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청와대, SF 소설을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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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진중권  (2004-07-08 12:43:50, Hit : 1024, Vote : 37)
Subject  
청와대, SF 소설을 써라


어제 KBS 라디오에서 원희룡 의원한테  "파병을 안 하면 미국이 어쩔 건데?"라고 물었더니,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더군요. 재미있는 것은 저들이 파병을 안 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하면서, 정작 그 큰 일이 어떤 것인지는 밝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연애론을 늘어놓더군요. 사랑을 하는 데에는 신뢰가 중요하답니다. 신창원 감싸주다 감옥 간 내연녀의 지고한 사랑이 생각나더군요.  

워낙 궁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청와대에서 드디어 파병의 숨은 이유라는 것을 넌지시 드러냈네요. 내 참, 파병 결정한 노무현 대통령의 숨은 고민이랍니다. 모 연구원의 보고서라는 것을 인터넷에 공개한 모양인데, 그 보고서를 읽고 한숨이 나오더군요. 자, 이쯤에서 저들이 파병을 하기 위해 그 동안 어떻게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 왔는지 살펴 봅시다.

파병 초기에는  이라크  전쟁은 대테러전쟁이며,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얘기했었습니다. 하지만 후세인과 알카이다는 전혀 관계가 없고, 대량살상무기도 발견되지 않았으면, 외려 미국과 영국 내에서 정보를 조작했다는 사실만 드러났지요. 이 논리는 워낙 허접한 거짓말이라서 노무현 정권에서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못했더랬습니다.

둘째는 파병을 안 하면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에 안보불안이 생기고, 그러면 무디스에서 한국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리고, 투자자들이 떠난다고 했었지요. 하지만 미국은 우리의 이라크 파병과 관계없이 예정되어 있던 일부 철군과 한강 이남 배치를 강행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용등급이 내려가거나, 투자자들이 떠나는 일은 없었지요.

세째는 파병을 안 하면 미국이 북폭을 할 것이라는 협박(?)이었습니다. 주로 노빠들이 이런 주장을 했었지요. 이라크를 팔아 북핵 문제를 해결했다나? 하지만 파병을 한 후에도 북한에 대한 미국의 강경대응 태도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북핵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미국의 장기적인 세계전략,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과 연동이 되어 있지, 한국군의 파병과는 실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네째는 경제논리입니다. 앞의 세 개의 논리가 파탄이 나자 파병찬성론자들은 이제 네 번째 카드를 내놓습니다. 한국 경제의 대미 의존도가 높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우리가 파병을 거부하면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긴다. 그러면 무디스에서 신용등급을 낮추고, 투자자들이 떠나고, 미국의 네오콘들이 재계의 네트워크를 움직여 한국 경제 망하기 작전에 돌입할 것이다. 이거 읽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차라리 파병 하면 시퍼런 피를 가진 외계인이 쳐들어와 한국 경제를 교란할 거라고 하세요.

작년이던가요? 재작년이던가요? 북한이 핵확산조약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때 무디스 신용등급, 아무 지장없었습니다. 작년에 미군이 병력의 감축과 한강 이남 배치를 발표했습니다. 무디스 신용등급에 아무 지장 없었습니다. 외려 A 네거티브에서 A 포지티브로 상승했지요. 그 보고서는 경제의 펀더멘틀이 튼튼하기 때문에 지정학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신용에는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신용등급은 올라 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 펀더멘틀이지, 정치-외교적 환경이 아닙니다.

미국은 시장경제를 숭배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슬슬 흘리고 다니는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철저한 전체주의 명령경제, 공산주의 계획경제 국가입니다. 시장이 곧바로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는 식이지요. 그래서 국가에서 "한국이 말을 안 듣는다. 손 좀 봐줘라" 하면, 무디스는 신용등급 하락해주고, 투자자들은 애국적으로 한국에서 자본 빼내간다는 식이지요.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관치경제라고 욕 먹는 한국 내에서도 불가능한 시나리오지요.

과거의 군사독재정권은 툭하면 "북괴가 쳐들어온다"고 했었습니다. 그 공포감을 활용해 시민들의 입을 막고 쉽게 지배를 해올 수 있었지요. 그 공포정치가 이제는 경제학적 버전으로 다시 재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쳐들어온다." 저 보고서가 열심히 조장하고자 하는 미국에 대한 무한한 공포감, 저 보고서를 작성해 퍼뜨리는 자들 자신도 실은 안 믿을 겁니다. 얘들 까졌거든요. (아니, 믿는다면 그땐 더 문제지요.)

저 극도로 과장된 공포감은,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나라 세금이야 나가든 말든, 오직 내 밥벌이는 1cm도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내 자신의 사익은  단 1g도 손해볼 수 없다는 재계의 단호함의 표현이지요. 그래서 파병은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문제이며, 안보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문제인 것입니다. 요것들, 보세요. 아주 거저 먹으려고 하지요? 얘들아, 시나리오를 쓰더라도 좀 그럴 듯하게 써 보세요. 시나리오 그렇게 쓰면 후지다고 충무로에서도 안 받아줘요. 다음에 그런 보고서 쓸 때는 제대로 교육받은 문창과 출신한테 맡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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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과 비슷해서 퍼왔습니다. 파병은 계급의 문제인가, 외교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재미있는 건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 중 몇몇 분들께서 문제의 보고서를 읽고 보이는 반응입니다. 다들 알고 있었을 뿐 쉬쉬하던 문제를 결국 터뜨리고 만 것인데, '민노충'들과 '시민단체'가 하도 난리를 쳐서 어쩔 수 없었던 거라나(프레시안의 기사에 따르면 이 보고서가 공개된 이상 무디스의 반발이 예상된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신뢰성에 흠집을 입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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