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연구
펌글입니다..
이영훈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이번일로 정신대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교수님이 말씀하신 (한국측)자료가 정말 없는 줄 알았습니다.정말 일본측 자료만 있으면 .....하는 심난한 생각으로 인터넷을 찾아보았는데,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읍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교수님 말씀처럼 사실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결국 같은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가해자의 입장이냐,피해자의 입장이냐,가해자의 입장이라도 진정한 반성의 차원의 입장이냐,진실을 은폐하고자 하는 입장이냐의 차이입니다.
결론은 교수님은 철저히 정치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그것도 가해자측의 가장 나쁜쪽에 서있는 정치적입장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 집니다.이 문제는 사실의 확인문제는 결코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러 자제했던 분노를 참을 수 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분노를 정신대문제에 더 관심갖는 것으로 일제청산에 더 관심보내는 것으로 승화시키고자 합니다.
수 많은 자료중에서 단 하나만 올립니다.이는 교수님 보라고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저의 판단은 교수님이 이정도의 자료도 검토하지 않았다고 보이지 않습니다.교수님의 부족은 사료가 아니라 인간에대한 사랑이라 생각듭니다. 작성자 신재길.
군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연구
I. 머리말
군위안부 피해자들이 강제연행 당했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 속에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문서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우파측에서 이 '강제연행'은 한국의 피해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다. 1993년 일본정부가 발표한 보고서는 강제연행이 일부 있었으나 이는 민간이 한 일이지 정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日本內閣官房內閣外政審議室, 1993)
일본에서 이렇게 강제연행의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강제연행이 아니었으므로 여성들이 自意에 의해 갔거나 아니면 적어도 당시에 횡행하던 인신매매나 취업사기에 의해 가게된 것이었으며, 따라서 국가의 책임은 없다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서라고 보여진다.
물론 뒤의 분석에서 볼 수있을 바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강제연행은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으며, 이 강제연행에는 경찰, 군인 등 국가기관의 사람들이 민간인보다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그러한 강제연행의 사실여부 이전에 강제연행의 개념이 잘못 규정되고 있다는 점에 우선 주목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 없었다고 주장하는 강제연행이란 물리적 폭력에 의한 연행에 국한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갔으며 강제적 통제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따라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상황 전체를 강제연행이라고 규정해야할 것이다.
인신매매, 유괴, 취업사기 등으로 위안부가 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위안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연행되었으며, 연행 도중 엄격한 감시를 받았고 위안소에서 도저히 탈출할 수없도록 감시를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군위안부 동원은 전체적으로 거의 모두가 강제연행이었다고 규정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글은 이렇게 강제연행의 개념을 보다 광범위하게 규정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일제하 식민지 조선에서 행한 군위안부 강제연행의 실상을 밝히고자 한다.
이글은 그간에 발굴된 자료와 연구 성과물들을 폭넓게 참고할 것이지만, 중심이 되는 자료는 정신대연구소에서 행한 심층면접결과와 생활지원금의 수혜를 위해 보건복지부에 신고한 170여명의 피해자들의 증언내용에 대한 통계자료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일본우익은 피해자 증언의 신빙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양심적 학자들 조차도 증언을 문서자료의 보충자료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증언의 사회사적 가치에 대하여는 이미 새로운 역사학에서 충분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에 관한 논의는 뒤로 하고라도, 여기서는 소수의 심층면접결과에 더해 170여명의 피해자의 증언내용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하고 있으므로 대체적인 경향을 판단하는데는 매우 유효할 것으로 판단된다. 僞證의 혐의에 대해서도 이 '다수'라는 것이 상당 정도 반박의 힘을 가질 수있을 것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피해자들 중 피해자운동에 열심인 십수명을 포함하여 넓게 잡아도 50명 정도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연락을 취하고 있는 피해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피해자가, 운동단체나 다른 피해자들과의 접촉이 전혀 없이 각자의 생활공간에 격리되어 있으므로, 50여년 전의 경험을 동일한 내용으로 위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 통계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내용분석에 참고자료로 사용한 자료로서, 종전시 귀국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어를 거의 잊은 상태에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은, 50여년의 진공을 헤치고 나온 것으로 그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통계분석에서는 신고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차이 때문에 각 내용의 분석대상의 총수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말해둔다.
II. 연행시기 및 피해자의 특성
뒤에서 논의할 바와 같이 식민지 조선에서 어린 여성들은 취업사기, 인신매매, 유괴, 협박 및 폭력 등의 방식으로 연행되어갔으며, 이 연행방식은 시기에 따라 그 분포가 다소 달라졌다.
이러한 범죄적인 방식의 연행이 일으킬 사회적 물의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연행대상은 하층일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나, 본 조사에 나타난 피해자의 특성을 당시 전반적인 사회상황과 비교해볼 때, 연행대상은 특정 계층이 아니라 전 조선의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행방식에 앞서 연행시기와 피해자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연행시기
군위안소의 설립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상해 등지에 주둔군을 두기 시작한 1932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한 1937년부터 본격화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해자들의 연행시기는 이러한 군위안소 설립 추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즉 1932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 시기에 걸쳐 연행이 이루어졌으며, 1937년부터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에는 일본의 군위안소 정책이나 위안소 설립 주체의 상황에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군위안부의 연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글에서는 전쟁이 긴박하게 확대되고 군위안부 수가 급격히 늘어난 1937년 이후 시기의 변화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편의상 1937-39의 시기, 1940-41년, 1942-43년, 1944-45년의 시기로 구분해 보았다.
(2) 가정배경 및 학력
피해자들의 가정배경은 거의 예외없이 빈곤한 농가였으며, 학력수준도 매우 낮다. 그러나 이러한 출신배경이 군위안부 연행이 식민지 조선의 최하층에 집중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들의 상황이 당시 조선 전체의 경제 및 교육상황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인구의 80% 이상이 농어업인구였으며 (1933년 조선인의 80.5%가 농업자, 1.5%가 어업자였다. (李如星 외, 1933:62)), 농업인구도 빈곤한 소작.반소작농이거나 영세한 자작농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조선의 빈곤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다. 이렇게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전인구가 빈곤층이었다고 볼 때 군위안부 연행이 어느 한 계층에 쏠려 있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학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31년 학령아동의 19.9%가 보통학교에 취학하고 있었으므로 (李如星외, 1931:82-83), 피해자들의 학력은 조선 전체로보아 거의 평균에 가깝다.
요컨대 피해자들은 극히 빈곤한 가정에서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층이지만, 하층계급에 몰려 있던 것은 아니며, 따라서 군위안부 연행은 조선에서 최하층을 대상으로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극소수의 상층만을 피하면서 전 조선여성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연령
공창의 창부가 될 수 있는 연령이 일본에서는 18세 이상이고 조선에서는 17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야마시타 영애, 1992), 군위안부의 경우에는 나이제한이 일률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8년 추업을 목적으로 하는 부녀의 중국도항
은 만 21세 이상이라고 한 문서와 (吉澤, 1938), 1940년의 중국군대에서 창기는 16세 이상이어야 한다고 한 규정 (呂集團特務部,1940) 정도가 발견되며 대부분의 군문서에 나타나는 위안소 규정에 위안부의 연령에 대한 언급은 없다. 위 吉澤의 문서에는 나이규정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요시미 요시아키, 1998:106-107)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연행시 나이는 11세의 어린 나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신고한 175명 중 27세에 연행된 사람도 한 사람 있으나, 가장 많은 사람들이 14세로부터 19세, 그중에서도 16세와 17세에 집중되어 있다. 1993년 정신대연구소에서 심층면접한 19명의 피해자 조사에서도 같은 결과를 보이고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소 편, 1993:18-19)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32년부터 36년의 아직 위안소가 크게 확대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14세부터 19세로 피해자의 나이가 집중되었던 것이, 이후 위안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나이의 상한과 하한이 넓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4) 연행된 곳
피해자들이 연행된 곳은 대체로 농촌지역이었지만,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등 도시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연행이 이루어졌다. 도시지역에서는 1920년대 이후 노동력 동원을 위해 설립되기 시작했던 직업소개소 및 식민지 시기 지속적으로 증가한 음식점, 기생집 등이 통로가 된 것이 간혹 눈에 띄지만, 대체로 연행의 형태는 뒤에 논의할 민간인, 경찰, 군인, 관리등이 행한 사기, 유괴, 폭력 등의 방식으로 농촌지역에서 행해진 연행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직업소개소를 통한 동원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1930년대에 직업소개소는 조선내 노동자를 조선 및 일본에 이동.배치하는 말단기관으로 기능했다. 1940년에는 [직업소개소령]의 공포로 종래 府營에서 國營으로 되어 국가통제가 한층 강화되었다.(김
미연,1995:58-63) 도시에서 다수의 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업소개소를 통해 연행되었다는 사실은 군위안부 동원에의 국가 개입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지역별로는 경남.경북지역이 압도적으로 많고, 전남.전북지역이 그다음으로 많다.
신고자들이 남한 거주자들이므로 고향이 남부 지역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경상도 지역의 비율은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그리고 경상도 지역의 높은 비율은 남성을 포함한 일본 내 전 조선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 연행 대상의 지역별로 차별화된 배정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없다. 앞서 언급한대로 연행이 대상의 구별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때, 지역에 따라 차별적으로 연행이 계획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상도 지역, 특히 경남지역에서 연행이 다수 이루어졌던 것은 무엇보다 먼저 지리적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있다. 노동력 동원이나 이주는 일본으로 향한 것이었으므로 경남은 인접지역으로서 많은 연행자와 이주자가 생겼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군위안부 피해자의 경우는 일본 뿐아니라 중국, 남양지역으로 끌려간 사람이 많았으므로, 일본과의 인접이라는 사실 외에 또다른 이유를 들 수있다. 그것은 부산이 위안소로 배치되는데 중간 지점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이 부산에서 일단 집합되어 선박을 이용하여 다른 지역으로 수송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부산과 가까운 경남북 지역은 손쉬운 연행지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경상도 지역의 절대 인구수와 인구밀도가 타 지역에 비해 높았던 점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있다.
(5) 연행되어 간 곳
피해자들이 연행되어 간 곳은 조선과 일본을 포함하여 만주, 대만과 중국, 남아시아, 남양군도 등 일본군의 점령지 구석구석에 까지 퍼져 있었다. '일본군이 주둔했던 모든 곳'에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끌려갔던 것이다.
뒤에 논의하겠지만 이렇게 일본군이 있는 구석구석까지 갈 수있던 것은 일본군이 수송을 담당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군위안부 동원의 직접적 목적이 일본군의 해외주둔이 장기화되면서 일어나는 군의 사기문제, 양민에 대한 강간 등의 문제라고 알려진데 비해, 일본 내의 위안소에도 상당수의 위안부가 배치되었던 사실은, 기본적으로 일본군이 여성을 필요로 했다고 하는 보다 본질적인 데 군위안소 설립의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 내의 위안소에 일본여성이 아니라 조선에서 여성을 끌어가 사용했던 사실은, 1930-40년대에 이루어진 일본여성의 모성보호 정책과 대비되는 조선여성의 모성말살이 일본군위안소 정책을 수립한 한 배경이 되었다는 것과 이에 따라 뒤에 논의할 바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군위안부 동원은 노동력 동원, 병력 동원과 함께 이루어진 총동원체제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던 점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III. 강제연행의 사회적 조건
조선에서의 군위안부 연행은 물론 일본정부의 정책과 명령체계를 따라 수행된 것이었지만, 당시의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 조건은 사기와 폭력으로 이루어졌던 연행을 용이하게 했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빈곤이 극심했고, 한편으로 1916년 전 조선에 공식적으로 수립된 공창제도로 인해 매매춘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었으며, 1930년대말부터 날로 체계화, 강제화되어간 총동원체제 속에 있던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 상황이 그것이다.
(1) 빈곤
앞서 논의한대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생활수준은 극히 빈곤한 상태였으며, 이것은 뒤에 논의할 바와 같이 취업사기가 가장 중요한 연행방식이었던 군위안부 강제연행의 무엇보다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주지하는대로 토지조사사업과 일본자본주의의 침투로 조선의 농촌은 몰락하여 일본인 지주가 늘어나고 조선인 자영농의 비율은 크게 낮아졌다. 1920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다. (東洋經濟新報社,1980)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범한 농민층의 전가구, 혹은 그 중 일가족원이 생계를 위하여 농촌을 떠났다.
식산은행 조사부의 추계에 따르면 1925-30년 사이에 해마다 약 4만 명, 1930-35년 사이에 6만 명, 1935-40년에 22만 명이 이농하였다({植銀調査月報},1947.3). 이러한 이농현상도 군위안부 동원의 한 배경을 이루었다. 농촌에서 연행된 사람 뿐아니라 도시에서 연행된 피해자들도 거의 대부분 빈곤한 농촌 출신으로, 농촌에서 단신 이촌하여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 요리집 등을 전전하던 중 연행되었던 것이다. 특히 하층 농가일수록 이농이 심했고(朝鮮農村社會衛生調査會, 1949 : 134-135), 나이 어린 여성의 이농이 많았다. .피해자들은 빈곤한 가정에서 입을 덜기 위해,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을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 약값을 위해, 혹은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직장'을 꿈꾸며 연행자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2) (총)동원체제 하의 강제동원
주지하는대로 일제는 식민지시기에 만주로의 이주정책이나 남성 농민의 북부지방으로의 이주정책을 실시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조선에 총동원체제를 적용하여 노동력 동원을 시행했고 1944년부터는 병력동원도 실시했다.
군위안부 연행은 조선에서 행해진 이러한 동원체제의 큰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공식적인 정책상에 나타난 노무동원은 자유모집에서 관알선, 다음으로 징용으로 바뀌었고, 병력동원도 자원에서 징병으로 변화되어, 동원에 있어서 강제력의 정도는 시기가 흐름에 따라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노동력 동원과 병력 동원 모두에서 징용, 징병에서는 물론이고 모집, 또는 자원이나 관알선에서도 관의 개입에 의한 강제력 행사가 명백했다. 협박과 폭력이 종종 사용되었다.
이러한 관의 강제력 행사는 애국반이라는 최말단 기저조직으로부터 町洞里부락연맹, 읍면연맹, 府郡道연맹, 도연맹을 통해 중앙에 이르는 물샐틈없는 전조선의 조직망을 따라 가동되었다.
(이만열,1997:86-89) 1940년 발족한 국민총력연맹은 이렇게 조선인을 전면적으로 조직화했는데, 이렇게 전국을 치밀하게 조직화한 상황에서 지역의 말단관리를 포함한 조선총독부의 개입없이 그렇게 많은 여성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있다.
더우기 해외로 나가는 모든 경우에 관할 경찰서가 발행하는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1925년에 일본내무성의 명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경상남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인의 일본에로의 출국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규제정책은 1939년 강제징용기까지 계속 새로운 규제조항을 덧붙이며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내에서 응모자의 반수 이상이 출국허가를 받지 못하였고, 조선의 각 항구에서 많은 수의 불법출국자들이 저지당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해상에서 그리고 일본의 항구에서도 불법이주자들이 속속 검거되었다. (朝鮮總督府警務局,1931-1939) 군위안부의 해외 도항은 도항증명서 없이 도항이 묵인되었거나, 경찰서에서 도항증명서를 받아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경찰을 비롯한 관의 개입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3) 공창제도의 수립과 매매춘의 확산
한말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 집주지역을 중심으로 공창제도가 수립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공창 뿐아니라 사창도 발달하게 되어 매매춘은 조선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야마시타 영애, 1992; 송연옥,1998) 매매춘을 둘러싸고 사기와 인신매매, 유괴가 조선에서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강만길, 1997; 이만열,1997)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군위안부 연행의 유리한 토양이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조선전체로 보아 아직 그 규모는 그다지 컸다고 말할 수없으며, 조선인 창기가 점차 늘어났지만 초기부터 어느정도의 시기까지는 일본인 창기가 주를 이뤘다.
1927년 동아일보는 조선 전역에 일본인 창기의 수가 2,178명 조선인 창기는 1,034명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1927.9.28) 뒤의 연행방법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이지만, 군위안부 연행에서 매매나 유괴, 납치 등 매매춘을 둘러싸고 일어난 연행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또한 기존의 유곽에 있다가 연행된 경우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군위안부 연행이 보다 광범위하게 빈곤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매매춘의 환경은 그 일부를 이루는데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IV. 연행방식
한국정부에의 신고자료를 보면, 취업사기에 의한 연행이 가장 많고, 다음이 폭력, 협박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군위안부 연행이 가난을 배경으로 관과 군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앞서 언급한대로 매매와 유괴 등의 방식은, 취업사기에 이 방식들이 섞여 진술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예상외로 적다. 공출, 봉사대, 근로대 등의 명목을 기억해내어 진술한 피해자들도 다소 있는데, 이것도 그 명목의 정확성을 의심하더라도, 아뭇튼 관의 강압에 의해 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근로정신대 제도를 통하여 군위안소로 간 경우도 6명이나 발견되었다.
(1) 취업사기
좋은 곳에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따라나섰다가 군위안소로 가게된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좋은 곳'의 종류는 다양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일본의 공장이었다. 몇 년간 잘 일하고 있으면 돈도 벌 수있고 언제든 희망하면 돌아올 수있다는 것이었다. 조금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서, 병원에 있는 부상병을 위한 일을 하는 것, 종군간호부의 일을 하는 것 등의 취업 약속이 피해자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가족도 모르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나선 피해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가족에게 준비금, 또는 전도금이라는 명목으로 얼마간의 돈을 지급했다고 증언한 피해자가 간혹 있다.
그것이 얼마나 일반적인 경우였는지는 알 수없으며, 그 액수도 일률적이지 않다. 이러한 전도금 지급은, 노동력 동원시 관알선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최하부 행정단위인 면에서 몰이꾼처럼 아무렇게나 붙잡아가는 방법으로 노동력을 동원하면서, 준비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나, 면사무소 노무계가 직업계에 공출을 의뢰하고 이때 전도금으로 50-100엔 정도를 지급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 (김민영, 1995:88)을 상기하게 한다.
노동력 동원의 경우 관의 개입이 명확히 드러나는데 비해, 군위안부 동원의 경우는 대체로 민간인만이 전면에 드러난 경우가 대부분이나, 군인, 경찰, 관리가 취업사기를 직접 주도했다고 증언한 사람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관알선 방식의 노동력 동원과 여러 가지 유사한 점을 보이며, 전도금 지급을 위한 거액의 조달이 민간인으로서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 등은, 말단에서 취업사기를 행한 사람이 대부분 민간인이었다해도, 결국은 그것이 일본군과 정부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2) 협박 및 폭력
글자 그대로의 폭력적 연행도 취업사기에 버금가게 많다. 많은 피해자들이 강제로 트럭에 태워졌다고 증언했다. 길을 가다가 강제로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증언한 사람도 있다.
뒤에 논의하겠지만, 폭력적 연행을 한 사람으로는 군인과 경찰이 대부분이며 특히 경찰이 많다.
이에 비해 민간인이 폭력을 사용한 경우는 매우 적다. 강제연행이 일부 있었으나 이는 민간이 한 일이지 정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고 한 일본정부의 보고는 피해자들의 증언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오히려 폭력적 연행은 총독부와 일본군이 직접적으로 행했으며, 민간인도 간혹 이러한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 올바른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인신매매 및 유괴
위에서 논의한 전도금과는 달리 사람을 사고 파는 절차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지는 않으나 눈에 띈다. 가난 때문에 어느 곳의 수양딸로 보내졌다가 그 집에서 팔아버린 경우, 일하던 식당이나 가게의 주인이 판 경우, 가장 비참한 것으로 친아버지가 판 경우 등이 있다. 그
러나 175명 중 매매로 인해 군위안소에 간 경우는 단 4건에 불과하다. 이것은 여러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매우 적은 숫자이다. 이렇게 매매의 경우가 적었던 이유로 무엇보다 먼저 식민지 조선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들에 비해 부모가 딸을 파는 관습이 거의 없었던 점을 들 수있다. 극히 빈곤한 농촌에서도 딸을 팔았던 경우는 단 1건만이 발견되며, 대부분의 경우가 취업사기나 폭력으로 딸을 빼앗기며 절규하는 부모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만약 부모에 의한 매매 관습이 있었다면 조선에서 군위안부 동원은 훨씬 쉬웠을 것이고 동원의 숫자도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식민지 조선에서 매매춘의 확산 정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점도 매매의 경우가 적었던 배경이라고 말할 수있다. 이점은 당시 매매춘의 많은 부분이 유괴에 의해 이루어졌던 비해 유괴에 위한 연행의 숫자도 매우 적었던 사실도 설명해준다.
(4) 근로정신대 제도를 통한 동원
정신대라는 개념이 노동력 동원과 군위안부 동원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다.
정신대는 글자 그대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으로서 의료, 보도 등 여러 분야에서 인력동원에 쓰인 개념이었으므로, 군위안부를 동원할 때도 연행자들이 정신대의 명목을 도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정신대라는 제도가 여러 목적의 동원과 함께 군위안부 동원까지 포함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본에서 그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기는 하지만 요시다 세이지 (吉田淸治, 1989)는 [황국위문조선인여자정신대] 200명의 동원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고, 1944년 黑龍江省 富錦에서 통신교육대로 있던 한 일본군인은 [관동군전시특별여자정신대]로 연행되어 온 위안부를 만났다고 증언했다.(종군위안부110번편집위원회,1992:44-45) 보다 구체적으로, 이미 그 이전부터 관알선으로 행해졌으나 1944년 천황령으로 공식화까지 되었던 근로정신대제도가 군위안부 동원의 방편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생각도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당시 조선의 소학교에 근무했던 일본인 교사 가와오카씨는 자신이 권유하여 근로정신대로 갔던 학생 8명이 모두 군위안부가 되었다고 증언했으며, (한국일보,1992.1.17) 이케다 (池田正支)라고 하는 교사도 자신의 학교에서 근로정신대로 나갔던 학생수와 일본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 숫자가 일치하지 않았다고 하여 (동아일보,1992.1.15) 그 차이 만큼의 숫자가 군위안소로 갔을 것이라는 암시를 했다.
한국 보건복지부에 신고한 170여명의 피해자 중 6명이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다가 군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중언했다. 이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유로 근로정신대에 동원되었다가 공장에서 훈련만 받고 군위안소로 갔거나 일정 기간 일을 하다가 군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중 한 사람은 공장에서 일하던 중 공장건물이 파괴되어 공장에서 일하던 수명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군위안소로 수송되어 갔다고 증언했다....
한편 두명의 피해자가 근로정신대로 일본의 공장에서 일하던 중, 힘든 노동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도망을 가다가 붙잡혀 군위안소로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물론 근로정신대라는 제도 자체를 군위안부 동원에 이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든 근로정신
대로 동원되어 일본에 있다가 군위안부가 된 경우가 많다면, 군위안부 동원과 관련하여 근로정신대제도는 하나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있을 것이다.
(5) 기타: 공출, 봉사대, 근로대 등의 명목으로
적지 않은 수의 피해자들이 공출, 봉사대 또는 근로대 등의 명목으로 끌려갔다가 군위안소로 가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총동원체제에서 여성의 노동력 동원을 위한 여러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근로보국대, 여자추진대, 학도동원 등이 그것이다.
근로보국대는 1941년 근로보국협력령에 의해, 학도동원은 1944년 학도근로령에 의해 수립된 제도였으며, 여자추진대는 관청에서 알선 장려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한편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처녀공출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봉사대나 근로대라는 말도 여성동원에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은 위의 공식적 제도를 통해 징집되었으나 그 이름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거나, 연행자들이 공출 등의 임의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여성들을 연행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있다.
또는 앞서의 피해자들처럼 취업사기나 폭력적 연행에 의해 군위안부로 끌려갔으나, 피해자들이 당시 세간에 많이 나돌았던 공출 등으로 스스로 자신의 기억에 각인시킨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최근에 보건복지부에 신고한 한 피해자는 1944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경찰에 의해 일본의 군부대로 끌려가 부대와 함께 이동하면서 성폭력을 당한 전형적 군위안부 피해자인데, 현재 피해자와 가족들은 이 피해자가 '처녀보국대로 가서 일본놈에게 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피해자들이 이러한 명목을 기억한다는 사실과, 뒤에 논의할 것이지만 이런 명목의 연행이 주로 경찰과 관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것이 관의 개입에 의한 연행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IV. 연행자
군위안소 정책의 입안 및 위안소 경영에 관하여 그 명확한 지휘명령계통은 당시 일본의 군과 정부의 구조와 관련하여 추정할 수있을 뿐이나, 부분적으로 발견된 문서자료가 일본군과 정부 및 총독부의 주체적인 역할을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준다.(吉見義明 外 編,
1995:16-19)
더우기 누구의 명령을 받아서 위와 같은 사기와 폭력의 방법을 동원했는가의 문제와 관계없이 말단 연행자의 면면은 일본군과 정부 및 총독부의 중심적 역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은 역시 민간인 특히 조선인이 연행자의 가장 많은 비중을 점했음을 확인해 주었으나, 경찰과 군인, 관리도 매우 중요한 직접 연행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민간인들이 대체로 취업사기의 방식으로 피해자를 행한데 비해, 군인과 경찰은 폭력적 연행을 했으며, 관리는 공출 등의 명목을 내세워 연행했다는 조사결과는 대체의 예측을 확인하는 것으로서 피해자들의 진술의 신빙성을 크게 돋보이도록 하고 있다.
<표 7> 연행자 및 연행방식
(1) 민간인
"모집과정에서의 소요를 막기 위해 모집을 맡을 자의 人選에 신중을 기할 것"(支受大日記密, 1938.3.4)이라고 명기한 군문서에서 볼 수있는대로 일본군의 계획에서 군위안부 모집의 주요 말단 연행자는 민간인이었다.
위 군문서에 나타난 바로는, 이 민간인 연행자는 군에서 선정한, 모집만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은 자신들을 연행해 간 민간인이 어느 지점에서 다른 민간인 혹은 군인에게 자신들을 넘긴 후 없어졌다고 증언했다...다음 절에서 논의할 바와 같이, 위안부의 수송은 일본군이 담당했는데, 위안소 관리자 중에도 민간인이 상당수 있었던 것을 볼 때, 모집 담당과 위안소 경영의 민간인은 별개로서, 모집 담당자의 선정과 위안소 관리자의 선정은 물론, 위안부의 모집과 배치의 모든 과정을 군대가 총괄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러나 千田光夏(1978)의 조사에서 볼 수있는대로 위안소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해 간 경우도 적지 않다. 정신대연구소의 조사에서도 조선의 고향에서 연행될 때부터 위안소로 이동할 때도 같이 하여 위안소 관리까지 같은 사람이 했던 경우를 볼 수있다. <표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안소 관리자가 민간인이나 군인이나 모든 경우에 연행자의 다수는 민간인이다.
그러나 군인과 경찰이 연행한 경우 대부분 군인이 관리자인 위안소로 갔던 점이나, 민간인 연행자가 군인 관리의 위안소보다 민간인이 관리자인 경우에 더 많다는 점은, 같은 사람이 위안부를 연행하고 위안소를 관리한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을 말해 준다.
민간인 중에서도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많았던 사실은 피해자들에게 미묘한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조선인이 많았던 것은 조선에서 여성을 연행하는 것이 조선인에게 보다 용이했을 것이라는 점 외에도, 조선인을 포로수용소의 간수 등, 가장 말단의 직접적 전쟁범죄자의 자리에 위치시킨 당시 일본군의 일관된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는 점을 간파할 수있다.
(2) 군인, 군속, 헌병
군인, 군속, 헌병 등 일본군 소속의 사람들에 의해 연행된 경우도 상당하다. 많은 피해자들은 군인이 강제로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으며, 중간에 다른 여자들도 여러 명을 태웠다고 증언했다. <표6>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폭력적 연행은 후기에 올수록 심해졌는데, 이것은 위안부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민간업자에게 주로 맡겼던 위안부 모집에 군인이 직접 폭력적 방법으로 나섰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앞서 논의한대로 군인이 연행한 경우 군인 관리의 위안소로 갔는데, 이것 역시 후기에 군위안부 수요가 늘어나면서 군인이 위안소를 설립하고 여기에 직접 위안부를 조달해왔던 사실을 말해준다.
(3) 경찰 및 관리
역시 상당 부분을 점하는 경찰과 관리의 연행은 군위안부 연행에 조선총독부의 개입을 확인해 주고 있다. 앞서 논의한 여러 부분에서 직접 연행자가 누구인가에 관계없이 관과 군의 관여는 처음부터 확실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경찰과 관리가 직접 연행자로 나선 것은
<표6>에서 보는대로 폭력적 방식과 함께 위안부 수요가 많아진 후반에 많았다고 볼 수있으다. 또한 군인이 연행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찰과 관리가 직접 연행한 경우 군인이 관리한 위안소와 연결되었음을 볼 수있다.
V. 수송 및 배치
군인에 의해 연행된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그외 대부분의 피해자들도 기차나 트럭 또는 배를 이용한 장거리 이동이 시작되었을 때, 군인에게 인계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후 이들은 군인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목적지까지 수송되었던 것이다. 기차를 타고 만주로
끌려갔던 한 피해자는 기차 한칸마다 앞뒤에서 군인이 지켰으며 수송 도중 어떤 지역에서는 창문이 내려져 밖을 볼 수없도록 통제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수송 時 감독을 군인이 했다는 것과 함께 주목할 점은 트럭, 기차 및 배 등 수송수단을 군에서 제공했던 사실이다. 트럭의 경우는 물론 군용트럭이었고, 배를 이용한 경우 대부분 매우 큰 군함을 탔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위안부를 배로 실어 전지로 보낼 때 일본 육군이 관리하는 일본선적의 조용선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차의 경우는 더욱 뚜렷하게 일본군이 제공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특히 중국대륙의 철도는 일본군이 사실상 관리하는 것이었다.(요시미 요시아키, 1998:51-12)
조선의 연행지에서 위안소까지의 수송 뿐아니라 한 위안소에서 다른 위안소로 옮기는 경우에도 군에서 위안부 수송을 담당했다. 신고한 피해자 중 반 정도만이 한 장소에 있었으며, 3회 이상을 이동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동은 위안소가 소속되어 있던 군부대와 함께 한 경우와 위안부 전원 혹은 일부만이 이동한 경우가 모두 있었는데 어느 경우나 군에서 수송을 담당했다. 위안소 이동은 군대의 필요에 따라 군의 교통수단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위안소가 설립되기 힘든 오지에는 군트럭으로 정기적으로 가까운 위안소에서 위안부를 수송하여 일정 기간 이용한 후, 본 위안소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 모든 경우는 일본군이 위안부의 수송과 배치를 지휘.감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VI.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조선에서의 군위안부 동원이 전반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강제연행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사회의 가난을 배경으로, 동원체제하의 전조선의 조직화의 망을 이용해 관이 깊이 개입하여 수많은 나이 어린 여성을 연행해 갔던 것이다.
이 피해자들은 모두가 매우 가난하고 학력이 낮았으나,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특별히 최하층에 속했던 사람이라기 보다는 평균적 생활수준의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군위안부 동원은 민간인과 군, 관이 모두 나서서 사기와 폭력의 방법을 닥치는 대로 사용하여 식민지 조선의 전여성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행한 강제연행이었다고 규정할 수있다.
참고문헌
강만길, 1997, [일본군위안부의 개념과 호칭문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편, {일본군위
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김민영, 1995,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 수탈 연구} (한울).
동아일보, 1927, 1992.
박경식, 1986,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청아).
송연옥, 1998, [일제식민지화와 공창제 도입],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논문.
야마시타 영애, 1992, [한국근대공창제 실시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요시다 세이지, 현대사연구실 역, 1989, {나는 조선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 청계연구소.
요시미 요시아키, 이규태 역, 1998, {일본군 군대위안부} (소화).
이만열, 1997, [일본군위안부정책형성의 조선측 역사적 배경],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편,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정진성, 1997, [일본군위안소 정책의 수립과 전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편, {일본군위
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한국일보, 199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소 편, 1993,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증언
집 1} (한울).
_______, 1995,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_______, 1997,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증언집 2} (한울).
제임스 홉스, 유병용 역, 1995, {증언사 입문} (한울).
東洋經濟新報社, 1980, {昭和國勢總攬}, (東京:東洋經濟新報社).
朴慶植, 1975, [序文] 朴慶植 편,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 1}, (東京: 三一書房).
步兵第9旅團, 1938, [陣中日誌], 1938.7.1-31.
鈴木裕子, 1989, {女性史を拓く 2}, (東京:未來).
植産銀行, 1947, {植銀調査月報}
吉見義明,林博史 編, 1995, {共同硏究: 日本軍慰安婦} (東京:大月書店).
吉澤淸次郞外務省アメリカ局長, 1938, [支那渡航婦女の取扱に關する件], 1938.5.20.
呂集團特務部, 1940, [呂集團特務月報].
李如星, 金世鎔, 1931, {數字朝鮮硏究 第1輯} (京城:世光出版).
________, 1933, {數字朝鮮硏究 第4輯} (京城:世光出版).
日本內閣官房內閣外政審議室, 1993, {いわゆる從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 (第2次報告書).
日本內務省警報局, 1926--1942, {社會運動の狀況}.
朝鮮農村社會衛生調査會, 1949, 『朝鮮の農村衛生』, (東京: 岩波書店).
朝鮮總督府, 1940, {朝鮮昭和15年國勢調査結果要約}.
從軍慰安婦110番編輯委員會, 1992, {從軍慰安婦110番} (東京:明石書店).
千田光夏, 1978, {從軍慰安婦, 正篇} (東京:三一書房).
砲銃隊本部, 1940, [支那事變の經驗より觀たる軍氣振作對策], 1940.9.
Chang, Yunshik, 1967, [Population in Early Modernization: Korea] Ph.D. Dissertation,
Princeton University.
Lee, Hoon K., 1936, {Land Utilization and Rural Economy} (Chicago:University of
Chicago Press).
U.S.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1944,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Aug.20 - Sept.10, 1944 (Date of Interrogation),
October 1, 1944 (Date of Re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