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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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 <괴시>를 찾아서
[기획] 강범구 감독의 <괴시>(80') 찾아 삼만리
허지웅(ozzyz) 기자  
호러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력적인 장르이다. 이 장르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B급 감성과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고찰은 그 어떤 장르의 외피로도 구현하기 힘든 것이다.

흔히 공포 영화하면 80년대 할리우드 슬래셔 무비들을 떠올리면서 저질 장르라고 속단하는 관객들과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일부 평론가들 때문에 한국에서 호러 영화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군사독재의 서슬퍼런 검열로 그 명맥이 단절되기 전까지의 한국 영화를 돌이켜 보면, 예상외로 작품성 있는 수많은 호러 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부산영화제에서 조명을 받아 많이 알려진 김기영 감독을 비롯하여, 고영남, 박윤교, 이용민 감독이 이때 활약한 대표적인 호러 영화감독들이다.

▲ <괴시> 의 비디오 자켓
ⓒ2004 허지웅
강범구 감독의 80년도 작품 <괴시>는 '좀비'가 등장하는 전무후무한 한국 영화로 알려져 있다.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정창화 같은 감독 밑에서 스태프로 활동한 바 있으며, <서울 야화>(69') <풍운의 권객>(74') 같은 멜로나 액션 영화를 주로 연출한 감독이다.

그래서 <괴시>는 그의 작품 가운데서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는데 '좀비'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미 원본 필름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에서 <괴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출시된 비디오를 찾는 것뿐이다. 문제는 <괴시>가 매우 희귀한 작품으로, 국내 비디오 대여점에서 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예술 작품의 보존과 복원에 이리도 인색한 것일까. 우리가 예전에 미처 보존치 못한 작품들을 수출한 나라까지 찾아가서 역수입 해 와야 하는 현실은 참으로 서글프다. 어쨌든 출시된 바 있는 비디오니 찾으면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작품 구하기에 착수했다.

첫번째 시도

막상 편집부에 껄껄거리며 큰소리는 쳐놨지만 도대체 <괴시>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일단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십분 활용해 보기로 했다. 대부분 중고 비디오 쇼핑몰은 보유 테이프 목록을 제공하고 있으며 국가나 영화제 수상작 별로 분류해 놓은 곳도 있어 원하는 비디오를 검색하는 것은 예상 외로 수월했다. 황학동이나 동네의 중고 테이프 처분하는 곳에서 반나절 허송세월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장점은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린 비디오 ( http://www.greenvdo.com/ ), 고씨네 ( http://www.go-cine.co.kr/ ), 비디오119 ( http://www.vd119.com/ ), 영화 보물섬( http://www.movietreasurelsland.co.kr)은 비교적 잘 알려진 온라인 중고 비디오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괴시>를 찾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들른 키노 아츠 플라자( http://www.cinevideo.net/ )에서도 <괴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쯤 되면 항복이다. 역시 사래 긴 밭은 재 너머에 있는 법 아니던가. 내일부터는 발로 뛰는 수밖에 없겠다.

황학동을 찾아서

▲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황학동의 전경
ⓒ2004 허지웅
큰일이다. 주간 예보를 보니 원고 마감일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가 온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를 어쩐다. 창 밖을 보니 한 밤 중인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다행히 아직 비가 내리지는 않는다.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당연히 청계천 황학동 시장이다. 청계천 보수 공사 때문에 황폐화되다시피 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중고 테이프들이 이 곳을 거치고 있기 때문에 <괴시>를 찾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곳의 좋은 점은 흥정하기에 따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고품의 특성상, 정가는 의미가 없으며 프리미엄이 붙은 작품 같은 경우 기십만원이 넘어가기도 한다. 운만 좋으면 희귀작들을 은근슬쩍 싼 값에 살 수도 있다는 것은 이 곳만의 장점이다. 황학동을 찾기 전에 미리 유념해야 할 점은 매달 셋째 주 화요일이 휴무라는 점이다.(원래 넷째 주였지만 최근에 바뀌었다. 착오 없길!)

먼저 찾은 곳은 젊은 남자(02-2236-0080)다. 삼일아파트 15동 2층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곳은 예전에도 몇 번 찾은 적이 있는 곳이다. 찾아간 날은 마침 보수 공사를 마친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테이프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테이프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테이프들은 장르, 국적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다행이나마 한국 영화는 한쪽에 따로 모여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찾아봤지만 <괴시>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김기영 감독의 <화녀>(71')를 비교적 싼 가격에 집어들고 가게를 나섰다.

▲ <젊은남자> 의 매장 내부
ⓒ2004 허지웅
조금 더 올라가서 18동에 다다르면 쌍마 비디오(02-2254-4057)를 찾을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에 보이는 것이 쌍마 비디오다. 사장님이 친절하시고 테이프들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어 자주 찾는 곳이다. <괴시>를 물어보니 못 본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런. 또 다시 한쪽 벽에 똬리를 틀었다. 하지만 30분 만에 백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1000원에 5개 하는 테이프들 중에서 재생 시간이 가장 긴 걸로 5개를 골라서 구입했다. 출시 시기만 적당한 것으로 잘 고르면 공테이프로 재활용하기에 적당하다. 이 또한 생활의 지혜.

▲ 친절하셨던 <쌍마비디오> 사장님
ⓒ2004 허지웅
쌍마 비디오를 나와서 바로 맞은편을 보면 비디오 여행(02-2238-6798 www.82dvd.co.kr)을 찾을 수 있다. 이 곳은 규모에서는 황학동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정리도 나름대로 깨끗하게 잘 되어있는 편이어서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이 곳 사장님도 <괴시>는 잘 모르시겠다고 하신다. 별 수 있나. 마음 편하게 먹고 첫째 진열장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다보니 이것도 중노동이다. 1시간 정도 흐르고 나자 이제는 <괴시> 찾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DVD 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출시한 '쇼브라더스'의 DVD들이 퍼뜩 눈에 들어온다. 내친 김에 <펀치 드렁크 러브> 중고 DVD를 하나 구입해서 매장을 나왔다.

▲ 드넓은 <비디오여행> 의 매장 내부
ⓒ2004 허지웅
길가에 늘어선 다른 중고 테이프 가게에서 <괴시>를 수소문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왠지 서글펐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보다는 황학동의 휑한 거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한때 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과 상인들의 모습이 공사장의 뿌연 먼지 사이로 아른거린다.

마지막 보루

다음 날 종로2가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가는 길 구 쁘렝땅 백화점 지하에 위치해 있는 청춘극장(02-318-3645 www.oldcine.co.kr)을 찾아갔다. 이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최후의 보루라 생각한 곳이다. 이미 언론에서 몇 번 알려진 바 있는 이 곳은, 국내외 논문을 준비하는 많은 학생들, 방송사, 각 학교, 기관, 심지어는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까지 한국 영화를 공급했던 곳이다.

▲ <청춘극장> 의 매장 전경
ⓒ2004 허지웅
필자도 찾다 찾다 못 찾은 작품들을 이 곳에서 입수한 적이 수도 없이 많다. 들어가자마자 사장님께 인사할 겨를도 없이 <괴시>를 물었다. 그런데 아뿔싸. 얼마 전에 팔려나갔다고 하시는 게다. 얼마나 있으면 다시 입고 될 수 있을까 여쭤보았지만 희귀한 영화라서 기약이 없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아픈 마음을 접어두고 오랜만에 들른 김에 매장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에서는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성형미인>(장일호 감독), <영마>(원제-영노·이성구 감독), <목없는 여살인마>(김영환 감독)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작품들은 정말이지 구하기 힘든 희귀작이다. 이 곳은 사장님만의 비법으로 작품들이 철저하게 잘 정리되어 있으며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작품은 외국에서 수입해서라도 보유하고 있어, 처음 방문한 이들은 자료의 방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곳이다.

결국 사장님이 선물이라면서 주신 <아들을 동반한 검객> 테이프를 들고 매장을 나섰다. 이렇게 되면 <괴시>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 같다. 이대로 실패란 말인가.

▲ 유리 너머로 보이는 <청춘극장> 사장님의 모습
ⓒ2004 허지웅
<괴시>는 표절작?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 왔다. '청춘극장' 에서 <괴시>를 구입해 간 사람이 필자와 가까운 벗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이런 황망한 일이 있나. '바닥이 좁다'는 말을 이럴 때 실감한다. 나는 그 친구를 닦달해서 <괴시>를 입수할 수 있었다.

테이프를 받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개발된 기계의 영향으로 시체들이 살아나 인간들을 공격한다는 내용이었다.

▲ Let Sleeping Corpses Lie (1974) 의 포스터
ⓒ2004 허지웅
그런데 참 이상하다. 감상하는 내내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방 한 편에 있는 DVD들을 뒤척이다가 드디어 그 원인을 알아냈다. 조지 그라우(Jorge Grau) 감독의 74년도 작품 '렛 슬리핑 코르프시즈 라이(Let Sleeping Corpses Lie)'의 완벽한 표절이었던 것이다.(영화에 원작에 대한 소개가 없고, 당시 '괴시' 제작진이 이 영화가 '리메이크'라고 밝힌 적이 없어 '표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에서는 <좀비 3>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기본 구성이나 상황 설정, 심지어는 배우들의 대사까지 똑같은 것을 확인하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강범구 감독의 대부분 작품들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특별한 사실도 아니지만 <괴시>를 입수하기 위해 며칠간 동분서주한 것을 생각하니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 한국 영화들 중에서는 표절 작품이 꽤 존재했다. 이것은 물론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영화를 찍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도 알고 보면 일본 영화를 상당부분 베낀 표절작이다.

하지만 몇몇 표절작들 때문에 폄하시키기에는 보석과도 같은 한국 고전 영화들이 너무나도 많다. 결국 이번 작업은 간간히 들려오던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 <괴시>가 사실은 표절작이더라"고 하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증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호러 영화는 무한한 매력과 가치를 지닌 장르다. 단순히 신체 절단이나 헤모글로빈의 과잉만이 이 장르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러 영화를 보면서 나와 같은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 작업을 마친다.

<괴시>를 찾아다니면서 목격했던 청계천의 쓸쓸한 모습들은 '비디오 테이프'라는 이 오래된 미디어의 운명과도 맞닿아있는 듯했다. 오래된 것들은 언젠가는 청산되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메꾸기 마련이다. 하지만 친구처럼 아늑했던 과거와의 이별은 늘 눈두덩을 무겁게 만든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낡은 사진첩의 고색 창연한 필름으로 남고 말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에 못지 않게, 오래된 것들을 잊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또한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이번 기획 기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고전 한국 호러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갈망한다. 참고로 10월 말경에 호러타임즈( http://horrortimes.net/ )에서 한국 호러 영화 상영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뜻 있는 분들은 방문하길 권한다.
이 글은 <아트 앤 리빙> 가을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허지웅 기자는 'ozzyz'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을 통한 영화평론을 하고 있으며, 호러영화 커뮤니티인 호러타임즈( http://horrortimes.net/ )를 운영 중이다. 갈수록 소비적으로 변해가는 대중과 영화와의 관계에 있어 영화 평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늘 고민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는 http://ozzyz.egloos.com/ 이다.

2004/10/22 오후 10:10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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