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스노드그레스의 죽음, 올해 사망한 배우와 감독들

  • 핀체튼
  •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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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야] 제임스 칸(래빗 앵스트롬), 캐리 스노드그레스(재니스 앵스트롬)



캐리 스노드그레스는 프랭크 페리의 [미친 가정 주부의 일기]에서 직업적 성공에 대한 욕심으로만
가득 찬 밉살스러운 남편에게 불만을 품는 아내 역으로 71년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
니다. 당시 이 사람의 나이는 스물넷이었고 이제 막 빛나는 커리어가 시작된 이 젊은 배우는 어느 날,
자신을 보려고 극장에 찾아온 닐 영(예, 그 닐 영입니다)이라는 가수와 사랑에 빠지면서 할리우드를
포기했습니다.
  
[미친 가정 주부의 일기]는 수 카우프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상류층 뉴요커들의 생활을 날카롭게
풍자한 블랙코미디였습니다. 리처드 벤자민이 연기한 스노비시한 남편에게 서서히 진력이 나기 시작한
아내(캐리 스노드그레스)는 여성혐오주의자 작가(프랭크 란젤라)와 이상한 불륜에 빠져들기 시작하죠.

매력적인 외모, 겸손한 태도, 호리호리한 체격에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캐리 스노드그레스의 등장은
많은 비평가와 관객들로부터 마가렛 설리반과 캐롤 롬바드의 뒤를 잇는 여자배우가 나타났다는 평을
얻을 만큼 열광적이었습니다. 그 열광적인 팬들 중 한 사람이 닐 영이었지요. 어느 날, 이 남자는
스노드그레스가 연기하는 극단에 찾아와 '나는 닐 영이라는 사람인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데이트를 신청했고, 당시 닐 영이 누군지도 몰랐던 스노드그레스는 이를 받아들였다고 해요.
그로부터 얼마 뒤,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치도록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진 스노드그레스는 결국
유니버설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그의 투어 공연을 따라갔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닐 영의 대목장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자신이 후보로 올랐던 72년 오스카 시상식이
열린 몇 주 뒤에 아들 제크를 낳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제크는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몸 한쪽이 마비가
된 상태로 태어났지요. 그 후 5년 동안을 뇌성마비 아들을 돌보며 말하는 법과 팔 다리를 움직이는 법을
가르쳤던 그는 77년 결국 닐 영과 헤어졌습니다. 그가 마련해 준 집에서 아들과 외롭게 살던 스노드그레스
는 연기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미친 가정주부의 일기]가 약속했던 커리어를 다신 가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돌아왔을 때, 할리우드는 날 믿지 않았습니다. 록큰롤이
제게 심한 흉터를 남긴 셈이지요."

캐리 스노드그레스는 1946년 10월, 일리노이주 배링턴에서 태어났습니다. 노던일리노이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 연극단에 입단해 몰리에르의 [타튀프] 같은 작품으로 비평가상을 타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연기를
눈여겨본 유니버설사가 결국 스노드그레스를 할리우드에 데려온 것이지요. 그 후 몇몇 티비시리즈를
거친 뒤에 제임스 칸의 상대역으로 첫 장편영화 주연을 맡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존 업다이크의 소설을
영화화한 [달려라, 토끼야]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미친 가정주부의 일기]에 출연해 골든글러브상을
수상했고, 오스카에 지명되었습니다. 당시 수상자가 [사랑에 빠진 여인들]의 글렌다 잭슨이었고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와 [라이언의 딸]의 사라 마일즈 같은 사람들이 후보였어요.  

이혼 후 경제적인 이유로 77년에 다시 브라이언 드 팔마의 [퓨리]로 스크린에 돌아온 그는 [Murder, She
Wrote], [엑스파일], [웨스트 윙]같은 시리즈의 게스트 출연으로 근근히 얼굴을 내비쳤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제시카 랭의 오스카상 수상작이었던 [블루 스카이]였습니다. 이 영화도 오라이온사가
망하는 바람에 사장될 뻔했는데 제시카 랭의 호연을 아까워 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단 몇 주 극장에 걸었
던 것이 오스카상까지 타게 된 것이구요. 이 영화에서 그는 제시카 랭과 불륜을 나누던 파워스 부스의
아내이자 크리스 오도넬의 엄마로 나왔습니다.

캐리 스노드그레스는 올해 4월 1일, 수술대에 누워 간 이식을 기다리던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
다. 그의 나이 57세였고, 서른 셋의 뇌성마비 아들 제크가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 예전
인터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난 아직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잘 모르겠어요. 우린 한번도 싸운 적
이 없었는데... 이젠 나랑 내 아들만 남았네요." 스크린 데뷔작으로 골든글러브를 타고, 오스카에 지명된,
앞날이 창창했던 여자 배우가 록큰롤 스타와 사랑에 빠져 커리어를 포기한 뒤, 뇌성마비 아이를 낳고 이혼
을 하고, 시시한 역할로 생계를 유지하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누구처럼 훌륭한 영화에 자기이름을 남기고
곱게 나이가 들어 자신의 집에서 편히 눈을 감는, 복 받은 스타의 마지막과는 멀어도, 참 먼 거리입니다.


[미친 가정주부의 일기]는 국내에서도 공중파를 통해 몇 번 방영된 적이 있어요. 여전히 가물가물한 기억
이지만, 제겐 다행히 원작소설이 있으니 기억을 재생시키는 데 그럭저럭 도움이 되곤 합니다. 수 카우프먼
의 원작은 6,70년대 미국의 자유주의 여권운동에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힐 수 있습니다. 침실을 치우고,
이불보를 정리하는 등의 주목받지 못하는 일을 하며 밤마다 '이것이 다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던 중산층 여성의 삶에 나타난 특이한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던 풍자극으로서 이 작품은 당시 여성
해방 운동의 기운이 불기 시작하던 미국 사회에 굉장한 선풍을 일으켰지요. 조안 알렌이 [아이스 스톰]에
서 판에 박힌 무뚝뚝한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던 중산층 부인 역에 그처럼 독특한 휴머니티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영화를 준비하면서 캐리 스노드그레스의 영화를 꼼꼼히 보았기 때문 일지
도 모릅니다(인터뷰에서 정말로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 영화를 참고했다고).


스노드그레스의 유작은 작년 HBO영화 [Iron Jawed Angels]이었지요. 여성참정권을 위해 투쟁한, 페미
니스트 운동사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액티비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앨리스 폴과 루시 번즈의 실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그는 힐러리 스웽크(앨리스 폴)의 퀘이커교도 어머니로 나왔습니다. 사진을 찾기
가 쉽지 않군요. 하기야 몇 분 나오지도 않았을테니.


R.I.P  CARRIE SNODGRESS (1946/10/27 ~ 2004/4/1)



[8 Seconds]에서 루크 페리의 엄마로 나왔을 때(L),
[미친 가정주부의 일기]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 수상장면(R)







올해 사망한 배우와 감독들입니다. 이 외에도 더 있겠죠.



브라이언 깁슨 - [What's Love God To Do With It?], [스틸 크레이지] 감독 (육종)
스폴딩 그레이 - [킬링 필드], [스위밍 투 캄보디아], 모놀로그 전문 배우 (자살)
린 카트라이트 - [그들만의 리그] 나이 든 지나 데이비스 역 (치매 합병증)
앤 밀러 - [이스터 퍼레이드], [멀홀랜드 드라이브] (폐암)
자넷 프레임 - [내 책상 위의 천사] 원작자 (백혈병)
제롬 로렌스 - [앤티 메임] 각색자, 희곡 작가, 작사가 (뇌졸중)
폴 윈필드 - [사운더], [마틴 루터 킹] (심장마비)
르네 랄루 - [미개의 행성] 감독 (심장마비)
피터 유스티노프 - [스팔타쿠스], [쿼바디스], [나일강의 죽음] (심장마비)
허버트 셀비 주니어 - [레퀴엠],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작가 (만성 폐질환)
앨런 킹 - [Memories of Me],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 [카지노] (폐암)
토니 랜덜 - [Odd Couple] (prolonged illness)
로널드 레이건 (폐렴 합병증)
말론 브란도 (폐섬유종)
제리 골드스미스 - [오멘], [차이나타운], [LA 컨피덴셜] 작곡가 (암)
페이 레이 - [킹콩] (자연사)
엘머 번스타인 - [진정한 용기], [순수의 시대], [파 프롬 헤븐] 작곡가 (prolonged illness)
다니엘 페트리 - [태양 속의 건포도], [엘리노어와 프랭클린], [Inherit the Wind] 감독 (암)
러스 마이어 - [인형의 계곡] 감독 (폐렴)
프랑수아즈 사강 - [슬픔이여 안녕] 작가 (폐색전)
자넷 리 - [사이코], [만주인 후보] (맥관염)
캐리 스노드그레스 - [달려라, 토끼], [미친 가정주부의 일기] (심장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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