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 보름 정도 보스턴에 놀러갔다 왔습니다. 노느라고 바빠서 뉴스 볼 틈도 별로 없었는데, 어느날 아침 보스턴 글로브지에 이라크에서 한국 사람 인질이 잡혀있고 참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저는 전에 일본 인질들처럼 그럭저럭 풀려날 줄 알았는데, 결국 죽이고야 말았다는 뉴스를 보고 누가 심장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평온하고 부유한 보스턴 시내에 앉아 있자니 참 착잡하데요. 정말이지 너무 불공평한데,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으니까요....
돌아와서 한국 웹사이트들을 뒤져보니 이 죽음을 둘러싸고 참 여러가지로 말도 탈도 많았네요. 무고하고 결백한 희생자를 자꾸 들먹이는 것도 재수없는데, 미국이 벌인 전쟁와중에 간 데는 본인한테 책임이 있다는, 냉정한 분석인듯 보이지만 쓸데없는 코멘트까지. 게다 추레하고 남루한 가족사가 돌아다니고....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계모 밑에서 컸으므로 인격적으로 미성숙했을 거라는 무지막지한 추론까지 '여성학'의 이름으로 지껄이는 '학자'가 있다는 겁니다....우와! 김선일씨 그렇게 끔찍하게 죽은 것도 억울할텐데 계모 밑에 자라 인간이 좀 꼬였을거라는 소리까지 듣다니. 호오...우리 집에도 계모 밑에서 구박 많이 받고 큰 사람 하나 있는데, 그사람이 가족 구성원 중에 가장 선하고 평온한 인간인데.
여성학자가 그런 스테레오타입을 그냥 들이밀면서 분석이랍시고 턱 내어 놓고, 게다 줏어 들은 여성학 이론으로 권위까지 얹으려 하다니...용서가 잘 안 되는군요. 여성학적 분석을 하려면 좀 똑똑한 사람이 말이 되게 해야지, 능력이 안 되는 멍청이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설치면서 페미니즘에 민폐를 끼치면 곤란한걸요.
어떤 경우든 개인의 agency에 대해 분석하는 것에 아무 이의가 없습니다만, 이런 죽음에 대해 정치적 의도를 잔뜩 깔고 자꾸 '결백'한 희생자임을 강조하는 것만치나, 미군 납품 업체의 직원으로 이라크에 간 것은 전쟁의 당사자로 참여한 것이며, 돈 벌기 위해 그런 전쟁에 개입한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도 참 대단한 몰취향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지적이 반전이나 파병반대에 큰 도움이라도 됩니까? 자꾸 순교자 그림을 그리려는 기자들이 못마땅했다면 그걸 지적하는데서 그치면 안되나요?
흠...매우 우울하네요. 그래도 파병은 하나부죠? 미국 우파 신문들은 한국 정부를 무슨 좌파정권 쯤 되는 듯이 생각하는 것 같은데, 노무현 억울하겠어요....하나도 안 좌파적인데 그런 소리 들어서. 하긴 조갑제한테 칭찬도 들었으니 이제 그걸 미국이 알아주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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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글로브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을 보았습니다. 전원 여성으로 이루어진 팀이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수염도 붙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남자인 체 하는 것 때문에 가뜩이나 허세스런 남성 캐릭터들이 더 과장되게 허풍스럽게 보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여자 인물들 중에 가장 강력한 비어트리스가 더 돋보이기도 했구요. 이 프로덕션의 비어트리스는 드센 말괄량이 보다도 똑똑하고 재치있는 페미니스트 같더군요. 'There was a star danced, and under it was I born'
북부 억양이 섞인 사랑스럽게 코믹한 베네틱트역을 맡은 배우는 영국 사람들한테는 잘 알려진 코미디언이라더군요. 이 아줌마는 그 코믹 타이밍으로 사람들을 계속 웃겼는데 맨 나중에 '..for man is a giddy thing, and this is my conclusion'란 대사를 여자/남자가 하니까 더 묘한 재미가 있었어요.
사실 이 연극은 비어트리스/베네딕트 커플의 팽팽하고도 신나는 설전과 소란스런 사랑 고백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예전에 처음 희곡을 읽으면서 상상한 것보다도,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버전을 보는 것보다도, 그 살아있는 에너지 때문에 훨씬 더 즐거웠어요.
남자들이 여자역 하는 건 종종 보았지만, 여자가 남자역까지 도맡아 하는 건 처음 보는 거라서 얼마나 그럴 듯하게 남자역을 하나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서서 약 세시간을 버텨야 하는 스탠딩석까지 포함해서 꽉 들어찬 관객들의 반응과 에너지도 너무 좋았습니다. 비도 안 오고 너무 덥지도 않은 초가을날 같은 날씨도 한 몫했죠. 아마 16세기 런던의 한 날 좋은 여름날 글로브에 놀러온 사람들도 이 가벼운 희극을 보고 그날 우리처럼 웃어댔겠지요. 세 시간을 즐겁게 해 준 배우들이 신나게 춤을 추며 마지막을 장식해 주어서 그 날 팔이 떨어지도록 박수를 치다 나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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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론 시차가 있긴 하지만 참 딱하고도 처참한 죽음과 그걸 둘러싼 추레한 잡음에 대해 쓰자마자 전혀 다른 강둑의 낭만적인 소극 얘기를 쓰고 나니 무슨 분열증 환자같군요.
지난 토요일 글로브 극장에서 한 3시간 동안 아무 생각없이 발랄한 대사로 가득찬 코미디를 즐겼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걱정거리나 실망까지 잊게 되진 않겠죠.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조롱과 연민으로 웃는 일 마저도 없다면 어떻게 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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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런던은 게이 프라이드 행진으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역시 어김없이 이안 맥켈런이 하이드파크에 나타나서 개회식 비스무레한 걸 했다는데, 그건 신문과 방송으로 나중에 봤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옥스포드 스트리트도 행진으로 술렁술렁, 저녁 때 소호의 게이바와 펍 앞은 정말 버글버글, 각종 의상을 입은 사람들 때문에 눈도 즐거운 거리였습니다.
올해도 역시 런던 메트로 폴리탄 경찰의 허락을 받고 게이 경찰관들이 수십명 제복을 입고 행진에 참여했다네요. 예전엔 저항의 의미가 강했다는데, 이젠 축제 의미가 더 크다고 하구요.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참 많이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