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의 질주

  • kurtgirl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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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다 제가 쓴 글을 올려봅니다. 쓰는 이유는... 밑에 어느 분이 마지막 장면 사진을 올린 것에 자극을 받기도 했고, 제가 이 게시판에서 정말 좋은 글들을 많이 읽고 가는데 저 자신은 얌체같이 아무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서요. 제가 가르치는 일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이 영화를 다소 교육학적 관점으로 썼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좀 길고 지루합니다. 대부분은 잘 읽지 않으시겠지만, 단 한 분이라도...저처럼 리버피닉스를 아직까지 사랑하고 계신 분이라면 지루한 글이지만 읽지 않을까 생각해서 올려봅니다. 이해하세요. ^^* 이 글은 순수하게 리버피닉스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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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교육학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을 시도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일텐데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여러 영화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역시 가장 쓰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킨 영화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통해 리버 피닉스라는 연기천재를 사랑하게 되었고 시드니 루멧이라는 사회성 있고 진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처음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허공에의 질주>이다.

먼저 간단히 이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더와 애니 부부는 1971년에 월남전에 크게 공헌한 네이팜탄 연구실을 폭파하여 FBI의 추적을 받는 지명수배자이다. 이들은 당시 미국 정부가 네이팜탄을 월남전에서 전쟁용으로 생산했을 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사용을 하는 사실을 알고 정부에 저항한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그곳을 지키던 SAM이라는 이름의 수위가 실명을 하고 말았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한 일이므로 조금의 후회도 없이 살아가는 부부이다. 도망자로서의 삶을 두 아들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 일은 전쟁을 막고 자식들이 더 나은 미래를 살도록 하기 위한 과업이라 믿었던 것이다.

가족의 생일날 늘 케잌에 크게 'Happy birthday, SAM'이라고 써서 실명한 수위에게 사죄하는 맘으로 생일을 보내기도 한다. 큰아들 대니가 대학에 진학할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문제는 FBI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신분을 바꿔가며 학교를 옮겨다녔던 대니가 학교 음악 선생님에게 천재적인 피아노 솜씨로 깊은 인상을 주면서 시작되었다.

음악 선생님은 대니를 적극적으로 쥴리아드 음대에 추천하였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픈 대니는 쥴리아드에서 부모 몰래 테스트를 받았으며 테스트 결과 쥴리아드 입학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이제 대니와 부모에게는 가슴 아픈 선택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대니가 쥴리아드로 가면 이제 영영 부모와는 이별을 해야 한다. 가끔은 만날 수 있을 거라며 아버지를 설득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FBI에 쫓기며 공항에서 10분씩?"이라고 되묻는다.

결국 대니는 자식과의 생이별을 결코 원하지 않은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부모님과 머물게 되는가 싶더니, 마지막 순간 아버지는 여자친구와 이별을 고하고 돌아와서 자전거를 차에 싣는 대니에게 "네 자전거 도로 내려놔"라고 말한다.

그토록 원했던 쥴리아드였건만 그 순간 대니는 가족과 함께 가겠다며 눈물을 흘린다. 막상 부모님과 영이별을 하려니 또 가슴이 무너진 것이다. 쥴리아드와 가족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대니는 결국 부모님의 가슴 아픈 이해와 배려와 설득으로 인해 남게 되었고, 홀로 남겨진 대니의 주변을 부모님이 탄 트럭이 원을 그리며 돌다가 떠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1. 외재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

  "선생이 너보다 모를걸"
FBI의 추적을 피해 '마이클'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또다시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한 대니에게 아버지 아더가 처음으로 한 말이다. 아더와 애니 부부는 두 아들의 교육을 학교에만 전적으로 맡길 수 없는 처지다. 정부에 쫓기는 도망자로서 정착할 만하면 떠나야 하고 또 머물 만하면 짐을 싸야 하는 상황에서 학교 교육에만 자식을 맡길 수는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피아노 레슨과 학과공부를 비롯한 전반적인 자식 교육을 가정에서 부모가 직접 한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

좌파적 성향이 강한 아더는 자신의 생각/신념을 그대로 실천해 나가는 이상주의자이다. 그는 정부에 쫓길 때마다 바뀌는 직장에서 노조를 만들어 노조위원장으로 활약하곤 한다.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무지한 그들의 생각을 일깨우고자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대니의 음악선생처럼 부유한 사람을 '부르주아'라고 비아냥거리며 경멸한다. 음악교사가 지역 유지들을 주축으로 주최하는 클래식 연주회에 초대받은 아들에게 아더는 클래식 연주회는 백인 특권층의 상징이라면서 가지 말라고 한다.

음악회에 가겠다며 반항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아버지에게 그럴 수 있느냐며 몹시 화를 낸다.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요? 권위에 도전하랬잖아요!"

이 부분에서 '교육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겉으로 주장하고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나 삶의 태도만을 배우는게 아니다. 아들이 부모로부터 배운 것은 '천민 자본주의'에 도전해야 한다는 특정한 신념 즉, 외재적 교육과정 뿐만이 아니라, 권위에 도전하면서 사는 부모의 삶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라는 또다른 권위에도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잠재적 교육과정의 효력이 절묘하게 정곡을 찔렀고, 아버지는 너무 늦게 그걸 깨닫는다. 이건 아버지가 기대했던 교육효과는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식탁에서건 마당에서건 천민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강조하면서 자식들도 자신처럼 살기를 바랬으니까 말이다.

아들이 신념을 위해 투쟁하는 것보다, 음악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고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귀고 그들과 어울리는걸 더 좋아하는 소년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음은 물론이다. 아버지의 삶 자체는 권위에 대한 도전과 보수적인 지배계층 구조를 깨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데 헌신하는 삶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역시 아들에 대해 자신의 신념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다소 파쇼적인 모습을 보면서 모순 없는 삶이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상적 세상을 꿈꾸면서도 정작 아들의 꿈과 고뇌와 아들이 진정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아버지를 보며, 우리의 삶이 얼마나 거대한 모순덩어리이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더불어 깨닫게 되었다.

2. 세계간의 갈등

① 세속계적 가치 VS 수도계적 가치

아더와 애니 부부는 높은 교육을 받은 계층에 속한다. 특히 엄마 애니는 유명한 음악가인 어머니와 과학자인 아버지를 둔 상류층으로 과거 쥴리아드 음대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말하자면, 맘만 먹으면 호화롭고 화사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녀는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전쟁을 막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항에 싸우는 '정의로운' 삶을 선택했다. 영화 속에서 이들이 살아나가는 방식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보통 우리는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삶에서 실천해나가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그걸 해나간다.

애니는 상류층 부모에게 '아버지는 제국주의의 돼지이고, 전쟁과 빈곤과 인종차별의 원흉'이라고 비난하는 소녀였고, 그 비난은 어린 날의 치기 어린 반항이 아니라 온 삶을 살아내는 추동력이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내던져 버리고, 가난하고 누추한 삶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신념을 한 순간의 후회와 망설임도 없이 실현시켜 나간다. 바로 아들이 쥴리아드 음대 입학허가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니의 음악선생으로부터 대니가 쥴리아드에서 테스트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애니는 충격을 받는다. 비록 삶이 누추하고 고달프긴 해도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데 대해 항상 자긍심 넘쳤고 만족스러워했던 그녀는 그들 부부의 삶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나 깨닫고 처음으로 후회와 회의에 빠진다.

이런 회의감은 도망자 신세에 지친 순수했던 옛 동지가 이들 부부에게 찾아와 자신은 은행강도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심화된다. 이들 부부처럼 이상론자였던 그는 이들의 초라한 삶을 둘러보고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정상적인 가족이군." 애니가 바로 답한다. "거짓 인생이죠."

이 영화가 감동적인 지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비록 감독 '시드니 루멧'이 영화 속 아더와 애니 부부처럼 좌파에 이상주의자일지라도 영화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들의 삶을 영웅시하지도 않고 이들이 고난을 거쳐 커다란 성취를 거둔다는 얄팍한 해피엔딩을 만들지도 않는다.

이 영화가 정말로 나를 울리는 이유는 아무리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를 위해 우리의 삶을 정진해나간다 해도, 우리의 곁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선택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고통당하는 대니와 같은 존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좌파적 성향을 띤 영화들이 빠지는 함정 - 값싼 영웅주의와 과격한 이데올로기 편향성-에 기특하게도 이 영화는 걸려들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실천해나가는 대단히 바람직한 삶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늘이다.

조금 어려운 말로 바꾸면 수도계적인 가치와 세속계적 가치 사이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이리라. 세속계적 가치를 포기하고 인생의 진리를 추구하는 고난의 길을 택한 주인공들이, 쉽고 단순하게 두 세계 사이의 화해를 성취하는 쉬운 휴먼드라마를 그럴 듯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흔하고 흔한 재능 없는 감독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용감하게도 자신의 사상에(혹은 삶에) 내재하는 근원적인 모순을(자본주의의 모순이 아닌!) 솔직하게 응시하였고 바로 이 존재의 그늘을 이 영화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잡아내 공감을 자아낸다.

② 교육 본위 삶의 허와 실

이 영화만큼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적 행위가 많이 일어나는 영화도 흔치 않을 것이다. 혁명가적 삶을 사는 대니의 부모(특히 아버지 아더)는 자식들에게 시종일관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르친다. 예컨대, FBI를 피해 거처를 옮긴 첫 날 간단한 저녁거리로 햄버거를 사온 아더가 이렇게 말한다. "먹을 거라곤 모두 공해식품 뿐이군" 또 직업을 구했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이 자본주의 소굴에서 당신은 뭘 맡았소?"라고 되묻는다.

아더는 교육을 세속적 성공의 도구로 파악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신념들을 그야말로 '가르치지 않고는 못 배겨서' 가르칠 뿐이다. 아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대신 평소 자신의 소신대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시험공부 하라고 닦달하지는 않지만 늘 장작패기나 청소 등을 시키면서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 가르친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가 가끔 "저 사람 아빠 맞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들의 미래에 대해 '보통의' 부모들이 하는 식으로 철저한 대비를 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들었던 생소함이 바로 여기서 기인했던 것 같다. 교육이라 함은 자고로 미래 이 사회에서 세속적 출세를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무의식적인, 그러나 합의된 명제가 흔들려서이리라.

아더야말로 교육을 세속적 출세나 자기수양의 개념을 넘어 교육 그 자체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교육본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니가 결국 부모 곁을 떠나 자신의 꿈/세속적 성공을 찾아 떠나는 장면에서 이러한 교육본위의 삶이 현실과 얼마나 유리되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③ 세속적 성공의 수단으로서의 교육

대니의 어머니 애니는 피아니스트로 화려하게 살수 있는 삶을 포기하고 혁명가로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소리가 나지도 않는 휴대용 작은 건반으로 어릴 적부터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왔다. 음악가 집안의 유전자 덕분인지 대니는 탁월한 피아노 실력으로 학교에서 음악선생을 감동시키고, 쥴리아드에 합격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그녀는 대니에게 피아노를 그토록 열성적으로 가르쳤을까?

이 영화에서 외곬수인 아더와 달리 애니는 아들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고 아들의 꿈을 소중히 생각하는 온화한 캐릭터이다. 쥴리아드에서 테스트하던 교수들이 대니가 유명한 교수들에게 사사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매우 놀란 것을 보면, 아마도 그녀는 아들에게 무척 혹독하게 피아노 연습을 시켰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그녀의 무의식을 분석해 보면, 자신이 포기한 그 길을 아들은 성취해내길 바랬을 것이다. 여기서 아더와 애니의 차이점은 분명해 보인다. 아더가 자식을 교육시킨 건 그야말로 '아무 사심도 없이' 가르칠 수밖에 없어서 가르친 것이라면, 애니의 의식 깊숙한 곳에는 아들의 세속적 성취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음악선생으로부터 대니가 쥴리아드 테스트를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고 보인 애니의 인상적인 반응 - 선생님 앞에서 꾹 참고 있던 울음을 카페테리아를 벗어나 정신없이 달려가다 멈춰서 쏟아낸다. 후에 집에 돌아와 피아노 앞에서 연주하는 아들을 뒤에서 안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 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FBI의 감시를 피해 변두리 카페테리아에서 20여년 만에 친정아버지를 만나 아들을 부탁하는 애니에게 친정아버지는 말한다. "네가 이렇게 대니를 다시 네가 버렸던 인생으로 돌려보내려 하다니."

모순적이게도 애니는 자신이 포기했던 '화려하고 성공적인 삶' 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떠나보낸다. 물론 그 수단은 자신이 시킨 열성적인 음악교육이었다.

④ 교육본위의 삶 VS 세속적 성공의 수단으로서의 교육

애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설득해서 대니를 쥴리아드에 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아더는 자신들이 20여년 동안 싸워온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자신이 가르친 것과 정반대의 길을 가려는 아들에게 무척 실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심정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는 교육본위의 삶을 실천해 나가는 아더가 아니라, 아들의 성공과 꿈을 지지하는 애니이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 영화를 보는 주체인 나 스스로가 교육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교육을 성공과 출세의 수단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건 무의식의 이야기다. 의식의 차원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도 의식적으론 교육본위의 삶이 더 가치롭다고 여겨왔으니까.

애니가 말한다. "애들 큰 뒤의 일을 생각 못하다니 바보였어요." 아더가 대답한다.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리 아이들을 보라구. 우리가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의젓하고 다정하고 똑똑하고..."

'잘 가르친다'는 기준 자체가 아더와 애니는 다른 것이다. 물론 교육의 본질에 충실해서 사고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더이다. 전에는 아더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며 아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지만, 지금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시스템이,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교육본위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가를 아프게 인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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