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우리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다. 하우스메이트들이랑 거창하게 하지 말고 한 열댓명 정도만 초대하자라고 합의를 본 상태라 난 이곳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인 프랑스 아줌마 딱 한 사람만 초대했다.
파티에 온 사람들하고 열나 수다를 떨고 있는데 뒤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있다. 과테말라 출신 사진작가인 ***이다. '햐, 파티하는 걸 우째 알았지? 여튼 저 인간 파티 냄새 맡는 건 귀신이라니까?'라고 속으로 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프랑스 아줌마가 말한다.
아줌마: 야, 저 인간 스파이야. 나 저 인간하고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다.
나: 아니 무슨 말이예요, 스파이라니?
아줌마: 사람들이 그러더라구
나: 에이, 사람들이 그런다고 근거도 없이... 나도 저 인간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스파이라고 몰아부치는 건 너무하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아줌마이긴 해도 정확한 근거도 없이 사람을 스.파.이로 낙인 찍어서 따돌리는 건 아닌 것 같아 입바른 소리를 해버렸다.
스파이...참 21세기 흑인 정부가 들어선 남아공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인데 이곳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나름대로 입조심을 하며 산다.
우리 동네 까페 골목에서 제일 잘 나가는 까페 중 하나에는 스파이들이 상주를 하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한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몇년 전에 그 골목에 죽치고 앉아 친구처럼 여기저기 남들 파티에도 가고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도 같이 하던 사람 중의 하나가 그동안 자기가 수집했던 자료를 갖고 경찰에 몇몇을 찔러 그 몇몇이 아닌 밤중에 붙들려 가 고초를 당한 적도 있다. 물론 그 후로 그 인간은 그 동네에서 자취를 감췄고. 햐...우리나라에서만 국가보안법이 무서운 게 아니란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1994년 넬슨 만델라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남아공 헌법이 탄생했는데, 그 헌법은 남아공 인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99% 영국 헌법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1955년 남아공 흑인들에 의해 작성된 Freedom Charter의 모든 문구들은 그것들이 가지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들 때문에 전부 폐기되고 남아공인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국가를 지배하는 헌법을 영국 헌법에 의존해 버렸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서 명성을 떨치던 국가보안법도 여전히 존속시키고.
처절한 투쟁으로 일궈낸 새로운 흑인 정부 하에서 국가보안법이라...대체 왜 국가보안법이 필요하지? 이제 자유가 아닌가? 대체 왜!
처음 이곳에 와서 정치적인 인간들을 많이 만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남북한, 쿠바, 베네수엘라 등등 논쟁거리가 다분한 지역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피력하고 진보적 시선을 감추지 않는 인간들이 명백히 삽질하고 있는 남아공 정부 얘기만 나오면 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지지를 보내는 것에 갸우뚱하곤 했었다. 남아공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상당히 보수적인 아프리카너들 뿐인 것이 이상하고 야릇하기만 했다(요즘 조선일보와 열우당 일부 지지자들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그들이 획득한 자유와 그 자유의 바퀴가 되어 주었던 초기 ANC(African National Congress) 지도자들에 대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민주화 10년 아닌가. 그런데 넬슨 만델라도 그렇지만 타보 움베키가 취하고 있는 반민중적인 태도에 대해 침묵은 고사하고 "우리는 ANC 밖에 없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은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 중 다수는 물론 아직까지 ANC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 맘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지지를 하고 있지만 소수는 그렇지 않음에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가끔 스쳐가듯 내뱉는 말들 속에서 포착할 수 있는 미묘한 무엇.
그렇지, ANC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는 ANC 지지자들이 대부분인 테이블에서 집단 다구리를 당할 뿐 아니라 몇년 전에 친구인 줄로만 알았던 스파이가 꼰질러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던 자기 친구들 짝이 날 게 뻔한데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말콤 엑스도 아닌 것이 민중의 횃불이 되고자 자기 자신을 불사르는 모험을 하겠는가 말이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지켜주던 국가보안법이 민주화 10년의 흑인 정부에서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며 사람들 사이에 프락시 소문을 키우고 있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 같은 인간이 있으면 "야, 저 인간 스파이란다"라고 지들끼리 쉬쉬하며 그가 있는 곳에서는 입단속을 단단히 하는 사람들. 아, 남아공판 바디 스내처구나. 우리 속에 적이 있다.
지난주 스티브 비코(남아공의 말콤 엑스) 사망 27주기를 맞아 있었던 행사에서 어떤 연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비코와 함께 안티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할 때 우리들은 반민중적인 것은 무엇이라도 비판할 자세가 되어 있었으며 그렇게 했었지요. 민주화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흑인들의 눈에, 입에 비판은 사라지고 찬양만이 남았습니다. 과연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세계엔 찬양할 것 밖에 없을까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무서운 칼날에도 굴하지 않았던 우리의 저항 정신은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ANC 일당 체제인 남아공. 정부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는 형제들에게서 날라올 집단 다구리와 스파이의 밀고를 두려워해야 하는 민주화 10년의 남아공.
옆에 자리에 얌전히 앉아 나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떡거리며 경청하고 있는 내 친구인 듯한 인간이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며 입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ANC 일당체제 민주화 10년이 지난 남아공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