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살 때부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미끄럼틀을 타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계단 내려갈 때 난간을 부여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육교를 건너면서 멀미를 하고,
엘리베이터 탈 땐 유리 쪽에 등을 돌리고 타죠.
놀이기구 타는 건 불가능하구요.
너무 오래 같이 살아와서 이제는 당연한 부분이 되어 버렸는데,
그 느낌은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떨어질까봐 무서웠던 것 같아요.
떨어진 후 다치고, 피를 흘리고, 그래서 아플 거라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 후 균형을 잡을 자신이 없었던 거죠.
굉장히 형편없는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떨어지고 싶을까봐 무서운 거 같아요.
며칠 전 어머니께 굉장히 꾸중을 들었는데,
발단이나 내용은 늘 있는 사소한 일이었어요.
문제는 저희 어머니께서 화가 나서 말을 하다보면 지나치게 격해지신다는 부분이었죠.
사람이 화가 나서 말을 하다 보면 말이 지나쳐 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보통은 그러다가 멈추잖아요.
그걸 못하세요, 어머니께서.
그리고 꼭 한두 시간 뒤에 후회하시면서 제 눈치를 보시죠.
제대로 사과는 못하시고 슬쩍 눈치 보다가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세요.
(전형적인 무뚝뚝한 경상도 아주머니시랍니다. 아버지는 애교있는 전라도 분이시구요;)
몇십 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늘 겪었으니,
오늘도 또구나 생각하면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못할 소리 하시는 것도 아니고, 제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딸인 것도 사실이니
드릴 말씀도 없고,
그 험한 소리 세세히 들어 보았자 제 마음만 상할 게 뻔했으니까요.
그런데 삼십 분이 넘게 계속되면서 결국 나가 죽어라 소리까지 들리니까
왜그리 베란다 창문 밖이 유혹적이던지요;;;
난생 처음으로 14층으로 이사온 후 몇번 근처에도 못가본 베란다 창을 열고
철봉처럼 생긴 봉밖으로 몸을 내밀면 너무 편해질 거 같은 생각이 너무 강렬해서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했습니다.
<어이, 당신. 다음달 카드값은 메꿔야지. 그리고 그 수많은 개인적인 메모들과
수상한 물건들 그냥 두고 갈 자신있어? 가는 건 좋은데, 최소한 정리는 해놔야지.>
라고 스스로를 추스린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충동을 억누르는데 쓸만한 게 카드값 정도 밖에 없다는 게 좀 슬프긴 했지만,
약발이 들었으니 다행이지요.
지금에야 바보같았다고 웃을 수 있지만 그 순간에는 너무 유혹적이었거든요.
높은 곳에서 떨어져 버리고 싶다는 그 충동은 단지 자살충동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추락에 대한
유혹인 것 같습니다.
최근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보면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발이 앞으로 나가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의자에 앉아 있으려고 하거든요.
일단 지하철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떨어져 보았자 제 엉덩이만 아플 뿐일 텐데 말이죠.
정신을 차리면 깜짝 놀라지만, 마치 하멜의 피리소리에 취한 것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를 쳐다 봅니다.
말을 멈출 수 없는 게 어머니의 나쁜 습관인 것처럼
신경이 끊기면 충동에 몸을 맡기는 것은 제 나쁜 습관이에요.
그래서 조금 무서워 졌습니다.
뭐, 끔찍하게 자기보호본능이 강하고 고통에 민감하니 제 몸 아플 짓은 죽어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으니 다행이지만요. 고작해야 비싼 공연표 사들고 울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