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면 기린(麒麟)?

  • 칸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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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발목을 다친 적이 있습니다. 이등병 때였는데 자대배치받은 첫 날

고참들과 농구를 하다 삐끗하는 바람에 크게 다쳤지요.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 없는 이등병 시절인지라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100일

휴가를 나와서 X-레이를 찍어보니 뼈에 금이 갔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오래되어 금 간

곳이 저절로 붙기는 했지만 시큰거리는 아픔은 최근까지 이어졌습니다.



날씨가 추워지자 새삼 다친 부위의 시큰거림이 심해졌습니다. 어머니 말씀이 부항

치료를 받으면 씻은듯이 낫는다나요? 귀가 솔깃하여 생전 처음으로 부항이라는 걸

뜨러 갔지요. 침으로 발목 부위를 찌르고 공기압축을 하자 피가 스며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뼈가 다쳤는데 피는 왜 뽑나. 미덥지 못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현기증이

밀려 왔습니다.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거에요. 치료사에게 어지럽다고 했더니 앉아있던

자세를 바꿔서 누우라고 했습니다. 아,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가보다. 이대로 잘못되어

죽는거 아니냐... 로빈 훗도 이렇게 피를 빼다가 죽었지...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하얗게

질려서 누워 있는데 치료사 말이 놀라서 그렇답니다. 저 말고도 그런 사람이 한 둘 있었다

는데, 자기 몸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보고 놀라서 그런다는 거에요. 무슨놈의 엄살이 그리

심하냐고, 이렇게 사지육신 멀쩡한 젊은 남자가 부항뜨는 거 보고 놀라 쓰러지는 경우는

첨 봤다고 혀를 차더군요.



"12국기"에 따르면 자비로움의 상징인 기린(麒麟)은 피를 바라보기만 해도 정신을

잃는다고 하지요. 딱 제 얘기가 아닙니까. 때때로 기린이 이쪽 세상으로 건너와

사람의 껍질을 쓰고 사는 경우가 있다는데, 어쩌면 저는 저쪽 세상 어느 나라인가의

기린일지도 모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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