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 o c k n e y , R a i n -
- 오랫만에 비가 내리는군요. 남쪽에서는 위험한 가을태풍으로 피해가 우려된다는 뉴
스를 들었는데, 그 여파인가봐요. 장마에 내리는 장대비처럼 시원하게 쏟아집니다. 잠
시 사무실 현관으로 나가 멍하니 비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어요. 너무 멍하게 바라보
다가 담배를 떨어뜨릴 정도로.
- 저는 비를 좋아합니다. 비가 오면 세상 모든 게 투명해지잖아요. 세상 모든 것들이
물을 머금어 한층 진한 색감으로 더욱 또렷하고 투명하게 다가와요. 또, 빗방울 하나
가 지면에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들은 하나로 합쳐져 '솨아아아'하는 시원한 소리의 오
케스트라를 만들어 냅니다. 가슴에 답답한 게 걸려 있을 때 이 소리를 들으면 오랫동
안 가둬놨던 댐의 물을 방류하듯 어느정도는 해소가 됩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그 소리
는 일종의 최면효과도 있죠. 복잡한 생각을 다 집어 치우고 멍-하니, 차분하게 있을
수 있어요.
- 그렇지만, 아무래도 세상엔 저같은 사람보다는 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비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무심코 했다가, 조금은 음울하
고 이상한 아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었어요.(뭐 반쯤 사실이긴 하지만.) 이렇게 흐리
고 비가 오는 날에는 날씨의 영향 때문에 너무 우울해져서 비가 싫다는 사람도 있어
요. 또 빗소리가 너무 차가워서 몸과 마음까지 차가워진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
게 여러 부류가 있지만, 적어도 비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는 건 사실인 듯 합니
다.
- 이렇게 비는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 심상을 떠올리게 하죠.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들에겐 이 비는 언제나 그들의 작업에 좋은 소재가 됐죠. 비
를 주제로 한 음악들은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에요. 그런 곡들만 모은 잡지기사를 몇 번
이고 본 것 같아요. 비오는 날엔 사진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진을 찍기에도 좋습니
다. 비구름에 의해 약하지만 균일한 빛이 세상에 들어오고, 물체의 윤곽선은 뚜렷해지
죠. 이뿐 아니라 영화, 그림, 소설, 시 등 비에 관한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 모두들 한 번 정도는 물에 빠진 생쥐마냥 비를 흠뻑 맞은 적이 있을 거에요. 학창시
절에 미처 우산을 가지고 오지 못해서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하교하다가 결국 모두들
물싸움을 해버린 기억이 몇 개 있군요. 또 작년에, 술에 꽤나 취했는데 비가 오더군
요. 용케 막차를 탔는데 그만 잠들어서 종점까지 가버린 겁니다. 다행히 집까지는 도
보로 20분 정도 거리인데, 그냥 다 맞아버렸습니다. 그때 얼굴에 흘러내린 게 빗물인
지 눈물인지. 누구도 분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럴 때 또 비가 좋아요.
- 비가 오는 날에 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늘처럼 시원하게 내리는 날, 큰 우산
과 우비를 준비하는 거에요. 신발은 젖어도 상관 없는 아쿠아삭이나 슬리퍼가 좋겠군
요. 그렇게 비에 맞아도 상관없을만큼 중무장을 한 후, 녹음이 우거진 공원에 가고 싶
습니다. 하늘공원이나 도산공원, 선유도공원 정도가 좋겠네요. 아무도 없는 텅 빈 한
가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빗소리를 듣고 싶어요. 둘이라면 더욱 좋고, 혼자라도 상
관 없어요. 그 소리와, 물기에 젖어 더욱 진해진 푸르름을 느끼고 싶어요. 우산을 벗
어 던지고 우비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는 것도 좋겠군요.
- 비가 오면 주당들은 '소주나 막걸리에 반대떡'을 찾고는 하죠. 저도 비
오는 날에 문득 생각난 듯 그렇게 말하긴 하지만 실제로 먹어본 적은 별로 없어요. 대
신, 예전에 학교 앞에 있었던 주먹고기 집에 친구들과 가서 소주를 자주 마시고는 했
어요. 1층에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공간이라 얼큰히 취하면 문에 기대어 가만히 떨어지
는 빗방울을 바라보곤 했어요. 그 주먹고기 집, 딱 대학 1학년이 끝나자 사라지더군
요.
- 비가 오면 외출하는 게 참 고역이죠. 반드시 한 손에는 우산을 들어야 하고, 빗물이
튀어 바지는 흠뻑 젖기도 하고. 신발에 물이라도 들어가면 양말까지 젖어 축축하고.
생각해 보니 이런 불편함 때문에 비오는 날을 싫어하는 친구도 있군요. 역시 이런 날
에는 집에 콕- 박혀 있는 게 몸이 편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어요. 꿉꿉한 집이 싫기도 하고. 지금은 어차피 집은 아니지만.
- 이 비가 그치면 날씨가 조금은 선선해지겠죠? 요 몇 년 간, 태풍이 지나간 후 선선
해지면서 완연한 가을날씨가 오는 게 패턴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신선한 가을 바람
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레여 오네요.
- 살짝 끄적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길게 써버렸군요. 바로 이게 비의 힘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