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

  • ginger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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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 중에 두 개의 한국 뉴스와 그에 대한 반응을 보고 든 생각입니다.

하나는 어떤 성인남자가 아들의 미성년자인 여자친구를 성폭행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판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통사고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사적인 교환에 대한 다분히 가십성인 기사.

첫번째 기사가 올라왔을 땐 제목이 우습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 여자친구와 성관계' 는 점잔빼는 도덕주의자들의 질타거리 혹은 황색 신문의 선정 고백란에 어울리는 얘기인데 그 다음이 '항소심서 무죄'라는 법적 판단이 딸려 왔으니까요. 정말 '관계' 였다면 사법적인 판단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을텐데 제목의 무신경함이라니. 물론 내용은 짐작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강제적 성관계'란 표현이 거슬렸지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머릿속 구석 자리 창고에 치워 두었습니다. 성폭력과 성관계의 경계는 phallocentrism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니까요. 세상 어디서나 정도만 다를 뿐이지 어디서나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성생활 전력에 대한 재판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번 사건으로 새삼 확인한 데 불과하다고 또 치워두었습니다. 제발 미성년자의 경우만이라도 좀 더 보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요.  

대신 주목한 부분은 섹슈엘리티를 둘러싼 신화 중에 팜므 파탈에 대한 공포였어요. 여자때문에 파멸당할 가능성에 대한 공포말이죠. 성폭력에과 관련된 법과 그 관행을 보면 확실히 그 공포는 보편적이며 뿌리가 깊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부장적 역사의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을 둘러보더라도 자기 섹슈엘러티의 힘을 잘 알고 그걸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할 줄도 아는 여자는 어디서나 도덕률과 정상규범의 금 밖에 있는 존재여야만 하는 거죠.  

사실 남자의 성은 여성의 것보다 왕성하며 조절과 통제가 잘 안되어 어떻게든 발산 해야만 한다는 19세기적인 신화도, 뒤집어 보면 그만큼 남자들의 성이 매우 연약하다는 것, 성적 유혹 앞에서는 아주 쉽게 무너진다는 고백이기도 하겠죠. 그리고 이런 스스로의 약점에 대한 분노는 가부장 이성애자 문화에서 여성 혐오로 표현됩니다. Frailty, thy name is man..


두번째 기사는 제목에 쓴 표현부터 ('교통사고 낸 女 몸으로 합의') 역시 황색 신문에 반라 여자들 사진 틈에 실릴 만한 기사였습니다. 여자가 돈대신 '몸'으로 상해를 입힌 댓가를 지불했다는 약간 독특한 성매매성 이야기는 '팔린다'는 판단에 따라 굳이 이 사건이 기사거리로 선택되었겠지요. 이렇게 인터넷 상에 유통되는 걸 보면 맞는 판단 같습니다.

이 게시판에 올라온 반응을 보면 야한  해학성 가십 정도로 수용되는 것 같습니다.  교통 사고로 다친 다리를 하고도 삽입 섹스를 수행한 소년에 대한 관대한 남성적 이해와 그 소년의 어리석음에 대한 약간의 우월감에서 오는 웃음이 발견됩니다 ;'박수를', '재미 보다'  '굶었어도 여자 선택' 등. 그와 동시에 섹스 제안에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어 손해를 본 남자에 대한 연민과 경고의 반응도 나왔죠. 보통 한국 여성에게 요구되는 성규범 밖의 제안을 한  그 여자에 대해서는 '술집 여자일 것'이란 추측도 같이 나왔구요. (저는 기사의 주인공들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을 하고 있지 않으며, 남자가 미성년이란 부분은 논리전개상 벗어나 생략합니다).


이런 규범 밖의 여자에 대한 모순에 가득찬 태도 또한 매우 오래된 것이죠.  여성의 성이 강력하게 통제되는 가부장 사회에서 자기 섹슈엘리티의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은 여자들은 지극히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합니다.  이성애 사회에서 여성의 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다보면 아무리 관대한 이중기준이 적용되더라도 남성의 성도 통제 당할 수밖에 없지요. 남자들도 성에 대한 금기와 부정으로 가득찬 도덕률의 금 안에서 행동해야 하거든죠. (사드나 마광수같은 사람은 그래서 체제 유지용 단죄를 당하죠).  억압자도 억압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금 밖의 팜므 파탈들 한테서 해방감과 함께 공포를 느끼는 걸테구요.  이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여자들에 대한 경멸/경외 또는 공포/동경은 쌍동이 악령처럼 남자에게 들러붙게 됩니다.



2.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소위 세계 명작 소설이니 역사니 미술이니 철학이니 하는 점잖은 책들 중에 [반노]란 제목의 오래된 페이퍼백이 숨어 있는 걸 발견했었죠. 사춘기도 되기 전이었지만 외설과 음란이란 이유로 금서가 되었다는 선전문구에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숨어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잘 이해를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성욕이 넘치는 규범 밖의 여자를 만나 성적으로 끊임없이 착취당하던 남자의 얘기였던 것 같아요. 끊임없는 성적 요구에 건강을 잃은 남자에게 보약을 다려주는 여자라니.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같죠.  팜므 파탈만 나오면 촌스럽고도 집요했던 소설 [반노] 생각이 납니다.



3. 영국사람 친구가 해준 이야기입니다. 학교 다닐 때 나이가 아주 많은 선생님 하나가 2차 대전 때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경험한 얘기랍니다. 포로들을 학대하고 고문한 얘기인데, 포로들을 벗겨서 의자에 묶어 놓고 고압선을 발기가 되면 성기가 닿을 만한 위치에 쳐놓고는 벗은 여자한테 그 앞에서 걸어다니게 했다는 겁니다...그래서 몇 명이나 죽었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가 선생님이 결과는 얘기 안 해 주었다고 하네요.



4. 이아손과 황금양털가죽, 혹은 Jason and the Argonauts 이야기도 결국은 소년이 모험으로 가득찬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성인 남자로 성장하는 얘기이죠. 이 통과의례 사가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소년에게 미지의 영역이며 위험으로 가득찬 영토인 '여자'에 대한 공포와 동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유혹적인 킬러 사이렌의 이야기는 팜므 파탈 앞에 속수무책인 연약한 남성의 성에 대한 경고이며,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 남자를 파멸시키는 유혹적인 여자를 조심하라는 충고이기도 하겠죠. 그러나 이아손의 모험은 메데이아 없이는 완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메데이아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고 '자기가' 이아손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배반하고 연인을 돕지요. 똑똑하며 강력한 마녀인 메데이아의 자발적 도움이 없었으면 영웅따윈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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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선정적인 기사를 이 게시판에 옮겨와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종종 썬이나 미러의 가십 기사를 들쳐보곤 하지요. 물론 기사 내용과 동의하거나 공감하는 경우는 아주 아주 드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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