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제 방에서 채널을 맞춰놓고 간식, 음료수, 중간 광고시간동안 볼 잡지, 갈고 닦은 리모컨등등을 셋팅하여 대기했지요. 그런데 막상 오프닝이 나오니 이걸 혼자 볼 수 있을라나 살짝 겁이 나더군요. 비만 안왔어도...
그래서 재빨리 먹을거에 배게랑 제 이불을 챙겨서 할머니방(!)에 달려가 tv를 켰답니다. 누군가 같이 볼 사람이 필요했는데, 새벽 한시가 넘었으니 식구들이 깨어있을리 만무했죠. 그러니 부모님방 패스, 혼자는 안되니 여행간 동생방 패스, 응접실 패스... 주무시는데 죄송했지만 할머니 방으로 낙찰!
제가 들어가 tv를 켜니 잠에서 깨신 할머니께서 "이 시간에 안자고 무슨 일이니? 내일 회사 안가니?" 하시기에,
"할머니, 이게 너무 보고싶은데 제 방에서 혼자 보기 너무 무서워서요. 이거만 보고 잘게요"라고 말씀드리고 봤지요.
한참 중반부 넘어서면서 무서워지려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졸리운 투의 할머니 말씀이 들렸어요.
"안보면 꺼라."
"아녜요. 저 안자고 있었어요. 보고 있는데요."
"화면에 아무것도 없는데 뭘 본다는 거니"
"......!"
아아악! 순간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제 눈엔 화면에서 멀쩡히 드라마가 보이는데...! 저희 할머니께서 비몽사몽간이셔서 화면이 안보이셨대요. 그래도 그렇지.
2.
어제 출근했더니 한 여사원 모니터에 이상한 옛날 서양 남자 초상화같은게 깔려 있더라고요. 그게 뭔가요 라고 물었더니, 일요일에 mbc에서 방영한 <서프라이즈>라는 재연 이야기 프로에 나온 "우루소프"왕세자라면서, 1800년대 러시아 사람인 그 남자는 상당한 로맨티스트였는데 왕실 하녀와 연애결혼했대요. 선상 결혼식때 그들의 결혼반지가 흑해에 빠졌는데 당시 미신에 의해 그런 경우 신부가 불행해질거라 소문이 돌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이 왕자님이 신부를 안심시키기 위해 흑해 연안을 다 사버리고 그 소유권을 신부명의로 해서 즉, "반지가 빠진 흑해가 당신 것이니 당신은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고 말하는 부분이지요.
이런 왕자님이 너무 좋았다는, 잔뜩 흥분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여직원이 어찌나 귀엽던지요. 저같으면 왕자님의 국가 재정 걱정이 먼저였을거 같은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데 돈쓰지 마세요"라고요.
하지만 굳이 <파리의 연인>을 말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기분을 잠시라도 줄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 로맨스에 목숨걸만 하지요.
3.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예전에 이 게시판 성격에 안어울리는 연애고민 비슷한 걸 올렸던 적이 있어요. 스물아홉 되도록 한번도 연애를 못해봤다. 그래서 올해는 무조건 연애만 하기로 마음먹었다.(이것은 남자를 사귀는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 그런데 첫소개로 뵌 분이 저는 마음이 안가는데 조건이 너무 좋아서 어른들이 권하신다. 그런데 그 분이 너무 적극적이셔서 힘들다... 뭐 이런 거였는데요.
전 그 분과 정리하고 그동안 세 분을 더 뵈었어요. 두번째, 세번째 분들은 저와 처음부터 안맞으셨지요.
그리고 뵙게 된 네번째 분이 말씀을 나눠보니 좋더군요. 외부적 조건은 앞서 뵌 세 분들 보다 약간 안좋아 저희 집에서는 그리 반겨하지는 않으셨지만, 다소 소심하긴 해도 저와 생각도 비슷하시고 잘 통하는 듯하여... 그래서 한 달이 조금 넘게 사귀어봤답니다. 참 즐거웠지요. 그 분께서 나이가 좀 있으셔서인지 그 쪽 집안에서 결혼을 서두르시는게 좀 걸렸지만요.
그런데 이 분이 성격상 절 외롭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시다는 걸 깨닫고 사흘 전쯤에 제가 끝내자 말씀드렸어요. 제가 그 분의 그런 점들에 대해 실망하거나 화가 난 건 아니었어요.
단지 저때문에 그 분이 본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면서 까지 살게 하기는 싫어서 그랬거든요. 이 분께서는 그에 순순히 동의하셨지만 좋았던 기억들때문에 미련이 남으시는지 계속 연락하시네요. 전 아직 이 분과 웃으며 말씀 나눌 마음이 안되어 일단 응하지 않고 있어요.
전 지금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못견디겠어요. 전화라도 하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요. 그 분이 식사는 제대로 하실런지 잠은 편히 주무시는지 너무 걱정되고요. 친구는 걱정말라며 너보다 더 잘먹고 잘살거라고 하지만 전 정말 마음이 너무 안좋아요. 제 욕심때문에 끝났으니 부디 그 분이 좋은 분 만나서 행복하시기만 바라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일때문에 요며칠 우울해져 있었지만 맛난 스테이크먹으니 좀 나아졌고 사흘이 지난 오늘은 섹시한 싱글남 클라이언트를 보고 잠시나마 즐거워했으니 저, 아직 그 분 "사랑"한 건 아니겠지요? 이런 건 그냥 연민같은거겠지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