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1인자와 2인자.

  • keira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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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엄마한테 전화로 한바탕 꽥꽥거림을 듣고 울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은 퉁퉁 부어 있고, 참을 수가 없어 뛰쳐 나온 술자리 사람들은 모두 어벙벙한 분위기 속에서 왜 그랬는지 추측이 분분했을 겁니다.

내가 어머니한테 오빠보다 쓸모 없는 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나나 여동생의 위치에 있는 분들은 절 이해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어리버리하고 사는 데 재주가 없는 남동생이나 오빠를 돌봐주는 보모 역할이 어느새인가 자신에게 떡 맡겨져 있는 그런 상황. 그것도 인접 지역에서 살고 있으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오빠한테 가보라고 전화가 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청소도 해 주고 반찬도 만들어 주고 오라는 겁니다.
예, 예전에 멋도 모를 때 한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음식물 찌꺼기를 봉투 만들어 버리기가 싫다는 이유로 화장실 변기에 버렸던 모양입니다. 국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변기를 락스물로 문지르면서 눈 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서울(저)과 인천(오빠)에 살아도 이 모양인데 만약 대학을 같은 서울에서 다니기라도 하면 같이 살아야 할 거고 그 땐 전 완전 종살이를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해 준다고 해서 좋은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닙니다. 오빠도 제가 오는 걸 귀찮아 합니다. 왜 귀찮게 와서 먹지도 않을 음식을 해 놓냐고 꿍얼거립니다. 어차피 집에서 밥을 먹지도 않는데 저걸 다 어떻게 먹냐는 거지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 불만인 것들을 툴툴거립니다. 결국 이리 살아도, 저리 살아도 어떻게 살든 간에 살아지기 마련인데 왜 나를 그렇게 못 믿냐고요.

예, 저희 오빤 좀 심하게 어리버리하고 칠칠맞게 살긴 합니다.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일상 활동에 게으르지요. 하지만 그럴 수록 혼자서 사는 방법을 익히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결국 급하면 자기가 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가 주는 게 무슨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도움이 된다 해도 언제까지나 제가 사는 걸 돌봐 줄 수 있다는 겁니까. 언젠가는 오빠도 결혼을 할 거고 그 때 처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일 정도는 스스로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결혼을 하건 안 하건 25살이고 군대까지 다녀온 오빠를 언제까지 제가 챙겨줘야 한다는 겁니까.
제가 누나라도 된다면 모르겠습니다. 장녀라도 된다면 모르겠습니다. 전 동생입니다. 어쩔 수 없는 동생이지요. 솔직히 피해 의식이 생길 정도입니다. 살면서 좋은 건 오빠가 다 독차지했고, 언제나 우선권을 가지고 살았으면서 왜 이제 와서 돌보고 챙겨주기는 내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 아니고 엄마 아들이야. 나이가 몇 살인데 내가 돌봐야 되?"
어머니는 이렇게 소리 지르시더군요. "내 아들이건 니 아들이건 니 오빠야. 부모 죽으면 너희 둘밖에 안 남는데......(생략)"
예, 언제나 부모 죽으면 너희 둘밖에 레파토리입니다.
그래서요? 아닌 말로 둘만 남았을 때 오빠가 제 인생을 대신 살아 줄 것 같습니까? 제가 궁상맞은 처지가 되었다면 내 동생이 불쌍쿠나 하고 도와줄 것 같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오빠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아니잖아요.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건데 그걸 인정 못하십니다. 예전에 집에 내려갔을 때, 난 종살이 하며 살기 싫으니까 행여라도 나랑 오빠를 같이 살게 할 생각 말아라 고 못을 박았더니 오빠한테 해 주는 게 왜 종살이냐고 그러시더군요. 치사하게 따지자면 오빠가 제게 해 주는 게 눈꼽만큼이라도 있는 줄 아십니까? 가끔씩 컴퓨터 고쳐주는 게 있긴 있군요. 하지만 오빠에겐 저처럼 생활을 돌봐 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난 못 간다. 가고 싶으면 직접 가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지독한 계집애. 둘만 남는다고 해도 너는 독해." 이런 식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뭐 하고 있냐고 해서 사람 만나 술집에 있다고 하니 "계집애가 왜 술집에 자빠져 있냐. 오빠 보러 갈 시간은 없어도 술 마실 시간은 있냐." 고 몰아세우더군요. 제겐 제 생활도 없고 모든 생활이 오빠 생활을 살피러 가는 걸 위해 조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예, 사실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시회도 보고 싶었고 다녀 오면 왕복 3시간 정도를 전철과 버스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에 너무 피곤합니다. 가서 일을 하는 건 차치하고라도요. 무엇보다도 이걸 내가 언제까지 해야 하냐는 반발 심리가 더 컸습니다.
"나이가 몇이건 넌 여자고 오빠는 남자야!"
그래서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게 걱정이 되면 며느리라도 얻으시지. 아니, 며느리를 얻어도 전 언제나 "너희 오빠 부부 잘 살고 있는지 신경 좀 써라." 하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물론 오빠가 있기 때문에 제가 부모님을 모셔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부담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이 땅의 장남들이 어떤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는 압니다.
.
부모는 자식을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모를 정도의 나이도 아니고요.둘 다 소중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더 소중한 자식이 있고, 덜 소중한 자식이 있기 마련이라는 건 압니다. 아무리 대접 면에서는 공평하다 해도 결국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는 아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마련이지요. 제가 아무리 잘 해도, 반면에 오빠는 꼴통 짓만 한다 해도 저는 끽해야 오빠와 동등하거나 약간 처지는 위치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결국 부모님이 선택하게 되어 있는 게 아들이라는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제가 이 정도로 어머니한테 쓸모 없는 딸일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어머니 푸념을 들어주기 위해, 오빠를 돌봐주기 위한 용도를 지닌 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부모에게 자식이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 해도 저런 용도에 부응하지 않으면 평가가 떨어지고 미운 자식이 될 뿐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겠지요. 부모에게도 사랑만 받고 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으로 태어나신 분들은 어느 정도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순서로도, 성별로도 2인자일 수밖에 없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아무리 그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어도, 1인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안 한다 해도 이렇게 노골화되는 순간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긴 푸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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