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시내에 쇼핑 갔다가 레스터스퀘어에서 해리포터 시사회 돌풍에 잠시 휩쓸리고 돌아왔네요. 철망이 쳐져 있고 경찰 통제선이 보이더니 함성이 들리길래, 또 무슨 시사회인가보다...하고 가까이 가봤죠. 저는 해리포터 시사회가 어제인 줄 알았거든요...오데온극장에 거대한 해리 포터 포스터와 함께 디멘터의 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레스터스퀘어 한복판의 작은 공원에는 부풀려진 마지 아주머니 풍선이 둥둥 떠 있었어요. 여기저기 주요 방송국 중계 차량이 와 있고, 4군데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예고편과 인터뷰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보라색으로 칠한 이층버스가 나이트 버스인 척 하면서 간간히 나타나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구요.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통제선 밖에 서서 잠시라도 출연진을 좀 보려고 목을 길게 빼고 서 있고, 몇시간이고 기다리고 있었을 입구 제일 가까이 서 있던 극성맞은 팬들이 비명과 함성을 질러댈 때마다 다들 두리번 거리고 있더군요. 저도 잠시 근처 하겐다스 아이스크림 가게 계단에 비집고 올라가서 발 돋움을 하고 목을 길게 빼고 서 있었습니다. 물론 워낙 사람이 많아 배우들은 그림자도 못 봤구요, 그냥 대형 화면에서 보여주는 예고편하고 인터뷰만 보다 왔지요. 몇몇 아이들이 호그워츠 교복을 입고 뾰족 모자를 쓰고 서 있던 게 생각나는데, 걔들은 소수고 어른들이 훨씬 더 많았어요. 어른들이 더 난리더군요..저도 내일 보러 갈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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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La Mala Educación'을 봤습니다. 여전히 매우 알모도바르스런 과장된 느와르 멜로드라마였지만 이번엔 정말 남자들만 주욱 나오더군요.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구조가 다층적이고 복잡한 편이지만 잘 짜여져 있고, 여전히 모호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성정체성과, 역할 바꾸기, 관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 차고 넘치는 멜로적 감정도 다 들어가 있었어요. 중간에 정말 어처구니 없이 웃기는 장면도 많았죠. 사실 생각해보면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웃었으니까요.
어린이 성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직접적인 폭력은 섬세하게 암시됩니다. 어린 소년 이그나시오를 '사랑'하는 카톨릭 사제가 자기 생일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이 소년에게 자기가 매우 센티멘탈하게 개사한 이탈리아 가곡을 노래하게 하는 장면은 인상 깊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어린 이그나시오를 바라보는 마놀로 신부의 복잡다단한 심정이 잘 전달되는 부분이었죠. 억눌린 관능적인 욕망과 자기가 가르치는 아름다운 소년에 대한 자랑스러움, 소유욕에 가까운 '사랑'과 자기 권력을 이용한 잔인한 통제가 복합되어 있었으니까요. 어린이 성폭력이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남기는 긴 그림자를 이렇게 복합적으로 그린 영화는 드물지 않나 싶어요. 사실적이 아닌 영화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여지가 많았을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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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퍼에서 물건을 사거나 중국 식당에서 주문 하면서 늘 영어 레이블과 메뉴만 봤는데 요즘 한자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중국 사람들 상형 문자를 만드는 논리도 그렇고 말 만드는 게 재밌어서요. 물론 옥편을 좀 뒤지고 공부하고 가니까 무슨 말인지 아주 조금 아는 정도죠.
脆皮燒肉...취약하다 할 때 '취'가 저 脆더군요. 뭘까 했더니 털털한 중국집에 가면 입구에 걸어 놓은, 껍질을 바삭바삭하게 구운 돼지고기 덩어리더라구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자어가 중국에서 좀 다른 맥락으로 쓰이는 걸 수퍼마켓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때마다 저는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거든요....중국어 잘 하시는 분이 들으면 웃으시겠지만...오늘 발견한 건, 고추기름이 辣椒油라는 겁니다. 신랄하다고 할 때 '랄'자를 맵다는 뜻으로 쓰는 모양이죠? 신라면이 아니라 랄라면이라고 해야되나...
중국문명이 워낙 막강하고 오래되어서 주변 나라들은 전부 그 문화의 우산 밑에 있었다는 게 맞긴 맞는 것 같아요. 우리말도 어휘가 조금만 추상적이 되면 거의 전부 한자잖아요. 그리고 한자어 발음이 중국 발음을 최대한 흉내낸 거라서 제가 한자를 읽으면 광동어권 사람들이 그건 만다린 발음이네 하더군요.
어쨌든 말이 다른데 한자로 표현하려면 힘들었겠어요. 정말 저같은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홇베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펴디 못했겠더군요...새로 집권한 왕조 홍보용이었든 뭐든 감사합니다, 세종대왕. 근데 영어권 사람들이 왕년의 문자 라틴어를 알면 어원을 알게 되고 재밌는 것처럼 한자를 많이 알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