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하이텔 INDRA님이 소개해준 저주받은 걸작(?) 두편
94년에서 96년 사이 언제쯤 될 것 같은데, 매일 하이텔에서 놀던 때가 있었습니다.
씨네동 '영화를 보고'란에 글을 종종 남기시던 INDRA(김종화)님 이라는 분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 분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시요? 뭐하는 분이신지 궁금했습니다..)
상당히 씨니컬한 어조의 그 분 글이 너무나 취향에 맞아서 열심히 찾아 읽었었습니다.
그분이 극찬한 영화 두 편이 있었는데, 어쩌면 영화 자체보다도 그분의 영화감상글이
더 걸작이었던 것 같아요.
이미 그분 글에 세뇌가 된 후라 영화를 보면서도 똑같은 감상포인트에서 감탄하곤 했구요.
그래서 혼자 흥분해서 주변에 보라고 권했다가 거의 사람 취급 못받고
제 지적 수준(?) 내지 취향에 대한 엄청난 의문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TT
그 저주받은 걸작(?) 두 편은,
'금홍아 금홍아(김갑수, 이지은 주연)'와 '진짜 사나이(권해효 주연, 김학철등 연극배우 다수출연)'
실제로도 어느 평론가로부터도 칭찬받은 바 없고, 대중들로부터도 거의 쓰레기 취급을 받은
영화인 것 같은데, 여하튼 저는 너무 좋았습니다.
두 영화 모두 주로 욕먹는 주 포인트는 쓸데없이 여자 주인공을 벗겨서 관객을 끌려는 의도가
보이는 장면이 곳곳에 있다는 점이었던 것 같은데, 저야 그런 장면은 고맙게(?) 보고 지나갔을 뿐
별로 거슬리지 않았었죠..
'금홍아 금홍아'는 시인 이상과 기생 금홍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데요, 이상과 관련된
여러가지 유명한 에피소드들이 적당히 각색되어 있습니다.
좋았던 장면들을 떠올려 보면
1. 무엇보다 라스트신에서 쓸쓸한 해변가를 배경으로
김갑수의 서늘한 목소리로 낭송되는 이별시(실제 이상이 쓴 '이런 시'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을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그다지 사랑하던'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 두 구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흔한 말들이지만 저런 식으로 조합되니 서로 호응하지 않는 단어들인 것 같으면서도
더 깊은 뜻이 느껴지기도 하고...
2. 중증의 폐병에 걸린 김유정을 문병간 이상이 김유정과 대화하는 장면.(대사가 정확히 기억안나지만)
이상(반진 반농조로): 우리 죽어 버립시다. 이렇게 살아 뭐합니까.
김유정: 나는 싫소.
이상: 그냥 같이 죽자니까요.
김유정: 아 싫어요.
....한참 장난조로 실랑이하다가
김유정: .....소고기(?)가 먹고 싶어서 나는 죽기 싫소.
(이상, 모로 돌아누운 김유정의 눈가가 젖은 것을 보고는)
이상: 당신, 진짜 죽기 싫었구료...
3. 일본인이 경영하는 고급 온천장 여관에 금홍과 함께 묵다가 돈이 떨어진 이상.
금홍은 자신에게 눈독을 들이던 일본인 주인에게 하룻밤 몸을 판다.
경건한 자세로 꿇어앉아 금홍이가 옷을 한 벌 벗을 때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를 되뇌이며 고개를 조아리는 주인.
이를 창문으로 엿본 이상은 킬킬거리며 말한다.
"역시 일본인들은 일등국민이야."
4. 금홍이가 경영하는 카페에 얹혀 사는 이상. 신문에 '오감도'를 발표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미친놈이라는 욕설이 대부분.
신문에 실린 오감도를 읽으며 금홍이 왈,
'첫번째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이거 돈 되는 거 맞어?"
이상이 '그럼~. 그런데 사람들이 이 시를 못알아봐'라는 취지로 대꾸하자
금홍 왈, '시팔 놈들, 시를 되게 못보네"
'진짜 사나이'는 소극장에서 우화적인 연극 정도로 공연할 내용을 영화로 찍은
것인데요, 그 유치찬란함이 민망스러운 면도 많지만,
권해효, 김학철, 주호성 등 배우들이 그야말로 연극적 어조로
무슨 잠언같이 툭툭 내 뱉는 문어체 대사들이 멋졌어요. (기억은 잘 안나네요..TT)
여하튼 이 두 영화를 권했다가 단 한번도 좋은 소리를 들은 적 없으니
여러분께도 권하지는 않습니다. 걍 저 혼자 좋아할래요.
세상에는 평론가들이 별 한개도 주기 아까와하며 분개하는 영화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와닿는 대사 한마디, 한 장면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