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펌글, 내가 비평을 좋아하는 이유
저는 평론 내지는 비평글 읽는 걸 무척 좋아해요.
한 편에서는 쓸데 없는 글이라고 비난 받기도 하지만, 그런 글도 있지만...
영화,음악,드라마, 공연에서 잘못된 점보다는 그런 문화와 저와의 소통할 수 있는 면이 소중하거든요.
제가 부족해서 미처 공유하지 못한 부분, 미처 한 주파수로 느끼지 못한 부분을
평론글을 보고 소통하기 원해요.
아일랜드 누구와 누가 사랑하고, 그리고 멋진 대사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다른 면이 있더군요. 제가 미처 느끼지 못한 면들...
사족이지만, 맛대맛에서 전혀 먹어보지 못한 외국음식과 많이 접한 음식이 나온다면,
접하지도 못한 그림만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선택하기가 더 어렵지 않나요?
나는 멸치가 들어간 , 비계가 들어간, 해물이 들어간 , 여러 가지의 김치 찌게의 차이를 알지만,
그림만 멋져 보이는 음식은 순전히 상상만 해야 하니까요.
홈에서 이안숙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작가와 시청자와의 소통하는 부분을 통해서 저도 타인의 눈을 빌어서 소통할 수 있다는게 기뻐요.
작가의 입장에서도 제대로 소통하는 사람이 기쁘지 않을까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이 정도 글이면 그냥 감상이 아니라, 비평글로 봐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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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아의 특별한 만남, 국과 재복 둘다인 이유, 양면의 얼굴
“둘이 그림은 돼요. 근데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중아랑 나랑 특별하게 만났어요. 나한테 도장처럼 박혀있어요”
그 특별한 만남
하지만 그 특별함도 두개다. 다시 짚어보자.
<운명적 만남>
국 , 기내에서
국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중아는 약을 먹으면서,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국을 쳐다보면서.
"맛있어요?" (넌 밥이 넘어가니? 이 세상에서)
"근데 왜 그렇게 돌아다녀요. 자리 비워 놓고, <제 옆자리 사람이죠.>"
"보지마요 ....실눈뜨고 있었어요"
머리를 창문에 박는 중아의 얼굴을 국이 손으로 막았다.
"그러지 마요. 무서워요"
"내 얼굴은 똥이예요. 댁 손에 똥 묻었어요"
"잘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중아는 지옥 같은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 살 이유가 없다.
그런 중아는 마지막 실눈을 뜨고 국을 보았고
그의 바른 생활을 비웃으며 죄의식과 분열로 조롱했다.
국은 처음으로 ‘나 아닌 너’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나 아니면, 안된다. 무자비한 세상에 너를 맡길 수 없다.
그 여자에게 인생을 걸고 싶다.
<삶에 대한 조롱>대< 삶은 지켜야한다>
<죽음 끝에 간 인간>과 <꿈도 기쁨도 없이 누구의 뒤치다꺼리나 하던 인간>의 만남,
대극점이 되는 두 사람이 <삶의 의미>를 묻는다. <왜 사나>
<재미로 문제를 풀는 중아>, <사생결단으로 풀어야 되는 국>
두 사람의 수수께기가 그들의 ‘운명’이다
중아의 그 조롱이 국을 도발하고, 국이 중아를 살리게 했다.
아직 이유는 없지만 그렇게 살게 된 것이다.
재복 , 횡단보도에서
동생을 입양 보낸 <죄의식>으로 대충대충, 떠돌며 사는 재복이
입양되어져 가족의 죽음을 맞고 죄의식으로 죽으려 하는 중아가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가 떨어뜨린 동전은 죽은 오빠를 떠올리게 하고,
차에 치일 뻔한 그를 구한다.
그들의 배경은 혈연은 아니었지만,
재복이 중아의 가해자일 수 있고 중아는 재복이 죽은 오빠 대신이라
<살려서>, <서로의 죄의식을 풀어줘야 되는> ‘운명’ 이다
그리고 그들의 태생적 <자유로움>은 서로의 고통, 아픔을 씻어주고, 치료해 주었다.
죄가 씻어지니 기쁘게 살고 싶어진다.
<이유 없이 살게 한 국> 대 <삶에 대한 기쁨을 주는 재복>의 대결
이미 지켜야 되는 삶으로 들어와 버린, 중아와 재복에게
그 삶을 다시 버리지 않는 한, 국이 이길 수 밖에 없는 게임이다.
<재복이 떠나고 중아>
죄의식, 죽음이 되살아나고, 피에 대한 집착에 빠지는 중아,
먼지 같은 방황 속으로 유혹되어 진다.
자기가 그리는 그림의 가족을 만들 거라 했던 중아는,
국이 ‘도와달라’는 말에 ‘주문처럼’ 옆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재미없고 과로하고 못 먹어 쓰러진다.
(중아는 국의 도와달라, 살려달라, 너 없으면 안된다에
전방위적으로 응한다. 마치 마법처럼. 꼼짝 못한다.
그것은 '생명본능에 순응한 자기반사'인 것이다)
빨간 불인데 자꾸 건너려 발이 내딛어 진다.
질주하는 오토바이에 치일 뻔 한다.
사라지는 오토바이를 쳐다본다.
<수수께끼>
중아와 국이 뭔가 잘못 되어있다
중아에게
자유로움, 충동, 죄의식의 <재복>은 끊임없이
<국>의 가족 지키기를 위협한다.
실은 그들의 수수께끼를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국 왜 지켜야 되는지, 살아야 되는지 아직 답하지 않았다.
> 중아 국에 대한 도발, 생에 대해 부정 했지만, 그 도발은
사실은 구원(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이였다.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연이 아니라 중아여야 되는 진짜이유
재복이 아니라, 국 이여야 되는 진짜이유
중아와 국은 자신들의 특별한 만남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뜻을 못 풀고 있으니 답이 안나오는 것이다.
<국>은
속 깊이 지독한 외로움을 감추고, 버티면서 살고 있었다.
중아를 살렸지만 자기 안에 외로움만 있고,
중아를 상대할 ‘자기‘, 살아야 되는 이유, 기쁨이 없다.
재복에게는 있고 자기에게는 없는 그 기쁨에 질투 나고
맞지 않는 신발과 맹세는 족쇄가 되어 버렸다는 것도 알지만
놓아줄 수 없다.
나 너없이 못살아 나 힘없다..... 내가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을게..
국은 외로움을 밀쳐내고 중아를 세웠다. 마음속에 기쁨이 생긴다.
그녀를 사랑한다. 답답할 정도로 조금씩,
하지만 아직도 '내가 너를 지키고 있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
시연이를 만나는 것은 그 고집을 피우며
관성적으로 힘이 들어가(갑바 세우고 싶을때),
잠시 쉬고 싶어 만나는 것이다.
국은 중아에게 말해야 된다.
삶은 기쁨이니 살아야 된다고,
그리고 그 기쁨, 나에겐 오로지 너라고
<중아>는
삶이 생명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빠의 죽음을 밟고 서 있다는 죄의식에 눌려 그 순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쨌던 생명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먹는다.
의식이 있는 인간으로서는 불가해한 이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기만 한다면, 먼지로, 바람으로, 방기하는 것,
도피를 위한 도피, 의식의 과잉이다.
자기 죽음 끝에 갔을 때, 생명본능에 순응했던 자신을 알아야 한다.
중아는 국에게 말해야 한다.
삶 위에 떠도는 사람, 죄의식, 사랑이 맞는게 아니라
삶 속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이, 사랑이 맞다는 것을
환상이 아니라 생명 본능에 충실해야 된다는 것
사랑보다는 정, 가족보다는 사랑, 자유보다는 절제라고
<중아의 두 사랑>
국은 <삶> 살게 해주는 존재.
재복은 <죽음> 죄의식으로부터 삶을 해방시켜주는 존재.
인간 자체는 <삶과 죽음의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두 개의 사랑은 존재하기 힘들다.
가족을 만들고 삶을 지켜가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원죄를 씻고 삶의 본연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중아는 두개의 사랑, 그 양면에서 방황하고 있고
또 재복과 국을 흔들고 있다.
중아가 말한 <단 한사람>은 <양면의 한 사람>.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둘 다 필요한 <한 사람인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목도리도 두개다.
중아가 그 두사람의 배치를 어떻게 할지....
현실의 우리에겐 <내 옆자리의 사람>과 <마음속에 나를 흔드는 존재>, 그가 있음일 텐데...
바로 앞에서 둘을 봐야되는 중아로서는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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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기다림, 느림은 자기속 운명을 깨닫기 위함이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사랑은 없다.
가족에 의해 버려지고, 죽음에 의해 상실되니, 죄를 짓고, 외로운 자들.
씻을 수 있고, 채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인데 그 답마저 엇갈려, 뒤엉켜 온다.
<자유로운 자 중아, 재복> 자기 분열, 죄의식으로 “환상과 질주”를 좇고.
<외로운 자 국> 최소의 착한 도리, 바른생활로
<두려운 자 시연> 마치 영혼을 판 악녀 행세(욕하고 세상을 저주)를 하며
실은 "안주 하고 있는 “
자기 정체성, 모순을 반대의 운명으로 엇갈리게 해서 비춰 주고, 사랑을 좇아서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사랑을 좇으려 하니 또 그 가족이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서로의 상처를 후빈다....... 죽음 같은 고통.......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이 없으면 영원히 자기세계에 갇혀서 동어반복 할 수 밖에 없다.
강국이 미적거린다. 모호하다
그의 행동. 감정 반경이 너무 좁은 것 같지만, 사실 현실에서 강고한 국들(가부장적
아버지, 남편, 친구)의 변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작지만 큰 변화, 미세한 그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절망하고, 무엇에 변화하는 지,
단단한 그 돌의 <오랜 기다림, 무르익음> 이치, 아름다움을 찾아주기 위해,
우리가 그들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들이 세상의 실패자로, 낙오자로 여기는
우리 자신의 역겨움도 구원될 수 있다.
우리는 소중한 몇 가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은 멋있다. 너의 말이 맞다. 그들을 용기백배 시키는 것은 격려.
그들의 닫힌 문을 열고 싶다면 고백하게 할 것. 사실은 세상이 잔인해서 무섭고, 외롭고, 힘없다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세속적인 실패를 달게, 함께 지고 가려 할때,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세속으로 부터....
그리고 중아와 재복의 "태생적 자유로움" 뿐만 아니라,
국의 배워서 익힌 "바른생활, 처세, 수준"도
이기적 계산이 아닌 운명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국과 중아의 첫 만남에서(기내에서)
' 실눈만 뜨고도 보이는 '누구'에겐가 도발되어지는 ' 것이다.
국도 의도하지 않은 자기 방식의 덫, 운명을 깨닫게 되는 지점이 올 거다.
그때가 국이 비로소 당당해지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할 것이다.
중아는 국의 바른 생활을 비웃었다.
자신의 더러움을, 분열을 쏟아냈다.
그리고 잠이 안와요. 도와주세요...
중아는 실눈 같은 의식으로 국을 보았고, 국의 모습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도발 하게 하고, 살게 한 것이다.
중아는 <비웃음>과 <구원>을 동시에 던졌고,
국은 그 문제를 풀어야 되겠다는 사명을 안은 것이다.
이 답은 국 자신의 인생(방식)과 사랑, 운명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중아는 원래 재미로 문제를 풀지만,
국은 사생결단으로 풀어야 되는 것을 모르는
중아의, 아니 국의 바른 생활이 도발한
<두 사람의 수수께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를 풀어야 만, 하나를 풀 수 있는
더딤, 무딤, 기다림, 단단한 국.
재복의 질주가 아슬아슬하고,
국의 배워가기가 이다지도 느린 것은
인생을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인생을 위해서......
모호하고 혼돈에 빠진 것 같은 <아일랜드의 깊은 속뜻>
극으로 치다를 것 같은 긴박감이 갑자기 느려지면서, 맥이 끊겨지는 것 같다.
<중아>는 재복이 없으면 안 된다고 울고
<시연>은 국의 손길을 다시 느끼며 아저씨가 날 좋아할지도 모르는 상상을 한다
힘내서 좇아가야 하는 <국>은 지친다고 하고
<재복>은 다시 중아가 아파보인다고 걱정이고
<중아>도 심심해서 죽고 싶다는 재복이, 심심해 보인다고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제 자리 걸음 같은 그 흑백 장면들은 지나갈 지점, 그들의 문제, 함정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한다.
제대로 답을 찾고, 그 어려운 소통을 보여주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답들이 쏟아지고, 국의 느리지만 더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중아는 한사람의 양면처럼 <삶의 국>과 <죽음의 재복> 둘 다를 사랑하고,
생명을 잉태했고, 가족이 따뜻하다는 것, 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혼돈 속에서, 그녀가 내 놓은 카드는 <독립과 책임>이다
옆에는 있지만 들려 붙지 않는 <스스로를 책임 질 수 있는 삶>
................... 책임, 인정, 악수
동석은 중아에게 자기가 <책임> 질수 있게 인생 설계하라고 한다.
“맞지만 남이 해준 선택 책임 질수 없으니, 틀리고 어리석고 이기적이라서
못 했던 거 원해, 니가 꿈 깰 때까지. 기다릴께”
“중아가 충동적이라고 생각해. 중아도 책임을 가져야 돼, 가족에 대해,
가족 지키면 자기도 지켜지는데, 정신은 맑은 거 보니 눈앞에 이재복
있어서 그런가봐”
중아와 국은 책임을 지는데 ‘자기’에서 출발하느냐, ‘가족’에서 출발하느냐‘로
또 맞서게 된다.
국과 재복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답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가 삶을 책임져야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스스로도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길.
이제 중아가 맞다.
재복은 중아를 떠나라는 국에게 국의 책임지는 모습도 ‘멋지지만’
중아가 자기 자신한테 책임지고 싶어 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라고 <인정>해 주라 부탁한다.
그런 재복에게 국은 악수 한다. 왼손 <악수>다.
서로 인정하면서 반밖에 인정할 수 없는 사이.
국은 중아에게서 재복을 떼어내지만
그의 충고는 반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혼자가 싫다
국은 사실 사랑뿐만 아니라, 삶에도 ‘자기’가 없다.
그래서 자기를 책임질 수 없고
대신 가족을 만들어 그 가족을 책임지며 살겠다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제도에 철저하게 의존한 외로움의 진수다.
국은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 안에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재복을 좋아하는 것이다.
재복이 국을 ‘스승’이라고 할 때,
재복 입장에선 ‘배울게 많아서’ 국에 입장에선 ‘따르니까’,
인간애, 형제애도 있지만 중아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면도
그들의 관계가 쉽게 깨지지 않게 하는 국의 이유이다.
국에게 대학 강사 제의가 온다.
국은 자기의 본질에 맞는 삶을 드디어 좇아가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국을 따를 것이다. 국은 외로움을 채울 것이다.
..................기쁨형 인간
시연은 기쁨형 인간이라 ‘사람을 좋아’하는데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쪽팔려서 그동안 친구도 없이 지냈다.
가족과 재복을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하고 돈으로 떠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무한대의 기쁨 추구형인 이 시연은
가족이 있어도, 재복이 있어도 외로웠던 것이다.
(권력형 인간, 연예인..들이 실은 아주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자기 외로움을 충족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가족 내에서 권력화, 가부장적인 아버지도 이와 비슷 )
.................횡단보도, 오토바이
바람에 날릴 것 같은 중아가 혼자 횡단보도에 섰다.
횡단보도는 새 길을 가기위해 건너야 하는 통과의례다.
시연과 재복은 건너지 못했다.
시연은 방송국 오디션을 포기하고 오는 길에서,
재복은 사랑할 수 없어서 (피지 못하고 물고 있는 담배)
건너지 못했다.
중아가 '빨간불'에 발을 내딛으려 하고 있다.
그때 재복의 오토바이 지나가며 경고를 한다. 정신차리라고
재복의 오토바이는
더 이상 질주를 위한 오토바이가 아니다.
재복에게 목숨 같은 다리를 잃고,
새로 생긴 다리
중아를 태우고 달리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그녀의 방황을 막아주는
그래서 중아는 '파란불'에 무사히 잘 걸어간다,
.................재미나게 살아요
부자의 남편이 중아에게 말한다.
인생을 달려온 기관사, 끝까지 가족을 지켰던 사람,
깨달음이 있어 자식을 내치고 부자와 사는 할아버지,
“나이 차서 세상 끝에서 보니 세상속이 <재미>나는 거구나,
애들 키우고, 나도 재미나게 살아야겠다. 사는게, 때미는 거더라고,
재복엄만 죄가 너무 커서, 긁기만 해, 상처 나고 딱지 앉아도,
아가씨 만나고 묵은 때 밀고, 아주 화사 해졌어
그 순간만 기억해. 제 몸에 때도 못 벗겨, 죄가 커서,
재복엄마 그냥 재미나게 봐 줘요.”
인생이 베어있는 말.
그런 그도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늙고 지친 몸으로 말하고 있다.
재복이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라고 하자,
우는 듯 즐겁다고 말한다. 그가 떠날 것 같다.
예전에 국이 잘 컸을 때 부자의 남편이 되고,
잘못 컸을때 박사장처럼 된다고 했었다
할아버지는 삶을 지키는 자의 깨달음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교수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 못한다.
국도 이제 강의를 하고 교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그가 놓쳐선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재미>이다.
............... 국은 시연과 있으면 재미난다.
국은 항상 진지하고 무겁다. 그러나 시연과 있을 때는 재미가 난다.
왜 시연이 국을 재미나게 해 줄 까.
뭔가 통하는 것 같은 비슷한 국과 시연.
그러나 시연이 국과 다른 점은 그래도 시연은 ‘자기’가 있다.
똑같이 외롭지만 무능한 가족이라도 있고,
자해라도 할 ‘자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쁨을 너무 좇다보니 허영, 가짜 가슴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해 줬으면
(다른 사람이 나한테 뻑 가줬으면 바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캔디 같다,
도전적이기도 하고, 장난치는 모습이 재미있다.
항상 장난쟁이 니까, 장난으로 받아 줄 수 있다.
진지하지 않아도 되고, 장난 칠 수밖에 없어 재미난다
시연은 국에게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한다,
유혹, 뻑 가게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애기 하고 싶을 땐 언제든지 오라는
사뭇 다른 시연이다.
타인에 구속된 자기가 아닌 스스로의 자기와 국을 <인정>한 것이다.
시연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이제 경험해 본 것이다.
사실 국이 이 경지까지 온 것은 중아의 도움이다.
중아가 닫힌 문을 열어 주어서 보이는 세상이다.
국은 재복과 마찬가지로 시연과 왼손 악수를 한다.
중아의 결혼 반지를 끼고..
좀 변한 시연이
재복을 쳐다보는 눈빛이
그다지도 애처로운 것은
예전엔 자기만 봐 달라고 떼쓰던 울보 시연이 아니라서
이제 재복의 모습이 자꾸 가슴에 들어오는 것이다.
.................. 독립
중아와 마찬가지로 세 명, 그들의 가족들도 각자 자기에 본질에 맞는
'자기 삶'을 찾아야 한다.
진정한 <독립>으로 <성숙된 인간>으로 <자기 삶>을 찾아야 한다.
중아는 재복에게 너도 이제 닥쳐 라고
재복은 어머니가 불쌍해도, 복잡해하고 찝찝해 하니, 어머니가 가 라고
국은 재복에게 떠나 라고
시연이 위급해도 엄마는 같이 있어 주지 못하고, 아버지는 가출한다.
박사장은 말도 없이 떠나고 국 대신 재복을 찾아간다.
.................국의 운명과 꿈 깨기
국의 외로움의 종류는 ‘자기’도 없는 외로움이다.
시연은 자해할 ‘자기’라도 있지만,
국은 외로움이 너무 커서 자기도 없다.
( 가족이 없었던 국의 태생으로 인한)
그래서, 그 외로움은 국이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더디게 만들었다.
느끼면서도 인정하면서도 모르는척 하게 한다.
중아에게 힘없다고 첫 고백후 중아에 의해 생기기 시작한 '나',
자기가 중아를 아직도 지킨다고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고,
자기를 ‘책임‘지려고 하는 중아에게 ’가족‘을 지키면 된다고
엄한 소리를 하던 국
드디어,
중아와의 특별한 만남을, 이유를 깨닫기 시작한다.
재복과는 틀린 후천적 자기, 드러내기 싫음, 더딤, 답답함,
그 오랜 기다림은
중아를 이끌고, 중아이기에 국도 마침내 마지막 고백으로
이끌려질 수밖에 없는,
그 특별함을...
자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정신 놓고 횡설수설하는 중아를 향해
목숨을 던지듯이 고백하게 한다.
‘옆에만 있어줘, 혼자인 게 싫어, 나 좀 도워줘’
이것마저 거부당하면 국은 더 이상 중아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바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온갖 이해되지 않는 답답한 말들로
중아를, 사람들을 자기 옆에 놓아두려 하는 것이다....
중아는 그런 국의 꿈이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아는 알고 있었다.
국의 외로움 속에는 중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인정>하지 않은
‘국만의 집’이라는 것을...
그 집에 같이 살려면, 국이 고집을 꺾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중아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국 스스로만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국의 마지막 고백으로 국이 꿈을 깨자,
중아는 재복에게서 국으로,
마법처럼, 정신 차리듯이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자기와 재복이 짠 목도리를 국에게서 걷어내고,
‘자기’가 생긴 국과 ‘함께’ 짤
목도리, 그림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