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집', 맛있는 샌드위치의 샐리살롱, '환상의 빛', 커피빈, 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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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집'과 '환상의 빛'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안녕 나의 집 Adieu, plancher des vaches! (Farewell, Home Sweet Home)'

영화를 보고 난 느낌: "부르주아 영감님의 한가한 농담이로군".

근데 어쩝니까. 저는 이런 부르주아의 한가한 농담을 좋아하는 걸요. 게다가 이런 류의 농담은 많은 경우 자기 반성 - 최소한 자기 성찰 - 을 담고 있기 마련이니까요. 거지가 되어보는 부자이야기는 볼때마다 "니가 배가 불렀군"이라는 조소를 보내게 되지만, 동시에 언제봐도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결론은 나른한 분위기 속에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가 맘에 들었다는 소리.

사실 모두 맘에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노동계급의 조연들이 암벽등반하는 모습같은 건 "역시 부르주아는 썩었고 노동계급이 건강해"라는 게으르게 도식적인 결론같았고, 그들의 입장에 서 있기 보다는 타자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영화내내 부르주아 아저씨 아줌마들을 놀려대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의 중심은 그 사람들의 관점이었고 하인이나 비서, 거지 청년들은 계속 "남"으로만 느껴지는 게 좀 불편하고 아쉽더라구요.
도식적인 걸로 치자면, 막판에 머나먼 이상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는 주인공 아버지(웬지 이 사람이 중심이다 싶더니만 imdb를 확인해보니 감독 본인이더군요!)랑 거지 할아버지 커플도 만만치 않죠. 특히나 주인공 아버지의 경우, 자기는 애같이 칭얼거리고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사는 "마누라"에 의한 피해자인 척 징징대고 어린 애까지 찝쩍대는 꼴이, '아메리칸 뷰티'의 역겨움도 연상되었습니다. (이 영화 좋아하는 분들께는 죄송. 사실 저도 아메리칸 뷰티 - 그 비닐봉지 장면 하나 때문이라도 - 좋아합니다. 케빈 스페이시도 좋았구요. 하지만 불편한 건 불편한 거죠.) 그래도 '안녕 나의 집'이 '아메리칸 뷰티'보다는 괜찮았던 게, 이 영화의 아버지는 사모님한테 떽떽거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할짓 다 하다가 조용히 가출하잖아요. 게다가 제가 영화속의 영감님 캐릭터들에게는 좀 관대한 면이 있어서요. 뭐 사고치려면 조용히 사고쳤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 아, 이게 아니죠. 어쨌든.

하여간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어제 '아들' 보면서도 이런 아트하우스스러운 리듬의 영화를 오랫만에 보니 반갑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의 느긋함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네요. 요즘은 예술영화만 보다보면 헐리우드 영화의 리듬이 그립고, 헐리우드 영화만 보다보면 예술영화의 리듬이 그립고 그렇습니다. 둘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다는 건지 제대로 설명해보라면 할 말은 없지만요.

이런 농담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올해 초 ebs에서 방영했던 '월요일 아침'의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감독이로군요. 그 당시에 '불한당들' 보고 싶다고 툴툴거리는 을 적었었는데.

아, 그리고 "안녕"이 Hello인 줄만 알았는데 제목을 자세히 보니 Adieu/Farewell이었습니다. 안녕보다는 안녕"히"가 더 나았을 것 같은 데 말이죠.




2. 아트선재 올라가는 길의 "샐리살롱"

안국역쪽에서 아트선재 올라가는 길에 언제부터인가 못보던 커피/샌드위치 전문점이 생겼다 싶었는데, 가보기는 오늘 처음 가보았습니다. 두 영화 보는 사이에 잽싸게 먹고 나오느라고 혼났네요.
제 친구 설명에 의하면 예전부터 꽤 유명한 집이었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본점 위치를 안국동으로 옮긴 것이구요. (그 외에도 작은 안국점이 따로 있었다고 하던데, 그게 어디 있었던 거죠?) 이 가게는 신기한 것이, 밖에서 보면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 플라스틱스러운 분식집 분위기였는데, 정작 안으로 들어가보니 아담하면서도 고급스럽더라구요. 편안한 분위기도 나구...

차가 맛있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샌드위치는 별 기대 안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치킨 샌드위치를 시켰더니 엄청난 양은 둘째치고 예전에 한 번 먹어본 The Bar 샌드위치보다도 더 맘에 드는 풍미더군요. 거기다가 산딸기차까지 합쳤는데도 5천 5백원이라니! 이정도 레벨&양의 샌드위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당연히 1만원은 하는줄만 알고 있던 저에게 1/3 가격은 백화점 이월상품 떨이세일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안국동/ 종로 가게 되면 이 집을 들리느라구 라면땡기는 날이나 인사동의 밥집들을 한동안 멀리하게 될 것 같네요.

음, 너무 극찬을 했나... 사실 제가 이집 맛을 조금 과장해서 좋게 느낀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 며칠간 장이 계속 안좋았는데, 여기 샌드위치 속의 닭고기가 살짝 덥혀져있었고 산딸기차도 따끈한 것이었기 때문에 먹고나서 속이 많이 편해졌거든요. 초여름의 장염이 재발한 건지... 그래도 그때처럼 죽으로만 연명할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기는 합니다만.

정확한 가게 이름이 "샐리"밖에 생각안나서 확인하느라 검색을 하다보니, 이 집 홈페이지를 발견했습니다. 쿠폰도 있네요.




3. '환상의 빛 幻の光 (Maboroshi no hikari)'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좋은 영화를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접하다니 억울하다"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사라져가고 세상이나 타인은 불가해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우리들은 살아가며 즐겁게 지내볼만하다. 뭐 이런 진부해지고 뻔해지기 쉬운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고 뻔하지 않게 그려내는 영화들, 전 그런 영화들만 보면 입을 떡 벌리고 빠돌이 모드로 전환되어 버리고는 하거든요. 기요시의 '회로'가 그랬고, '펀치 드렁크 러브'(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을 그리 좋아하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가 그랬고, '오아시스'(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을 이 영화만큼까지 좋아하지는 않지만)가 그랬죠. 전단지를 보니 소개글 중에 "탁월한 영상과 깊이 있는 주제의식으로..."라는 부분이 있던데, 이 영화의 가치를 정확하게 한문장으로 묘사한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검은색과 어둠을 다루는(물론 초록빛의 모티브도 빼놓을 수 없겠죠.) 카메라의 신묘한 질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함과 긴장을 자아내는 영화의 리듬 등. 공포영화의 문법을 차용한(특히 후반 버스 정류장의 그 장면!) 예술영화라는 점이, 예술영화의 문법을 차용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몇몇 작품들과 마주본 듯한 느낌도 듭니다. (지금 적은 문장이 그럴듯하게 말장난하는 것 같기는 한데, 영화 보면서 정말 이렇게 이대로 생각이 들었던 것을 어쩌겠습니까. -_-;) 어둑어둑한 화면에 빠져들면서 '내가 한국 영화에서 어두우면 "조명을 왜 이렇게 친 거야?"라고 툴툴대면서 외국 영화의 어두운 화면은 무조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대주의(?)에 빠진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보이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화면들은 역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구나, 정말 아름다운 영화 하나를 발견했구나 하는 즐거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법해보았습니다. '원더풀 라이프'(이건 개봉도 했었는데!)나 '디스턴스', 최근의 화제작이었던 '아무도 모른다'도 궁금해지네요. 사실 시놉시스로만 보았을 때는 '환상의 빛' 쪽이 가장 재미없고 진부할 거라고 생각했고, 순전히 감독의 유명세 때문에 본 영화였는데.

전단지를 보니 여주인공은 스즈키 세이준의 '피스톨 오페라'에 나온 배우라고 하는군요. 대체 저는 스즈키 세이준의 작품들을 언제나 접할 수 있을런지. 이번에도 '살인의 낙인'을 서울아트시네마 회원특별프로그램에서 볼 기회가 있는데, 기껏 회원증까지 있으면서도 기회를 놓치게 될 것 같습니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20대 초반 모습을 볼 수 있는(근데 그 때 모습도 그냥 30대처럼 보이던데요? 팬들께는 죄송. -_-;) 영화이기도 하구요.
참, 에모토 아키라 아저씨가 점잖은 시아버지로 나오니까 좀 적응 안되더군요. '도플갱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킥킥킥.
눈에 익은 배우로 말하자면... 왜 저는 오스기 렌을 그렇게 수많은 영화에서 보고도 볼 때마다 못알아보는 걸까요. 여주인공 아버지로 나왔다는 걸 지금 imdb 확인해보고서야 알게 된 거 있죠.




4. 오는 길에 커피빈에서 까페 라떼 먹었습니다. 콩다방 아이스 까페라떼는 부드러워서 좋아합니다. 종종 시럽 잔뜩 넣고 집에 가는 길에 쪽쪽 빨아먹다보면 기분이 다 편해지는 것 같거든요. 그동안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여기 아침 메뉴가 꽤 괜찮아 보이네요. 샌드위치나 토스트가 사진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중간은 할 것 같은데... 나중에 안국동이나 인사동, 종로 쪽을 오전에 들를 일이 있으면 이른 점심으로 한 번 시도해봐야 겠습니다.

어쨌든 꽤 만족스런 하루였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시네랑데부나, 3일 금요일날 '아들' 하나만 본 하이퍼텍나다 베스트 컬렉션이나 볼까 말까 생각이 드는 영화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거미숲도 보고다른 일들도 하려면 몇개나 챙겨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5. 아, 다른 이야기 하나. 인사동하니까 생각나는데, 몇 주 전에는 인사동에서 안국 쪽 입구 가까이 골목에 있는 '신옛찻집'에 오랫만에 들러보았습니다. 오랫만이라고 해봐야 이번이 세번째일 뿐이지만요. (대체 언제쯤이나 차가 마시고 싶을 때마다 지갑 걱정 없이 후루룩 마실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졸업하면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요? -_-;) 제가 간 날은 내부를 약간 고치는 중이더라구요. 지금은 공사가 다 끝났겠죠. 주인 아저씨는 못보던 분인데 너무 친절하게 해주셔서 좋았습니다.

신옛찻집에 간 이유는, "배숙"이라는 걸 먹어보고 싶어서입니다. 예전에 아예 작정을 하고 용돈을 모아서, 인사동의 찻집을 며칠 간격으로 하나씩 격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바로 군시절이었죠. 휴가 나올 때마다 이런 짓을... 그 하나씩 격파라는 게 기껏해야 서너군데로 흐지부지되어버리고는 말았지만. 그래도 그 때 얻은 성과 중 하나가 이 신옛찻집이었습니다. (그 외에 귀천의 모과차와 경인미술관의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죠.) '인사동 가고 싶은 날'이라는 책에서 본 배숙이라는 것을 먹어보기 위해 갔는데 처음 먹어보는 것이 맛도 오묘하면서 먹고나니 아주 시원하더라구요.

그래서 2년만에, 그 때 처음 먹어본 배숙이 생각나서 먹으러 갔는데... 일단 제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맛이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그 배숙이 시원하면서 달콤하다고만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번에 먹어보니 생각보다 쌉싸름하고 옅은 맛이더라구요. 근데 또 신기한 것이, 기억했던 그 맛이 아닌데도 먹길 잘했다 싶은 겁니다. 그 쌉싸름하고 맑은 게 더운 데 갈증 해소엔 아주 그만이더군요. 그리고 신옛찻집은 차를 시키면 항상 떡과 한과를 조금씩 내어주기 때문에, 가벼운 요기가 되기도 하구요.

참, 이 집은 본래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원숭이(!)와 새들 지저귀는 소리로 유명한데, 제가 간 날에는 원숭이도 새들도 안보이더라구요. 내부를 다시 정리하면서 아주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인지, 아니면 그날만 없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놈의 원숭이가 항상(두번밖에 안갔다면서 "항상"이라니?! -_-;) 옷자락을 잡아서 곤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배숙 이야기 하나 더. 일전에 인터넷에서 배숙을 검색해보니 "엄마가 어릴 때 해주던 음료에요"라고 적으신 분들이 있더라구요. 배숙이라는 게 그렇게 대중적인 음료인가요? 아니면 집집마다 있는 "어머니의 수퍼 필살기" 중 하나였던 걸까요? 이번에 배숙 맛이 생각나서 인사동에 가서도, 신옛찻집 말고 옛찻집(종로에서 올라가던 중이라 여기가 더 가까웠거든요)의 경우는 사람들이 워낙 찾지 않아서 메뉴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다는 말을 듣고 아쉬웠는데. 그러고보면 "사라져가는 우리 음료" 같은 게 이것 말고도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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