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결정은 수도이전을 원천봉쇄했습니다. 만약 김영일 재판관처럼 "수도이전에 관한 의사결정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해당하므로 국민투표의 대상이 된다"며 헌법 72조의 국민투표권 침해라는 논리로 위헌결정을 냈다면 국민투표를 거쳐 수도이전을 계속 추진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헌재 9명중 7명이 "서울이 수도라는 점이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이라고 결정한 이상 수도이전은 곧 헌법개정의 문제가 돼버립니다. 헌법개정은 국회의 3분의 2 찬성에 국민투표 과반수 찬성이 필요한만큼 한나라당 의석수가 3분의 1 이하로 추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이번 결정의 요지는 "수도이전을 하려면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가 아니라 "서울의 수도로서의 지위는 곧 헌법이다(그러니 이전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 헌재가 왜 '관습헌법'이라는 국민 대다수가 들어보지도 못한 용어를 근거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국민투표권 침해를 근거로 위헌결정을 내릴 경우 수도이전 국민투표가 불가피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여ㆍ야가 의도하건 안하건 사실상 정권에 대한 재신임 성격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탄핵사태때의 그 국가적 난장판을 되풀이하라구요? 저는 수도이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꼴을 다시 보느니 차라리 깨끗이 접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국민투표라는 한판 승부를 놓고 온 나라가 절반으로 갈라져서 치고받고 싸우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게 돼서 그나마 다행이지요.
- 문제는 헌재가 '서울=수도=헌법'이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해 '관습헌법'이라는 근거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제가 법 공부를 체계적으로 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우리 나라가 대륙법 체계에 따라 성문헌법을 갖춘 국가라는 것은 배웠습니다. 관습헌법이 뭐라구요? 헌재는 "헌법상 명문화돼있지는 않지만 자명하고 헌법에 전제된 규범으로서 관습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이 관습헌법이라고 주장합니다.
- '서울=수도'가 곧 관습헌법이라는 근거로 헌재가 제시한 것을 봅시다. "조선왕조 창건 이후 600여년간 서울이 수도라는 점을 역사적 전통적 사실로, 또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경국대전에 서울이 수도로 돼 있다구요? 웃음을 참기 어렵군요. 경주는 신라시대 1천년간 수도였습니다. 개성은요? 조선왕조 이전 삼국시대, 고려왕조의 역사는 한국역사가 아니라 어디 중국 역사입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물려받은 정부인가요? 대한민국 헌법기관의 최고 원로ㆍ수뇌들이 짜낸 논리가 고작 이것이라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제 살펴볼 점에 비하면 극히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 '관습헌법=헌법조항에는 없는 헌법'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관습헌법의 내용은 누가 정하는가?"입니다. 헌법은 입법부가 국민투표라는 전체 국민의 의사수렴 과정을 거쳐 제정합니다. 관습헌법은? 관습헌법의 정의 자체가 '헌법조항에 없는 헌법'이니까 이런 성문헌법 절차를 거쳐 제정할 수 없죠. 이를테면 '서울=수도'라는 내용을 절차를 거쳐서 헌법상에 제정하면 그건 더 이상 관습헌법이 아니라 성문헌법이 돼 버리니까요. 결국 답은 헌법재판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관습헌법은 헌재가 정합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이번 결정처럼 말입니다.
- 바로 여기서 참으로 골때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법은 입법부가 만들고 사법부는 만들어진 법을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권력분립입니다. 한 기관에서 법을 만들고 해석ㆍ적용까지 다 한다면 그때 편한대로 법을 바꿔서 적용하더라도 견제할 수단이 없겠지요. 헌법 제정절차는 더더욱 까다로와 입법부만이 아니라 국민투표까지 거쳐서 특정 정파, 세력이 마음대로 좌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관습헌법만은 다릅니다. 헌재가 만들고, 헌재가 해석ㆍ적용합니다. 헌재는 주어진 룰에 따라 결정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룰을 스스로 만드는 역할까지 하게 됐습니다. 단 9명의 재판관이 이 나라의 헌법조항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이게 어떤 의미겠습니까? 앞으로 국회가 어떤 법을 만들어도 헌재가 "헌법조항에는 없지만 관습헌법상 어긋난다"며 엎어버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관습헌법은 헌재가 결정하니까요. 결국 헌재 재판관 9명은 이번 결정으로 헌재를 헌법을 창조하는 무소불위의 기관, 자신들을 반신(半神)에 가까운 지위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을 견제할 아무 절차나 방법이 현재의 헌법구조로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헌재를 견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지나친 과장이다. 논리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헌재 재판관들의 '양식'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지극히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개인의 '양식'에 대한 불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바로 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 요약하자면 헌재의 이번 결정은 (좋게 보자면) "국가적 혼란을 막자"는 '실용적ㆍ정책적'인 판단이 법리적 엄밀성을 깔아뭉갠 산물이고 그 결과 헌재는 행정ㆍ입법ㆍ사법 3부를 초월하는 기관이 됐습니다. 당장 국민투표라는 최악의 결과를 피했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앞으로 역사는 이번 결정을 어떻게 판단할까요? 그야 가봐야 알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헌재 재판관 자신들도 감당하기 힘든,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저질러 버린 것 같다는 느낌 말입니다. '몬스터 헌재'의 앞날을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진진하겠네요.
p.s 그간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지명은 법조계와 청와대 주변 일부 정치권에서나 관심을 갖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미국처럼 연방대법관 지명자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쏟아지고 치열한 검증과정이 뒤따르는 상황은 우리에게는 외신뉴스속 신기한 풍경일 뿐이었죠. 이제 우리 국민들도 미국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슬슬 이해하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