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보론 - "무고한 개인"을 바라는 정서에 대해

  • 귤과레몬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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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에 오른 여러 분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김선일씨의 죽음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가 무고하고 결백한 희생자인지는 모르겠다"고 썼습니다.

그가 죽을 법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제 글에 대해 약간의 오독과 함께
'심정적으로' 불편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굳이 죽은 사람 앞에서 죄가 있냐, 없냐..를 말해야하냐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굳이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 앞에 '죄없는' '무고한' '선량한' 등의 수사를 붙여야 하는 걸까요?
혹은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붙이게 하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벌려했던 김선일씨의 개인적 행동이
'죄없고' '무고한' 것으로 (한국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판정되지 않았다면
저도 굳이 그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그의 행위에 대한 판단과 별개이니까요.
그가 어떤 잘못을 했고 어떤 사람이었든지간에
김선일씨는 그렇게 생을 마쳐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파병찬성측에서 그런 수사를 붙이는 것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논리전개상 이해가능합니다.

그러나 파병반대 측에서도 같은, '무고함'을 강조하는 수사를 붙이는 것은
제게는 기묘하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 수사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리고 이 게시판의 여러 님들의 글에서도 확연히 나타나는 것은
어떤 정서입니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판단에 있어서
개인의 책임과 역할을 멜로드라마, 정확히는 신파조로 무화시키는 정서입니다.


"**는 나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책임은 권력자에게 있다. 힘들게 사는 보통사람들은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다." 라는 식의 정서지요.

결국 보통사람/서민은 정치적인 국면에 대한 판단과 행동에 있어서도
면책됩니다. 그냥 열심히 산 것 뿐이니까 다 아무 잘못이 없는 거예요.

모두가 용서받는 거고, 모두가 잘못 없는 게 되는 거죠.
우리는 다 힘없는 대중이고 그저 무고한 피해자입니다.

저는 이런 정서가 심지어 무섭기까지 합니다.

김선일씨의 죽음 앞에 애써
'무고한'이라는 부적절한 수사를 붙여야 되는 정서가,
그 수사 속에서
개인들, 정확히는 대중을 이루고 있는 모두의 개인적인 행동들에 대해
면책권을 주려는 그 국민보편정서가
두렵습니다.

'살다보면 그런거지'라고 노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죽음에 대한 슬픔은 슬픔으로 남기고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으로 남기세요.
하지만 거기에 애써 '무고한'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서

한 개인이 정치적 상황에 대한 판단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약자인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잘못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 같은 상황이라면 나도 그랬을지도" 라는 말이
  그에 대한 동정은 될수 있을지언정
그의 '무고함'에 대한 근거가 결코 될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무고하기 위해서 그도 무고해야 한다는 논리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다국적기업의 지구적 착취에 대해 알고 있어,
그리고 나는 이 군산업체의 부정의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야 하지만 나는 취업난에 허덕이고 있으니까 그곳에 취직하겠어...
그리고 나는 무고한 개인이야'

저는 이런 말이 싫습니다.
'다 알지만, 어떻게 해, 그냥 나 취직할래'라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 저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이해하려 합니다. 다들, 그건 이해해야한다 말하구요.


그렇지만 거기에 덧붙여
"집단으로 있다면 나쁜 행위지만
그 집단에 참여하길 선택한 나 개인은 무고한 사람이야.
 나는 결백하고 잘못없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심리는
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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