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난 한국(한국인)이 싫어?

  • ginger
  • 08-15
  • 2,027 회
  • 0 건
어느 특정한 나라, 사회 혹은 집단에 대해 얘기 하다보면 항상 일반화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겠죠. 스테레오타입은 편견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아주 높고요..

조금 더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한국이 (혹은 어느 나라가) 싫다'란 말처럼 의미가 모호하고 맥락에 좌우되는 말도 드문 것 같군요. 그냥 한국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비이성적인 일들이 싫은데 대한 pejorative일수도, 정말 편견에 차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것일 수도, 한국이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사항이 담긴 역설일 수도 있으니까요.


외국에서 한국사람이 한국 사람 만나면 피하는 경우는...저도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종종 그러는걸요. 같은 나라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무조건 모여서 제가 한국서 제일 싫어했던 관습을 되풀이 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나이나 성별 학벌로 위계도 따지고 권위주의로 가득찬데다 거의 초면에 호적등본 등재 사항 파악하고 사생활에 훈계를 늘어놓는 경우라면 당연히 피하겠죠. 그리고 한인교회 나오란 강요도요.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expatriate 문화처럼 따분한게 어딨습니까.



국적이 다른 제친구들이 모이면, 다들 자기네 사회에 대해서 한 비판 하는터라 영국애는 영국이, 프랑스애는 프랑스가, 그리이스애는 그리이스를, 저는 한국을 언급하면서 모두들 '이래서 싫다니까' 하는 분위기가 됩니다.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여전히 감정적/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니까요. 그러다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안 그런 나라 있으면 말해봐'하면서 서로 낄낄 거리고 말죠. 또다른 측면도 있는데, 전 식민지 관계가 되면 또 다릅니다. 파키스탄 친구 하나가 영국애한테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을 강렬하게 욕하면 영국애가 진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맞어 맞어 진짜 나쁜 놈들이야. 절대 옹호할 생각이 없어.'하는 걸 보기도 했죠...


`양키 왕따` 분위기에서 고민하는 미국 친구는...자기 나라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역시 구분없이 어디서나 '멍청한 미국인'으로 분류되는 게 괴롭다고 하더군요. 제가 '니 잘못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 친구는 '아마 부시 따위의 당선을 그냥 손 놓고 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모양이야'라던게 생각나는군요.


동유럽 출신 유대인에게 보여주는 독일인의 반응과 한국사람에게 보여주는 일본 사람의 반응이 아주 다른 경우를 발견하고 흥미로왔어요. 그 사회에서 과거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후세대를 어떻게 가르치나가 그대로 드러났거든요. 독일 젊은이들은 아직도 나찌가 깊은 상처인데 비해서 일본 젊은이들은 자기네 제국주의에 아무 개념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2차 세계 대전 때 남경학살같은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 해도 '왜 우리 할아버지 때 일을 들먹여, 날더러 어떻하라고 난리야' 하는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든가, 한국사람들은 이상한 컴플렉스가 있다는 식으로(하긴 열혈 '애국 애족' 청년들이 오바를 하는 경향도 있긴 하지만) 피하거나, 자기는 학교에서 안 배워서 몰랐다고 넘겨버리거나 말이죠. 그렇다고 쿨하게 `일본이 그랬지`하지도 못해요. 일본의 체제순응적 집단문화가 너무 숨막혀서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까지도 말이죠. 아, 물론 이건 제 제한된 경험에 불과합니다.


제가 베트남에서 유학온 사람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 친구가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이사람이 자기 경험에 비추어 '한국사람들은' 이라고 얘기 했을 때 저는 '모든' 한국 사람이 그렇지 않다면서 굳이 고쳐줄 생각을 하거나 '나도 한국출신인데 불편하군'이란 생각이 전혀 들질 않았습니다. 그냥 입 다물고 동의 했죠. 마저, 우리나라 그런 데가 있어. 베트남전쟁 때는 정말 나쁜 짓 많이 했더군.


반면에 저번에 한국에 갔을 때 친척 아저씨가 '조선족들은 거짓말 장이이고, 게으르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할 일을 빼앗아 돈을 전부 중국으로 빼돌린다'라고 했을 때, 또 바로 그 사람이 '전라도 놈들은 --'했을 때 저는 그 폭력성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더군요. 이 사람은 자기의 단언이 다 경험에서 나온 거라면서 '겪어 보면 안다'고 하대요.


이 두 경우가 왜 다른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말했느냐와, 언급의 대상이 되는 집단이 가지는 권력에 따라 다른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힘없고 가난한 집단이나 국가 혹은 소수자들한테 드러나는 부정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그걸 차별받아 마땅한 '원인'으로 돌리는 건 정말 폭력적이죠.

반면에 어떤 집단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경우 드러나는 차별적 현상을 관찰하고 그 원인이 권력의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그럴 때 '일반화'를 들먹이며 그런 지적을 침묵시키려는 건 기득권 보호 작용을 하게 되죠.


1. 미국의 흑인들은 게으르고 무능하다 - 고로 가난하고 못살며 차별 받아 싸다
2. 미국의 백인들은, 혹은 미국은 인종차별적 성향을 보인다 - '내가 언제? 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야?'


저도 물론 2번과 같은 단순하게 묶은 문장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제한적이지요. 미국이, 한국이, 영국이, 흑인이, 혹은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절대 단일하고 균일한 집단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번과 같은 문장이 나오는 경우는 정치적으로 유용하거나, 맥락상 한 사회나 집단에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는 걸 나타낼 때 쓰게 되겠죠.


물론 이런 두 극 사이에는 보다 경계가 모호하고, 권력관계가 한 방향으로 뚜렷하거나 고르지 않은 경우들이 스펙트럼으로 있겠지요. 항상 위험은 도사리고 있고, 그럴 수록 맥락에 주의해야 되겠지요. 그건 화자뿐아니라 수용자에게도 적용됩니다.

한국의 성차별적 현상을 지적하는 발언이 불편한 수용자가 그 발언을 한국이 싫은 사대주의 혹은 극단적 일반화로 둔갑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자기가 익숙한 습관에 한번도 의문을 제기 하지 않는 기존의 편한 상태로 머물려 있으려는 저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시판2004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324 남편, 파리에서 지진이 나 다 죽어버리길 빌다. -_-;; 휘오나 2,255 08-15
3323 으아아악! compos mentis 2,134 08-15
3322 올림픽 유감 -_- 하얀새틴 1,217 08-15
3321 음악 두 곡 브로디 518 08-15
3320 하루가 안지났는데 트래픽 창이 떴다가 풀렸네요.. 도야지 626 08-15
3319 궁금한 것 유성관 1,175 08-15
3318 [장화, 홍련] UK 트레일러 Mari 893 08-15
3317 논쟁을 하다보면 자기합리화가 강해지는게 느껴져요.. 도야지 1,158 08-15
3316 BBC 장화 홍련 살인의 추억 폰 비평 (별점 평가에 직접 참가할 수도 있어요.) 그냥 1,126 08-15
3315 착한 아들 컴플렉스. ethan 1,198 08-15
열람 [re] 난 한국(한국인)이 싫어? ginger 2,028 08-15
3313 바바리맨 제제벨 1,296 08-15
3312 이혼에 대해 궁금한 것 샹난 980 08-15
3311 접속무비월드 코너에서...(질문입니다.) Aem 894 08-15
3310 영화 '빨간풍선' 보신분들.... dinah 923 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