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46'을 보고
쿠오테이션이 이처럼 무시무시한 것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영화 '2046'을 보고....
예전에 사랑했던 여교수가 있다. 여기서도 쿠오테이션이 필요하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반드시 전임강사가 아니냐 물어오고, 나는 그렇다, 전임강사이다 한다. 하지만 교수것들한테 별로 배워본 경험이 없다. 여기서도 쿠오테이션이 필요하다. 스위스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를 전공한, 유창한 설교 능력을 자랑하는 신학 교수의 다른 교수를 향한 '것' 지칭 이후, 그와 같은 통쾌감 이후, 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 나머지 것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배운 게 있느냐 묻는다면, 쿠오테이션 밖에서, 이런 식으로 배운 것은 많다. 영화는 내게 쿠오테이션 밖의 교수님들이었다. 하지만 강의실 안에서, 쿠오테이션 필요 없이, 배운 게 있는가 싶을 때 얼른 떠오르는 사람이 그 여 전임강사이다. 그 여 전임강사를 생각하면서, 의미를 찍으면, 그 여 전임강사는 단번에 교수님이 된다. 꽃처럼 붉은 피가, 쿠오테이션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시절,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 여 전임강사는 내게 여교수님이다. 교수는 분명, 정신의 외적 현상이다. '짤린다'는 술어도, 정신의 영역이긴 하지만, 외적인 것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나는 양손잡이라는 말이 좋다. 앰비덱스트로우스, 생각만 해도 두뇌가 활성화되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목회실습이라는 것을 다녀왔는데, 광주 지역 교회 어린이 반 일요일 예배, 서울에서 온 전도사님이라며 아이들 앞에서 소개를 받았는데, 아이들이 먼저 손을 들고 환영하자, 나도 꾸벅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든 손은 왼손이었다. 그 사실에 나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리 완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른손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일까? 오른손은 칼을 쥐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것인가? 그래서 어린이들 앞에서는, 그 무시무시한 오른손을 숨기고는 약한 왼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아이들 좋아하는, 청량 사탕 같은, 웃음을 지었다.
컴퓨터 자판은 분명 양손 지향이다. 그러나 손톱이 자란 관계로, 글을 쓰다 도중에 손톱을 깎는데, 왼손이 약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오른손이 왼손의 손톱을 깎을 때는 아무런 피로감이 없다. 다른 생각을 해도 좋다. 하지만 왼손이 오른손 손톱을 깎을 때는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이다. 팔에 힘이 없을 경우에는,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기억이란 게 있을 것이다. 그것도 쿠오테이션이다. 쿠오테이션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쿠오테이션의 흔적만 남고 알맹이가 증발한 것을 뜻한다. 이내, 쿠오테이션 약호마저 지워져버린다. 왼손이 오른손 손톱을 아주 어렵게 깎았던 경험은, 손톱깎이가 있는 나라 사람 모두의 것인데, 스스로 왼손, 그때의 초조함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화 2046을 보면서 여교수의 큰 머리를 떠올렸다. 물론 함께 생각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영화 배우와 일치하지 않는 '것'도 많았다. 혹은 사람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영화를 내가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말이 오른손 행위처럼 아주 직접적인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의 말은 대게 왼손도 가지고 있다. 양손이 필요한 곳에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손톱깎을 때는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다행히 영화 속에서는 여교수의 큰 머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시크릿 가든의 너무나 대중적인 발라드가, 유키 구라모토의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일본 영화'라는 단편 소설을 쓰던 때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여교수와 헤어지고 있었다. 내겐 그런 능력이 있다. 그것은 언어 능력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헤어짐의 과정은 기록으로 남았다. 아주 오래 전에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누군가로부터 이런 식읠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만일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입대하겠느냐?' 그런데 그런 질문을 왜 내게 했던 것일까? 내가 리버럴 해 보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리버럴이란 말의 뜻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프로그래시브하지만도 않다. 차라리 아웃사이더 라는 말이 좋다. 히피면 외모가 부족하니, 아웃사이더면 적당하다. 내가 조금은 그런 식으로 보였나 보다. 전세계적으로 부키쉬한 학생이면 반드시 아웃사이더이다. 리버럴은 그런 면에서 아주 독특한 궤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보수'라는 말은, 엄밀히, 협공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리버럴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학생스럽지도 않다. 반면에 학생은 모든 면에서 정신의 외형(현상, 외적 현상)을 뚜렷히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매우 학생처럼 보이는 내게 외국인 강사는 그처럼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원입대할 것입니다.'
나는 언젠부터인지 모르지만, 북한 사회주의를 이론적으로도 매우 열등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군 참전이라는 나의 대답에는, 크기를 잴 수 없는 증오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복무 경험에서라도 국가의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의 숱한 '단자'들과 나를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매질(질료)인지를 알고 있기에, 나를 그들로부터 벗겨내고픈 얄팍한 정신은 구가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러니가 거대하다면, 남들과 똑같이 평지에서 죽을 것이다. 힘이 둘로 뭉쳐있지 않은가? 나는 그냥 한쪽 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다. 나도 남들과 같은 푸른 색 군복을 입고, 소총을 오른손에 들고, 단독군장에, 돌격할 것이다. 남한과 북한. 배운 게 많은 내게 그들은 차이가 없다. 단지 오랫동안 살아온 곳에 우선권이 있을 뿐이다. 내 소설 '일본 영화'를 보면 일본군 장교로 등장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것의 의미는 몇달 전에나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레고리 운운하면서 문학 이론을 두고 심각한 사유를 치를 무렵, 내 소설을 다시 읽는데 그처럼 분석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일본의 양차 세계대전 참전을 두고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시를 잘못 지어서 그렇다.' 그것은 이런 뜻이다. 매질이 처음 질서로 형상이 될 때, 형상의 정점인 국가는 손쉽게 세계를 장악하고 싶은 정신으로 매질을 해소하려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잘못은, 우연한 선택과 결과에 있지 않고, 매질이 처음 질서로 형상이 되는 과정에서 이미 발생하는 것이다. '매질'로서 매질을 구속하고 형상이 되었다면, 처음 질서가, 그리고 계속되는 나중 질서가 그랬다면, 세계는 오직 무력 장악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나는 일본 지식인들이 그런 역사적 구속 때문에라도, 보편에의 용기가 의식의 기저에 자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니까 용기 없는 시들이 여기저기서 나와, 끝내는, 자기 국민들을 향해 세계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뭉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상상에서도, 나는 일본이 밉지가 않았다. 그들을 구분할 수 있었고, 어마어마한 슬픔을 느꼈다. 일본 건물과 시가와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인터넷을 통해 열람하기를 즐겨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편에로의 용기가 없음을 알고는, 전쟁이 증명하는 것처럼, 거기에서부터 거대한 공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내게, 만일 당신이 일본 청년이라면, 나는 학생이다, 국가로부터 가미가제 출동 명령을 받았을 경우 어떠하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위에서와 같은 답을 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나를 구분짓지 않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오직 오랫동안 살아온 곳에 우선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에 번번이 낙방하고는, 월등한 실력차이를 목도하면서도, 어찌 할 바를 모르지는 않았다. 지식은 칼이다. 나는 전쟁을 해야만 했다. 오직 나만이 아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나는 명령을 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만 거대한 전쟁에 참가한 느낌도 컸다. 과연 누가 적이란 말인가? 그와 같은 반문 또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오직 나만이 폴 틸리히의 '카이로스'를 선포한 것 같았다. 존재에로의 용기 또한 보편에로의 용기이다. 나는 쿠오테이션 없이 보낸 2년을, 내 팔과 다리가 잘린 것처럼 안타까워 했다. 누군가 나를 대표자로 삼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었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사악한 권력으로 선포할 것인가? 나를 희롱한 것을 두고 묵묵부답할 것인가? 다시 시험을 치러 합격한다면, 멍청한 2년차이 나는 선배를 두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멍청한 2년. 그런 게 비일비재해도 되는 일인가? 그래도 되는 것인가? 나는 내 신학과 교수님에게 추천서도 부탁했었다. 그 교수님은 내게 참으로 교수님이었다. 그와 같은 분도 우습게 다뤄지는 게 싫었다. 서울대의 건물과 나무와 울타리가 아주 더러워 보였다. 지식은 생명을 다룬다. 내가 배운 지식은 곧바로 내게 시술되는 것이었다. 실력도 없는 것들이 피 묻은, 더러운, 가위로 약자들을 휘젖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외국인 영어 강사가 그랬다. 전쟁이 발발하면, 한국군으로 참가하겠는가? 그 사람에게는 북한과 남한이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내게도 차이는 없었다. 언젠가 북한 노동 조합 배경의 삼류 에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간부가 화장품을 갖고 육체를 요구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호응했다. 달리 보면 수작이다. 남한 어느 농공단지에서 찍은 것 같았는데, 고스란히 이곳 이야기 같기도 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북한 사투리는 제대로였고, 누군가의 것은 엉성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 살에서 피가 퍽퍽 터질 것이 아닌가? 나는 내 학생 됨을 알았다. 지식은 내 작은 정신에서 자라나, 넓게 퍼지지 못하고, 곧 바로 내게 침잠되는 것으로 있었다. 전쟁은 곧장 누군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작은 배움이 가장 낮은 자의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그것의 핑계가 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 영화'를 보면, 여교수의 얼굴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행동은 누구도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작은 권력의 설득만 있어도, 서울대와의 절연을 선언한 나의 행동은 영화 '머피의 전쟁'과 같은 것이 된다. 전쟁이 사라진 시대, 역사 이후의 시대에, 혼자서만 역사성을 지닌 것이다. 혼자, 전쟁하는 것이다. 나의 전쟁은 아이러니가 아니지만, 시대가 나를 아이러니로 만들고 있었다. 거대한 아이러니에도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나의 전쟁 선포는 내 자신에게는 조금도 아이러니가 아니었다. 오직 사랑만이 아이러니를 겪고 있었다. 서울대 영문학과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이 어느 순간에 행복할 수 있는지, 내게 각성시킨 사람이었다. 그녀를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뚜렷한 사귐은 없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보다 정확해야 한다. 멍청한 지식 권력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긴 했지만,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나를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의 슬픈 결론은 어찌 보면 매우 우스꽝스럽다. 나는 소설속에서, 여자의 얼굴이 매우 크다 말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진 이유는 그 여자의 얼굴이 컸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가장 큰 기쁨은, 소설을 쓰면서 펑펑 우는 것이다. 영화 '로맨싱 스톤'의 첫부분이 그랬다. 내용은 매우 엉뚱하지만, 평범한 여류 소설가의 우는 모습에 진실성을 따지는 것은 사악한 짓이다. 아무튼 남자인 나도, '일본 소설'을 쓰면서 내용이 너무 슬퍼 울었다. 영화 '2046'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결론은 더욱 솔직한데, '일본 소설'을 꿈으로 꾸던 쿠오테이션 밖의 남자가 깨어나, 한밤중에, 자판기 있는 곳으로 가 커피를 꺼내 마신다. 그리고는, 쿠오테이션 안의 세계가, 슬퍼 눈물을 흘린다. 보편에로의 용기, 그것의 시를 갖지 못하는 것이 국가로 하여금 어리석은 전쟁을 선포하게 하는가? 나는 반대였다. 보편에로의 용기만으로, 전쟁 없는 시기에 홀로 전쟁하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을 향해 나는 끝없는 연민을 느꼈다. 글쓰기는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내 외로움에 위로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