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9월 특집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 ginger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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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에서 여자들이 '피해자'란 입장에 선다는 것에 대해서 특집을 마련했더군요.

http://www.unninet.co.kr/monthly/main.asp

정희진씨의 글이 돋보이는데 시타의 글도 함께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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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글. 정희진(out67@chol.com) / 여성학 강사, 처녀자리

이중 메시지 속에 살아남기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이혼하려는 여성들이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하는가(남자가 생겼나?)”이다. 하지만, 남편의 초기 폭력을 문제 삼아도,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받기는 마찬가지다. 흉기를 들이대는 강간범을 만났을 때, 소리쳐야 할까? 빌어야 할까? 잘못 소리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고, 잘못 빌었다가는 “너도 즐겼지”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피임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피임 준비를 잘하는 여성은 ‘선수’, ‘걸레’ 취급 받기 쉽고, 피임을 못해 임신하면 남자에게 부담 주는 ‘칠칠치 못한 여자’가 된다.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있으면, “여성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다”, “딸들아 깨어나라”며 계몽이 덜 된 인간으로 본다(‘깨어나야’ 할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남성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저항과 순종 모두 남성 폭력과 성차별의 ‘원인’이 된다.
경찰서나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의 분노나 강한 감정 표현은 과장으로 의심받고, 침착하고자 애쓰면 피해자답지 못한 인상으로 해석된다. 제주도 도지사 성추행 사건의 피해 여성은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 해결 과정 내내 비난의 구실이 되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녀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여자가 어떻게 녹음기를 사용할 수 있나, 누구의 사주를 받았나” 따위의 질문을 받았다. 남성의 구미에 맞는 ‘적절한’ 피해자의 태도는 어떤 포즈일까?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

남성은 여성이 성적 주체이기를 바라지 않지만, 동시에 바란다. 가부장제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성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남성 젠더 시스템에서, 여자는 남자의 인생을 망치는 존재다. 스릴러 영화의 공식,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 하는 팜므 파탈(femme fatale), 요부(妖婦)는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다. 팜므 파탈은, 남성의 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할지 모르지만,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이 때 남성은,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합창하듯, 유혹자 여성의 ‘피해자'가 된다.
원래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정치의식으로서 여성의 피해 의식은 근대 이후 여성주의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아주 최근의 현상이지만, 남성의 ‘피해의식’은 수 천 년 전 가부장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성의 피해의식이 피해자로서의 사회구조적 의식이라면, 남성의 ‘피해의식’은 가해자의 정신 분열, 프로이드식으로 말한다면, 죄의 투사이다. 백인의 피해의식, 자본가의 피해의식, 미국의 피해의식을 보라. 피해의 의미와 내용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의 유동에 따라 구성된다.

여성들은 지금 수천 년 동안 ‘여자라서’ 당연히 해왔던 노동을 거부하고, 너무도 오랫동안 당해왔던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고 있다. 폭력을 당하는 것. 폭력에 순종하는 것. 맞으면서, 강간당하면서 가해자의 앞날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것.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여성의 성역할이었다. 동성애자 인권 담론의 가시화에 따른 이성애자들의 분노와 혼란처럼, ‘권리를 침해당한’ 남성들의 ‘피해의식’은 당연한 것이다.

여성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여성에게 섹스나 모성은 자원이자 억압이다. 남성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 기제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꽃뱀’?)이기도 하기 때문에, 억압(성폭력 피해자?)이 아닌 것이 아니라,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의 원인이다. 남성에게는 모순이지만, 여성에게는 연속선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자 억압이라는 사실은, 성매매와 성폭력이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주체는 오로지 남성이라는 의미이다.

주체와 피해자의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gendered)는, 남성 주체의 이해(利害)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 여성’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는 겹칠 수 없는 상호 배타적 것으로 설정된다. 주체 아니면 피해자다. 그래서 여성이 행위자, 주체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피해는 곧 피해자화로 연결된다. 피해는 타자화를 동반하지 않지만, 피해자화는 타자화를 전제한다. 피해 여성은 남성주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의 입장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더럽혀진 여자거나 ‘기껏해야’ 무기력한 희생자지, 젠더 계급투쟁의 생존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의 시각이 곧 사회의 시각이 된다. 특히,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피해자화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진부하면서도 세련된, 가장 오래된 타자화 방식이었다.

피해자화는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젠더 사회에서 남자들은 성공을, 여성들은 불행을 ‘경쟁’하는 이유이고, 여성들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상담을 청한 어떤 성폭력 피해 여성은, 칼을 들고 덤비는 성폭력 가해자를 설득하여 임신과 성병 예방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칭찬했지만, 그녀에게 고소를 적극적으로 권할 수는 없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 각본에서, 이 여성의 뛰어난 행위성과 협상력은 “섹스(강간) 동의”를 의미한다. 남성만이 성의 주체라는 인식에서는, 성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은 무성적(asexual)이거나 문란한 여성으로 해석된다. 여성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있어야만 피해가 인정되고, 피해자로서 ‘권력’을 부여받게 된다.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수기? - 남성 언어로 말하기의 고통

전 세계에서 유래 없이 ‘빠르고 쉽게’ 제정되었던 한국의 성폭력 법제화는, 여성의 고통을 남성의 언어로 재현하는 것의 한계와 남성의 ‘피해의식’이라는 역효과(backlash)의 위력을 확인시켰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성폭력만큼 인식론에서, 방법에서, 관계에서 논쟁적인 이슈도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인식론도 여성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한다.

성폭력 문제는 “여성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 “남성의 언어”, “여성의 관계성과 남성과의 사랑-상처-고통-착취 당함의 공통점과 차이” 가 도대체 무엇인지, 여성주의를 포함하여 기존의 모든 담론과 인식 체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거의 모든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은 논쟁이 폭발, 내연(內燃)하는 장소이다. 성폭력 사건이 가시화되기만 하면,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격렬한 논란에 휩싸인다. 또한 성폭력의 법제화는, 국가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상담소 운영 등을 통해 국가 정책의 하부 집행자가 된 여성운동 단체의 이중 역할 속에서, 여성운동의 정체성과 진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학생이든, 노동자이든, 공무원이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에 강의를 가면, 일단, 그들은 자신이 교육 대상, 잠재적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못견뎌한다. 어느 집단을 가든 남성들은 똑같은 문제제기를 한다. “성폭력 당하는 남성도 많다”, “여성부는 있지만, 남성부는 없다”, “여성 상위가 지나치다. 페미니즘은 여존남비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여당의 ‘친일 과거사 청산’ 주장에 야당이 ‘친북 과거사 청산’으로 대응하는 것과 같은, ‘남자도 성폭력 당한다’ 는 주장은, 여성주의가 기존의 보편성, 객관성, 평등 개념을 해체, 재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성폭력, 아니 모든 폭력 사건 해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남성들은 ‘가해자 인권론’으로 맞서고 있다.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여성의 권리 주장,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다. 자유주의 철학은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걸림돌인 것이다.
현재 反성폭력 여성운동은 (기존의 언어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해있다.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과 여성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는 주장을 동시에 해야 하고, 성폭력은 섹스가 아니라 폭력인데 동시에 그것은 성적인 폭력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죽어도 잊어지지 않는 죽음과 같은” 성폭력의 극심한 피해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피해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주장해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젠더 범주의 딜레마

모든 여성은 여성이지만 동시에 여성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성폭력 반대운동의 결정적인 딜레마는,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 당한다”는 젠더 범주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식론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성별 정체성으로 환원시켜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제 프로젝트에 기능적이다. 성폭력 발생 원인은 물론, 이후 투쟁은, 피해 여성의 사회의식, 자원, 장애 여부, 인종, 사회적 관계망, 학력, 계급, 외모, 나이, 건강 상태, 비혼 여부, 지역 등등의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성폭력의 원인 그리고 젠더 자체가 젠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젠더 인식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여성의 불행이 젠더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피해자 중심주의’나 ‘성폭력 개념 확장론’은 여성들의 차이를 젠더로 환원한다. 여성주의는, 이제까지의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기존의 객관성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이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 관계에 따라 유동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마치 모든 피해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피해자의 경험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 같은 오해를 준다.

같은 성폭력도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억압받고 다른 강도로 피해를 느낀다. 어떤 여성은 포르노를 보고 성욕을 느끼지만, 어떤 여성은 불쾌할 수 있다. 젠더 범주는 여성을 개인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묶는다. 이때 포르노를 불쾌하기 느낀 여성의 경험은 의미화 되기 어렵다. 남성 사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다는 여성도 있는데, 지나치게 예민한 거 아니냐?” 여성이 느낀 것이 아니라 개인이 느낀 성폭력이 성폭력 피해의 의미를 구성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 인식의 근거를 젠더가 아닌 여성 개인의 몸에서 찾고, 법 담론 중심의 성폭력 개념을 극복해야 한다. 젠더에 기반 해서 젠더를 해체하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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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피해를 말한다


글. 시타(sitafight@freechal.com) / 언니네 편집팀, 천칭자리

“여성의 말을 무조건 모두 다 믿어주자는 것이 ‘피해자 관점’인가?"

이것은 성폭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만나게 되는 익숙한 질문이다. 여성들이 피해를 말하기만 하면 냅다 ‘꽃뱀’ 운운부터 시작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이 말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마초 관용어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들은 성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한 여성은 불쾌했다고 하고 다른 여성은 재밌었다고 할 때, 재판에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건 분명 성폭력이었다고 힘껏 지지했던 피해자가 시간이 흐른 뒤 그 경험을 다르게 이름붙일 때, ‘나도 너랑 똑같은 경험이 있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는 걸’ 이라고 말하는 친구를 만날 때, 불쾌했던 건 맞지만 절대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여성을 만날 때, 우리는 ‘피해자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무슨 뜻이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진다. ‘피해자’라는 말에 덧씌워져 있는 취약함과 무력함과 상실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말을 할 수 있을까.

여성의 말을 무조건 믿어주는 것이 ‘피해자 관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란 불안하다.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그나마 이제야 조금 들려질 듯 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영영 파묻혀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예’라고 대답하면 여성들의 말이 하나가 아닌 여러 목소리라는 현실과 ‘피해자 멋대로주의’라는 남성사회의 비난 사이에서 길을 잃을 듯 위태롭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예/아니오로 대답해야만 하는가? 의미는 맥락에 의해 결정되므로, 누가 왜 묻느냐에 따라 질문의 의미 자체가 달라진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해답’이 아니라, 이 질문이 놓인 사회적 위치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질문이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어떤 조건 속에서 ‘피해’를 말해 왔는가? 여성이 피해를 말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반응을 살펴보는 것은, 피해 말하기/듣기가 어떤 정치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그 중에서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흔히 듣게 되는 두 가지 말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이나 권력 구조의 단면을 확실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 “남자들도 피해자다!”는 말과 “지나친 피해의식 아니냐?”라는, 무한반복되는 남성 사회의 반응 말이다.


남성 사회의 돌림노래 -- “남자들도 피해자다!” “피해의식 아니냐?”

“남자들도 피해자다!” 이 말은 거의 항상 여성이 피해를 말한 후에 나온다. 즉, 이 말은 대개 여성들의 피해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서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응답의 진짜 의미는 다른 데 있다 -- 남성도 피해자라고 말함으로써 ‘피해’라는 말이 성별과 무관한 것처럼 표백하는 것. 그리고 ‘너만 피해를 당한 게 아니다’라는 말로 이제 막 시작된 여성의 피해 이야기를 멈추게 하는 것.

그러나 사실 남성들이 ‘피해’(역차별, 심지어 인권침해)랍시고 주장하는 많은 것들은 (왜 무거운 거 들게 하냐, 왜 데이트 비용 내라고 하냐, 왜 부모는 남자만 모셔야 하냐, 왜 남자만 군대 보내냐 등) ‘피해’가 아니라 일종의 자격 획득 과정인 경우가 많다. ‘남성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려면 먼저 ‘남성’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한 개인을 ‘남성’으로 호명하고 권력을 부여하는 구조를 문제시할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피해’라는, 그 핏기 어린 정치적 단어를 낼름 가져다 쓰려는 심보를 보고 있자면 가끔은 구역질이 난다.

여성이 말하는 피해가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피해와 ‘여성임’의 관계, 즉 그 피해가 구조적인 성별 피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별권력관계에 대한 인식이 어떤 경험을 ‘피해’로 명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들도 피해자다!”라는 말이 나쁜 것은, (개인남성들이 어떤 피해도 받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관계를 시야에서 치워버림으로써 여성들이 경험하는 피해의 출처와 의미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는 남자들의 목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큰데, 왜 여자들은 어떻게든 ‘피해자’라는 걸 숨기려 하거나 심지어 ‘피해자’로 불리기를 거부하는가? 왜 여성들은 자기 고통을 ‘피해’로 명명하기 까지 몇 겹의 검열을 거쳐야만 하는가?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키워드는 “피해의식 아니냐?”라는 익숙한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회가 여성에게 자기 검열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의식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하려면 스스로 충분히 검열하라! -- 충분히 참았는지, 그 다음에는 충분히 안 참았는지(저항했는지) 돌이켜 보라. 사람들이 ‘피해’라고 믿어 줄 정도로 충분히 심한지 생각해보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안 믿을 정도로 ‘너무’ 심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라.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여성도 나와 똑같이 느꼈는지 비교하라. 등등 -- 이런 검열의 명령 속에서 여성이 느낀 것들은 하나씩 잘려 나가고, 잊혀지고, 편집되고, 마침내 사라진다. 그러니, ‘피해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절박함은 몇 겹의 검열에서 살아남은 피투성이 욕망이지만, 피해를 인정하는 권력이 자신에게 없는 한 결국 실패하고 마는 바램이기도 하다.


피해 vs. 피해의식? -- 가해자 중심 사회의 허위질문

여성들이 경험하는 많은 피해들을 ‘피해의식’이라고 비난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말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그러한 것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없어져 버려 유령이 된다. 피해가 ‘피해 (당했다는 잘못된) 의식’이 되는 것이다. ‘피해’에 대한 여성주의의 인식론은 이 과정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들을 성별권력관계로 인한 ‘피해’ 로 정치 의제화 한 것은 여성운동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성운동은 성별화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에 대한 오랜 의미 투쟁의 과정에서, “피해자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명제를 정립하고 공유해 왔다. 그러나, 여성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피해’를 말하고/듣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피해자 관점”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는 남자의 경험을 설명해주는 수 없이 많은 단어와 재현물과 문화 각본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통해 남자의 경험과 인식은 ‘누구나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 되어 왔다. 반면 여자의 경험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의심스럽고 이상해 보인다 (강간피해 직후 신고를 한 피해자는 "너무 똑똑하다고" 의심받고, 두 달이 지나 신고를 한 피해자는 "너무 멍청하다고" 의심받는다.) 여성이 아는 남자와 술을 마시고 여관에서 강간피해를 당하면, 남성은 ‘거기까지 따라왔으면 그 여자도 원한 거 아닙니까?’라고 하고, 많은 판사들이 이것을 ‘법적’으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상식적’으로 인정한다. 술만 한잔 더 하자는 남자 말을 신뢰했다는, 혹은 그 남자를 좋아하지만 성관계 의사는 없었다는 그 여자의 상황 인식은, 남자의 인식을 ‘객관’이라 이름붙이는 인식체계 속에서는 ‘납득 불가능’하다.

이러한 권력의 역사를 무시한 채 “피해자 말을 무조건 믿는 것이 피해자 관점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당연히-쉽게-‘객관’으로 이해받아 왔던 남성의 말이 상대화되는 것에 대한 공포에 불과하다. ‘진짜 피해’를 증명할 방법을 찾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피해와 피해의식을 구분하고 후자를 ‘가짜 피해’, ‘허위의식’, ‘지나친 예민함’으로 치부해버리는 바로 그 권력을 문제 삼아야 한다.


여성들이, 피해를, 말한다 -- ‘객관성’이라는 권력을 상대화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성폭력은 ‘맥락’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이해되고 판단될 수 있다. 가령 A가 B에게 한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상황/맥락에서 누가 누구에게 한 행위인가에 따라 성폭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성별화된 사회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상황/맥락’ 인식은 서로 다르다. 남성 사회에서 남성의 인식은 설득과 입증 없이도 통용된다. 따라서 ‘피해자 관점’은, 남성의 인식이 힘을 갖게 되는 강력한 방식 -- 그것을 ‘객관적’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 -- 속에 작동하고 있는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이었다. 피해를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에 우선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힘을 실어 주자는 여성주의의 주장은, ‘그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피해’ 라는 ‘결론’으로 상황이 정리되길 바래서가 아니라(피해자로 ‘인정’받기), 오히려 그 말을 ‘시작’으로 자기 경험을 말하고 나누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물꼬를 트기 위한 정치적 개입인 것이다.

같은 상황에 대해 두 여성이 다르게 인식한다고 해서 둘 다 ‘객관성’이 없거나 어느 한쪽만 ‘객관적’인가? 그래서 둘 다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는 둘 중 한 명이 침묵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남성의 인식에 권력을 부여하는 ‘객관성’이라는 수사학은, 여성이 가져야 하는 게 아니라 상대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인식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려면, 결국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들 중 어느 한 가지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객관성’이라는 권력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피해를 말한다는 것은, 성별 권력관계의 피권력자가 자기 경험을 스스로 명명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자 거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그러나 ‘같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속에 있는 여성들로서’, 다른 여성들의 말에 더 많이 귀 기울이고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피해/‘피해자’라는 슬프고 비좁은 범주는 지금보다 다른 어떤 것으로 넓어질 수 있다고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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