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와 취향.
이건 굉장히 민감한 주제고, 더 좋은 얘기를 해주실 분들이 많음을 알기에, 굳이 제가 이런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잘 못참는 체질이라, 많이 부족하나마 좀 얘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여기는 지대가 꽤 높은 건물의 4층, 그것도 서울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 전마이 참 훤합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시리고, 하늘도 맑습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지만서도. 여러분들께서 그냥 이렇게 가벼운 기분으로, 그저 한 개인의 입장으로 생각하고 글을 읽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이 게시판에서 여러 차례 벌어졌던 토론에 제가 끼어들지 못해서 저는 거기까지 얘기를 끌고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 글은 그저 뱀님께서 노구라님의 글에 붙인 코멘트 몇 가지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생각일 뿐이에요.
뱀님께서는 마초적 사고를 개개인의 입장 차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먼저 그렇게 말씀하셨죠. 나중에는 입장이라기 보다는 성향에 가깝다고 쓰셨고. 그러면서 의미 변질시키는데 한국 민족을 따라올 이들이 없다고 말씀하셨네요(물론 '저 윗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덧말을 붙이긴 했지만 평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말씀하실 리가 없죠). 저는 '입장'과 '성향'이 서로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고.. 다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한가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선,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나는 맑은 날을 좋아한다. 또는 나는 멜로영화를 좋아한다/나는 스플래터 호러를 좋아한다. 이런 진술들과 나는 마초다/나는 페미니스트다. 혹은 나는 반공주의자다/나는 사회주의자다. 이런 진술들을 동류로 취급할 수 있을까요?
뱀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반공주의자다/나는 사회주의자다. 이런 건 하나의 입장->성향일 뿐이죠. 이건 샹난님이나 요우리님이 노구라님의 글에 대한 리플에서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일 뿐입니다. 와토님께서는 인신공격쪽으로 생각하셨지만 사실 문제는 뱀님께서 개인의 취향/성향과 사회적 입장을 구별하지 않은 것이죠. 즉, 나는 혼자 극장에 가는 걸 좋아한다. 뭐 어때? 와 나는 마초다. 뭐 어때? 이건 뱀님의 생각처럼 같을 수가 없다는게 제 주장입니다.
하나의 사상/주의라도 그 사회의 특수성에 따라 맥락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특성상, 하나의 사상이 아무리 보편성을 지향한다 할지라도 그렇죠. 간단한 예를 들어, 내가 "나는 나치주의자다"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면, 주위에서는 그냥 취향 특이한 변태 정도로 생각하겠죠. 하지만 독일에서 그러고 다닌다면 저는 범죄자입니다. 한국의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보다 민족문제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의 사상(즉, 입장)이라는 것은 그것을 신봉하는 이의 가치관을 규정하며 사회와 타인을 대하는 방법, 세계를 보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뱀님께서 자신이 마초주의자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으려면,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입니다(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한국 사회의 남녀문제라든지, 한국에서 남성/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겠죠).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마초라고 얘기하는 건 자신을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위험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죠. 이 게시판에 들어오는 분들 대다수도 동의하시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는 남성이 기득권자입니다. 자기를 마초라고 얘기하는 건 참 편하죠. 그리고 더욱 유감스럽게도, 남성들에게 있어 무의식으로 박혀있는 '마초의식'이라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으로 발현됩니다. 제가 뱀님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습니까마는, 뱀님의 글이나 코멘트에서 유감스럽게도 '성찰'이란 것을 읽기는 힘들었습니다. 그건 노구라님의 글에서 더욱 그러했고. 말을 바꿔보죠. 노구라님께서는 '여자 비치발리볼 이거 미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여자가 비치발리볼이나 하지 무슨 스포츠냐' 이런 황당한 발언과 노구라님의 취향/성향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을까요?
저는 어느 게시판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남자면 남자의 편을 들어야지 왜 여자들 편을 드느냐?" 그때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게 두고두고 아쉽습니다만. 이런 진영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이나 연고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걸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 군대는 갔다왔냐?" 이런 류의 질문 역시 진영논리의 변형인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저는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에 관해 토론하면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봤습니다. 그런데, 이거 꼭 경상도 지역주의/전라도 지역주의 논쟁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월장 사건이나 양심적 병역 거부 논쟁에서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보여준 행태는 폭력적이고 편협하다는 말 이외에는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남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도 있고, 저 역시 한국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성우월주의/마초이즘이 한국 사회의 발전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쯤은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께서 우려하시는대로,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잘못된 점 또한 존재할테죠. 물론 지나치다고 여겨질 수도 있죠. 페미니즘에 대해 아직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분간,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서 심각한 오류를 발견하기 전까지, 저는 그들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폭력적 행태와 증오 가득찬 논리전개는 눈이 썩어날 만큼 봐왔습니다. 중립이라는 이름으로(대개는 중립을 표방하는 남성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여성들의 뒤통수를 치곤 하더군요) 그들의 편에 서고싶은 생각이 없어요. 아, 물론 제 생활에 대해 돌아보는게 가장 중요할테죠. 가끔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식은 땀이 흐르곤 한다니까요;;;
제안 하나 하죠. 뱀님이나 노구라님이 김규항씨 반만큼이라도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춘다면, 저는 충분히 인정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물론 김규항같은 '진보 마초'가 애들 버려놨다는 얘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한국의 소위 마초들 중에서 그 정도로 논리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유영철이 한국 사회에 끼친 해악이 만만찮은 것 같군요. 잘 나간다는 인터넷 논객이 '아줌마'(이 일에서 그 아주머니가 먼저 잘못한 것은 명백하지만)와 싸우면서 내가 유영철처럼 못할 것 같냐고 으르렁대는 꼴이라니. 시원하다고 그걸 옹호하는 사람들 수가 또 만만찮아요. 황당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