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강의석군 글 보고 떠오른 고교시절 사건..

  • dmajo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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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석군 관련 글을 읽으니 생각나는 고등학교 때 사건이 있네요.(포인트가 좀 안 맞을지는 모르지만)

고1때(80년대 중반임..TT)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강요했습니다. 다들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니까 한다는 식으로 남아는 있었죠. 저는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빌려와서 주변 놈들과 돌려보며 시간을 때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반 반장이 어느날 종례시간에 자기는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니 앞으로는 그냥 가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하 결례지만 '담임'으로 축약)은 살짝 열받았으면서도
의연하게 너는 반장이니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라..는 취지로 좋게 이야기했는데 반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열받은 담임은 갈테면 가라(황장엽?)고 소리를 빽~

반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란듯이 가방을 싸서는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급기야 담임은 나가는 반장을 퍽퍽! 짧고 굵게 구타하는 사태가...
우리는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112신고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순종 시대인지라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담임은 반 분위기에서 팽팽한 반항의 기운을 느꼈는지 모두를 죽 둘러보고는  황당하게도 "나, 오늘부터 너희들 수업 못해. 반장부터 나서서 선생을 무시하는 분위기에서 수업 못해. 알아서들 해."
하고는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왠 횡재냐 하면서 다 가버렸죠 뭐. ^^;;

담임은 국어 담당이었는데, 진짜로 다음날부터 국어수업시간에 안 들어오는 거에요.
다들 웅성웅성하다가 내린 결론은 담임은 반장이 교무실로 와서 무릎꿇고 잘못했다고
빌고 우리도 모두 선생님~ 죄송해요~ 수업해주세요~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반 아이들의 의견은 다양했지만;

1번유형: 담임도 짜증나지만 왜 반장이 일을 시끄럽게 만들어서 귀찮게 했느냐.
             무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영화 찍을 일 있냐.
2번: 담임이 기회를 틈타 날로 먹으려고(?) 하네. 수업 안하면서 월급은 왜 받냐
3번(소수): 그래도 담임선생님인데 반장 니가 너무 무례하게 군거 아니냐. 할말 하더라도
               태도가 너무 반항적이었던 것 아니냐.
4번(더 소수): 반장 너 멋지다. 나도 야자 하기 너무 싫었다. 너 용기 있다.
(참고로, 저는 솔직히 2번...이었던 것 같음 ^^; 1번이 제일 다수. 고교 교실에서
귀차니즘의 역사는 깊다고 볼 수 있음..)

묘하게도 반장이 잘했건 못했건 지금 상황에서 반장이 무릎꿇고 빌고
우리가 수업해달라고 애걸하는 것은 왠지 싫다는 점은 모두 동감이었습니다.

결국 어찌어찌 낸 결론이 우리끼리 걍 수업하자. 였고, 당시 성적이 젤 좋았던(잘난척해서 죄송 ^^;)
저보고 수업을 하라는 거에요.  일이 이쯤되자 본의아니게 책임감을 느끼게 된 저는 매일 가던
만화가게도 안가고 열심히 수업준비(?)를 해서 수업을 시작했고, 왠일인지 게으르기 이를데 없는
녀석들도 열심히 수업을 듣는 분위기. 평생 안하던 질문을 하질 않나...(만만했기 때문인지도..
질문 말투가 대체로 "야, X발, 근데 환유법이란게 대체 뭔 개소리였냐?")

국영수만 치는 월말 실력고사를 앞두고 더더욱 불타오른 저는 시험범위내 출제예상문제를 뽑아서 소위 족집게 강의까지 했는데, 설마하니 이게 거의 다 적중.  시험결과 반 평균 국어성적이 90점을 넘었고(다른 반 평균은 80점 정도), 다합쳐도 반평균 전교 1등.

결말이 궁금하세요? 실화는 영화처럼 극적이진 않더군요.
시험성적이 나온 날 조회시간에 들어온 담임은 뻘줌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칭찬을 하더니
"그동안 너희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니까 더 잘되지?
자율적인 수업방식을 더 확대해보면 어떨까 싶더라"

......다들 어처구니가 서울역에 그지 없는 표정이었지만.
묘하게도 흐지부지 그렇게 마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하고 싶은 사람만
하는 것으로 되었고(그래도 상당수가 남더군요. 집에 가봤자 엄마 잔소리가 더 귀찮다나요?)
그때부터 학기 내내 국어수업시간은 10명 정도의 학생이 돌아가면서 수업준비를
해와서 진행하고 담임은 옆에 앉아 지켜보다가 학생의 수업이 끝나면 정정 및 보충 강의만 진행.
(근데 대학교 발표수업 비슷하게 그럴 듯했었던 기억임)

영 마무리가 뜨뜻미지근하죠?
아마 당시 저희가 80년대 고교생 다운 체제순응적 학생들이었던 때문도 있겠지만,
또 이런 부분도 있어요.

위 시험성적 발표날 조회가 끝난 후
반장에게 "야, 최소한 담임이 너한테 감정적으로 때려서 미안하다고 사과는 해야하는 거 아냐?"
물었더니, 반장 녀석 왈, "뭐, 사실 담임도 그동안 나름대로 불편하지 않았겠냐? 아까 조회때
말하면서 담임도 스스로 좀 쪽팔려하는 거 같더라. 그래도 선생인데 굳이 사과까지 시켜야 되겠냐?"

그리고, 다들 별 말은 않았지만, 공감했습니다.
담임이 가증스럽게 자기합리화를 하는 말을 했지만, 사실 당시 사회 내지 가정 분위기에서 소위 '웃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자기 잘못을 쿨하게 시인한다는 것은 거의 있기 힘든 일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담임도 나름대로 여러가지 생각이 들고 고충이 있었겠지만 마지막 한 가닥 권위와 자존심을
부여잡아 보려고 저런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거였겠죠. 사실 평소 담임이 특별히 성격이 이상하거나
불성실한 선생님도 아니었거든요. 수업도 열심히 잘 했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들 스스로도 평소 '미안하다''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는 죽어도 쪽팔려서
하기 싫은 사내아이들이었거든요...

그나저나,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은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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