠죠. 근데 이 책은 너무 노골적으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깔고 있어서 괴롭더군요.


확실히 요리책이나 프로그램은 라이프스타일이 배제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떤 요리사들은 그냥 요리'만' 하든가, 아니면 제이미 올리버 시리즈처럼 착하고 맘 좋은 에섹스 보이의 일상생활을(그 플랫에선 사실 살지도 않았다죠) 보여주던가, 나이젤라 로슨같이 화려한 일하는 엄마의 포쉬 노팅힐을 보여주던가...근데 한국에선 '며느리'운운하는 지독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아직도 팔아먹는단 말입니까? 한국에도 그냥 '요리'하는 법만 가르쳐 주는 요리책도 많을텐데 왜 왜 왜 하필이면 그 친구는 내 머리속에 당장 빨간 불 들어오고, 거슬려할 게 분명한 이 책을 보냈을꼬...

한국에 갔을 때 요리프로그램을 본 적 있는데 무시무시하게 깐깐하게 생긴 아줌마가 옛날 육영수와 이순자, 노태우 부인(이름을 잊었음) 머리 모양을 모두 합친 것 같은 약간 드랙퀸 가발스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한복 입고 앞치마를 딱 두르고는 계란찜을 하더군요. 펄펄 끊는 물에 중탕한 남비를 꺼내면서 옆에서 보조하던 김혜영(인가?) 진행자가 행주를 쓰려고 하자,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이건 찬 물에 손을 좀 담갔다 맨 손으로 꺼내 줄 알아야해요. 그래야 시집살이도 견디지'하면서 자기가 맨손으로 꺼내더군요. 저는 이제까지 본 영화중에 '링'이 젤 무서웠는데 그 아줌마가 비슷하게 무서웠어요. 그 진행자도 충격받아서 잠시 말을 잊었었죠. '그 뜨거운 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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