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한 뉴스를 접했다. 파리의 연인에 대한 뉴스였는데 네티즌들이 엔딩에 대해서 분노하며 바꾸라고 하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처음에 그 글을 보고는 네티즌들에 대한 한숨이 나왔다. 소설을 쓰는 내가 다짐한 내용이 있다면 '소설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상관을 미치는 독자의 말은 일체 무시한다. 어떤 것이 더 재밋는가 하는 설문조사는 일체 하지 않는다.'였다. 말하자면 독자에게 좌지우지 되지 않고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을 쓰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글을 쓴 결과 나는 조회수가 바닥을 치지만 내 글에 대한 만족도도 높고 조회수 비 추천수도 높은 편이다. 요즈음 판타지 소설에서는 죽은 캐릭터들이 독자들에 의해서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렇게 독자들의 요구에 의해 조금씩 수정되어버린 글은 설정조차 꼬이고 플롯조차 꼬인다. 그렇게 꼬아가면서 글을 쓰기 위해선 평평한 구성이 필요하달까. 사실 글의 구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구성이 탄탄한 플롯형 소설도 있고 내면의 변화를 다룬 스토리형 소설도 있다. 그러나 스토리형 소설 역시 독자들의 요구에 의해 글을 수정하게 되면 꼬여버린다. 그런 것쯤이야 왠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독자가 원하는데로 흘러가는 이야기.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보고 있는 독자들에겐 재미가 있겠지만, 자신의 바램대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그 스토리를 처음부터 보고 있는 사람에겐 재미가 있겠지만 그렇게 쓰여진 스토리를 새로 읽는 사람에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설사 재미가 있더라도 '아, 재밌었다.'정도의 불과할 재미. 시나리오 작가든 소설작가든 시인이든 어떤 글을 쓰는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 생계와 연결이 되면 죽어버리기도 쉬운게 작가의 생각이지만 작가가 글을 쓰면 어떤 것을 써야지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런 생각을 독자가 원하는 대로 바꾸는 것은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다. 작가가 애초에 하고 싶은 말을 왜곡하거나 지워버리고 독자가 원하는 것을 쓰게 된다면 대체 글을 왜 쓰는가? 작가가 애초에 추구하고자 했던 것, 그것이 설사 재미라 하더라도 작가가 원한 재미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왜 바꾸는가! 물론, 독자(시청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는 있다. 독자(시청자)의 말은 작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줏대 없이 '독자가 이걸 더 좋아하니까 바꿔야겠다. 인기 끌어야지.'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수정을 하더라도 '아무래도 내가 적어놓은 이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수정하는 것이 좋겠다.'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이 다시 글을 적는 것은 좋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독자가 좋아하니까'란 이유로 글의 내용을 바꾸는 것은 멍청한 짓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다시 파리의 연인으로 돌아오자. 파리의 연인 작가측이 밝혔던 엔딩은 이랬다. '파리의 연인의 이야기는 태영의 상상--혹은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파리의 연인을 보지 않는 나이지만 순간 황당해짐을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떠오른 한 단어. '구운몽.' 그렇다 구운몽식 엔딩이었다. 작가측은 참신하고 기발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전혀 참신하지 않은 엔딩이다. 말하자면 '금단의 엔딩'이랄까. 누구나 알고 있지만 차마 쓰지 못하는 엔딩. 솔직히 어지간해선 소화하기 힘든 엔딩. 그것이었다. 그나마 구운몽의 경우에는 '꿈'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았는가. 제목도 그렇고 발단 부분도 그렇다. 그러나 파리의 연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파리의 연인 시청자들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기대하고 또 만족하며 시청 해 온 것이다. 그런 시청자들에게 '시나리오에 불과 했다.'라는 것을 내놓고 '참신한 엔딩이지?'라고 하는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 아닐까 싶다. 구운몽의 주제는 '인생무상'이다. 그렇다면 파리의 연인 엔딩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대리만족하던 시청자에게 '꿈 깨라. 소설 내용이었다.' 인가!.......라고 외치려다가 살펴보니 '기주와 태영이 시나리오 속에서처럼 현실에서 차를 타고 같이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또 다른 암시다.'라고 작가가 부연설명한게 보였다. 이 이야기는 소설 속의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것 역시 참신하지도 효과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고 기법적으로 서투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 다른 신문기사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발견했다. 타이핑 하기 귀찮다는 이유가 아닌 보다 정확하고 신빙성 있도록 원문에서 발췌하였다.
'한기주와 강태영이 한국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2년이 지난후에 파리의 분수공원에서 재회, 사랑의 결실을 맺게되는 것이 그동안 보아왔던 '파리의 연인'의 1차 결말.
이 1차 결말이 끝난 후 진짜 '현실'로 돌아와 그동안의 내용들이 아이스쇼 공연장 매표소 점원인 강태영의 소설속 이야기였다는 사실이 공개되는 것.
현실속에서는 강태영의 친구 양미(조은지)는 선글라스 좌판상을 하고 있으며, 항상 속을 썩이던 필보(성동일)는 유명한 영화감독으로, 소설속에서 한기주의 전 아내인 승경(김서형)과 부부사이며, 한기주를 보필하던 비서 승준(윤영준)은 최고 인기 영화배우.
그리고 윤수혁과 한기주는 강태영 소설속에서는 가상의 인물이었으나, 마지막에 강태영이 친구 양미의 좌판을 봐주다 윤수혁이 탄 오토바이와 한기주가 탄 자동차가 좌판을 덮쳐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처리가 되는데, 여기에 강태영의 소설속 이야기처럼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사이라는게 드러나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채 끝이 나게 됩니다. '
그렇다. 이 것을 보고서야 나는 안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 봐도 참신하진 않지만(구운몽 식은 꺼리는 엔딩이지만 엔딩과 발단이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것은 굉장히 많이 쓰이는 기법이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가능성 이상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전염에는 오히려 1차 엔딩만 내는 것보다 더 좋은 효과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암시적인 효과는 사람에 따라서 꽤나 많이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원래 드라마라는 것이 문학성 높은 문화가 아니다. 똑같이 작가지만 드라마 작가는 작가들에게 무시당하는 존재이고 작품보다는 돈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직업이다. 실제로 돈을 많이 벌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내가 드라마를 우습게 보는 점도 있고 하여 생각하기로 '작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시청자가 만족하면 끝'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가 자신의 엔딩을 좀 더 시청자들이 혼란 없이 받아들이도록 다듬길 바란다. 수정이 아니라 다듬는 작업 말이다. 그것이 작가 자신에게도, 시청자에게도, 그리고 그 시청자에게 좋지 않은 눈길을 보이는 또다른 네티즌들에게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라고하며 끝내고 싶지만 내 생각엔 언론들에 대해서 독설을 해야겠다 싶다. 언론은 제발 정확하고 독자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 정보를 주었으면 한다. 주관적인 언론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 반만 긍정적, 그러니까 '적당한 주관이라면 오히려 좋다'라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 주관적인 기사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인 기사'는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위에서 발췌한 기사 정도의 기사만 써서 인터넷에 나돌았어도 이렇게 반응이 심각하진 않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저 '기주와 태영이 시나리오 속에서처럼 현실에서 차를 타고 같이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또 다른 암시다.'라는 부분만 기사에 적어 놓았으니 그 글을 읽는 파리의 연인 시청자들로선 '허무감'만을 느끼게 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여기저기 퍼져있는 기사는 위의 내가 발췌한 기사가 아니라 짧은 그리고 '허무감만 느끼게 하는' 기사였다. 나도 오늘에서야 내가 발췌한 그 기사를 본 것이고 그 사이에 '허무감 느끼게 하는 기사'는 여러번 봤으므로 장담 할 수 있다.
얼마전 동방신기의 교통사고 사건에서 '김모씨'에 대해 짧게 축약하고 넘어가는 언론에 대한 분노가 채 식기도 전에 언론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놀렸다. 언론이야말로 이번 사건에 있어서 반성하고 수정해야 할 당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